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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건 의사
게시물ID : freeboard_13093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스트댓
추천 : 0
조회수 : 10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4/27 11:14:44
안중근(안중건) 의사에 관하여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년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계몽운동 및 의병활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뒤에 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건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건의 정신으로
 
<이창호 칼럼> http://www.cnews041.com/sub_read.html?uid=108167
 
  안중건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황해도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성균관진사인 부친 안태훈과 조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던 안중건이다. 그는 왜 그런 편한 삶을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을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 야욕이 노골화 되면서 우리 조국의 국운이 날로 기울어 갈 때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깊은 고뇌 속에 시대정신을 실천한 대한국인 안중건을 기억한다.
 
 현재 중국 하얼빈역에 가면 역사벽면에 2개 시계가 걸려있다. 그중 1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다른 1개는 9시30분에서 멈춰 서있다고 한다. 이 멈춘 시계가 있는 곳은 하얼빈역에서 안중건의사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는 총탄에 쓸러진 1909년 10월26일 9시30분이며 그대로의 시간을 이곳에 직접 재현하여 ‘멈춘 시계’의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계가 멈춘 9시 30분은 ‘안중건 정신’이 작금에도 변함없이 그만큼 지엄하고 신성한 의미를 지녔다는 의미다.
 
 바로 그가 구국의 별, 민족의 횃불 같은 정신으로 남은 안중건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살펴보자.
 
 먼저, 안중건은 이미 100년 전에 동북아를 넘어 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구상한 사상가이자 그 구체적인 실천방략까지 고민한 위대한 실천가였고 아울러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는 것이 대한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한 문명 개화론자이자. 동시에 일본의 보호정치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 침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였다.
 
 둘째, 안중건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열강의 이해타산 속에서 만국공법이나 국제법이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이 먼저 포로에 관한 국제공법을 준수하고 본인도 그에 따라 정당하게 재판받기를 당당히 요구한 이상주의자였다. 또 의병투쟁이 무력할 때 국제열강에 대한 충격요법으로 한국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고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공판 과정에서도 개인의 운명보다는 거사의 목적을 알리는데 주력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셋째, 안중건은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이자 교육자, 애국독립투사였다. 그는 청년기 이후 사회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을 전개한 구한말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였다. 근대 민족의식, 민권사상, 국권사상을 가지고 있던 투철한 사상의식을 가졌던 그는 조국이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을 한 교육자였으며, 의병투쟁에 직접 참가한 실천적 애국독립투사였다.
 
 넷째, 안중건은 민족 독립의 논리와 동양 평화의 논리를 불가분의 관계로 구조화함으로써 일본의 침략주의를 무력화시키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는 자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강조하며 지역 협력을 강조한 열린 민족주의자이자, 진정한 동양 평화의 주창자로서 국제 평화주의자였다.
 
 한편 이것만으로 안중건이라는 한 사람의 면모를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갖게 된 애천(愛天), 애족(愛族), 애인(愛人) 안중건 정신은 자신의 삶을 일체화 시킨 그의 독특한 동양평화론을 제창하게 되었다고 본다. 단지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로만 표현되고 있는 그의 숨겨진 면모를 좀 더 드러내 그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 졸자의 <안중건 평전> 집필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또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는 ‘적을 맞아 앞장서는 것이 장수된 자의 의무’라는 뜻이며 또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유묵 속에 확실하게 안중건의 정신으로의 자세를 잘 드러내는 글귀이다.
 
 
中하얼빈 '안중건의사 기념관', 2배 규모로 확장된다
역 개축 연계해 2018년 재개관..안 의사 유물 망라
연합뉴스 | 입력 2016.04.16. 11:21  
 
역 개축 연계해 2018년 재개관…안 의사 유물 망라
(선양=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소재 안중건(安重根) 의사 기념관이 2018년 말까지 현재의 2배 규모로 확장해 재개관한다.
16일 관영 신화망(新華網)에 따르면 하얼빈시와 하얼빈 철로국은 2018년까지 3년간 시행하는 하얼빈역 개축 공사와 연계해 역사 내 200㎡ 정도의 안 의사 기념관 규모를 두 배 늘려 재건키로 했다. 관련 비용은 중국 측이 모두 부담한다.
 
 
하얼빈역은 1909년 10월26일 안중건 의사가 일제 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역사의 현장이다.
기념관에 안 의사 생애와 업적, 이토 처단 관련 자료·유묵 등이 전시됐고 플랫폼 쪽에 설치된 대형 유리창을 통해 거사 장소를 바라볼 수 있다.
하얼빈 시와 철로국은 "총사업비 65억3천700만 위안(약 1조1천565억원)을 들여 노후한 하얼빈역사를 전면 리모델링하고 승강장 규모를 플랫폼 7개, 철로 16개로 늘릴 계획"이라며 "새로운 안 의사 기념관이 독립적인 전시실을 갖추고 역 앞 광장으로직접 연결되는 형태로 기존보다 2배 커진 규모로 설계된다"고 밝혔다.
 
재개관할 기념관에는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이 소장한 안 의사 관련 유물 등이 이곳에 총망라된다.
안중건 의사 기념관은 지난 2014년 1월 중국 정부 주도로 문을 연 이래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과 일본 정부의 반발 속에 지금까지 30만여명이 다녀갔다.
하얼빈시 관계자는 "안중건 의사는 항일운동의 영웅으로서 중국인들로부터 널리 존경받고 있고 지금도 기념관을 찾는 관람객의 60% 정도가 중국인"이라고 말했다. 한편, 안의사 기념관 재건문제는 지난 11일 서울에서 열린 황교안 국무총리와 왕셴쿠이(王憲魁) 헤이룽장성 당서기의 접견에서도 논의돼 황 총리가 계속적인 관심과 협조를 당부하고 왕 서기는 높은 관심을 갖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안중건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 국내외서 열려

연합뉴스 | 입력 2016.03.26. 11:01 | 수정 2016.03.26. 12:03  
  안중건 의사의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26일 한국과 중국에서 열렸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오전 서울 안중건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안중건 의사 숭모회 주관으로 '안중건 의사 순국 106주기 추모식'이 개최됐다고 밝혔다.
기념식에는 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과 유족,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안중건 의사 약전 봉독, 유언 낭독, 추모사, 추모 공연, 헌시 낭송,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안 의사가 순국한 장소인 중국 다롄(大連) 뤼순(旅順) 감옥에서도 이날 오전 추모제가 개최됐다.
 
추모제에는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과 김형태 주중 한국대사관 정무공사를 포함한 200여 명이 참석했다. 다롄 한국국제학교 학생 대표는 안 의사의 유언을 봉독했다.
앞서 경남 창원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지난 25일 안중건 의사 유묵비 제막식이 열렸다.
1879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일제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힘쓰다가 일제의 강점이 본격화하자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자르고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한 안 의사는 같은 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뤼순 감옥에 투옥돼 일제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중에도 의연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던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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