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집안을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김 대표의 할아버지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가 1960년 4·19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고향 전북 순창에 출마했다. 명성이 드높았던 만큼 당선은 따놓은 것으로들 여겼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벽보만 붙여놓고는 선거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왜 선거 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자 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아랫사람들한테 표를 달라고 고개를 숙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과의 일화도 있다. 이태영 변호사가 몇몇 여성 지식인들과 함께 가족법 개정안을 들고 가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가인은 “1500만 여성들이 불평 한 마디 없이 다 잘 살고 있는데,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 찾아간 여성들은 눈물을 쏟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인은 사법부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로 꼽히지만 그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손자 김종인 대표에게서도 언뜻언뜻 이런 모습이 비친다. 옛날 양반집 명문가에서 대대로 형성된 귀족주의라고 할까, 아니면 지적 자부심이 지나쳐 세상 사람들을 다 가르치려고 드는 독선이라고 할까 하는 태도 말이다. 이런 느낌을 조국 서울대 교수는 ‘계몽절대군주’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근대사상과 철학을 배우고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결국 시대의 걸림돌이 된 경우다.
그의 ‘귀족풍’은 입고 있는 옷, 손목에 찬 시계에서부터 드러난다. 김 대표가 자주 간다는 식당이나 즐겨 마시는 술도 예사롭지 않다. 가까이 불러 쓰는 사람들도 뼈대있는 가문의 후예들이 많다. 김종인 대표의 영입 1호로 꼽히는 김현종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장 내정을 놓고 설왕설래 중인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 총선 공천 기간에 실세로 불렸던 김헌태 정세분석본부장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취향으로 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특성이 당 대표로서의 직무와 결합하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이고, 은혜를 베푸니 고맙게 받으라는 모양새다.
# 당은 시혜의 대상? 김종인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을 부를 때 항상 ‘이 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이다. “이 당에 온 건 수권정당을 만들기 위해…” “과연 이 당에 남아서 어떤 조력을 해줄 수 있을 것이냐” “고민고민 끝에 이 당에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나 ‘저’ 같은 지시사는 가리키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뒀을 때 쓰는 말이다. 대상에 포함돼 있거나 한 몸이 돼있으면 ‘우리’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나 김 대표는 ‘우리 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객관적인 용어인 더불어민주당이라 부르는 경우도 찾기 힘들다. 잘 나나 못 나나 함께 뒹굴고 더불어 헤쳐 나가는 자세라기보다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굽어보면서 지도하거나 베푸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니 당을 만들고 키워온 창업자들에 대한 존중감도 커보이지는 않는다.
총선 승리 다음날인 14일 김종인 대표가 서울 및 수도권 당선인들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했을 때다. 한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 묘역도 들르자”고 큰 목소리로 외쳤으나 김 대표는 아무 말 없이 현충원을 빠져나갔다.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10여명만 조촐하게 김대중 대통령에게 총선 소식을 전해야 했다.
당의 홍보를 맡은 이들이 총선 때 쓸 텔레비전 용 광고를 하나 만들어 김종인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를 열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과거 연설 장면을 주로 담은 것이었다. 시사회 뒤 ‘두 전직 대통령을 앞세우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일부 의견이 나오자 김 대표가 이를 받아들였다. 텔레비전 광고는 모두 15차례가 나갔지만 이 광고는 끝내 방송을 타지 못했다. 유세차량에서만 사용됐을 뿐이다.
# 대권 주자들도 다 아랫사람? 김 대표의 말에는 거침이 없다. 당의 대선 주자들에 대해서도 삼가고 조심하는 법이 없다. 김 대표는 최근 문재인 전 대표와 갈등을 빚은 뒤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이어갔다. 아슬아슬한 발언은 무수히 많지만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한 대목만 보자. 그는 “그 사람(문 전 대표)은 작문하는 것이 무슨 버릇인 것 같다” “자신이 무슨 당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말했다. ‘문 전 대표가 더민주의 대주주 아니냐’는 질문에는 “무슨 얼어 죽을 대주주냐”라고도 했다. 김 대표는 “앞으로는 문 전 대표를 만나려면 녹음기를 가져가야 되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서 전했다. 김 대표가 정청래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이유가 막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 대표의 발언 수위는 정청래의 ‘공갈’ 발언에 결코 뒤지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김 대표는 “당내 대선 후보감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표뿐만 아니라 김부겸 당선자, 박원순 시장, 안희정 지사 등 쟁쟁한 후보들을 한꺼번에 다 함량미달로 만들어버렸다. 유승민 의원식으로 말하면 모두 ‘얼라들’이다. 그가 더민주에 온 건 수권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항상 말한다. 수권 정당을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인물이다. 정책은 사실 인물에 맞춰서 간다. 그런데 당의 소중한 자산을 키우지 않고서 어떻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 20일 국회에서는 더민주의 20대 총선 당선자 대회가 열렸다. 그때 3선이 돼 돌아온 정성호 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초선 의원들이 기백을 편다고 막말을 하다 망했습니다. 상황 판단을 한 다음에 말씀하시고 정말 자제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시면 대선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김종인 대표가 맨 앞자리에서 열렬히 박수 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비례로만 5선인 그가 정성호 의원이 하지 말라는 초선 의원의 기백을 지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경남지역 국회의원 후보들이 29일 오후 경남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경남도 당사에서 열린 ‘도당선대위출범식’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창원/연합뉴스
# 약자에 대한 공감 없는 경제민주화? 김종인 대표는 우리 헌법 제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그가 ‘경제’는 잘 알겠지만 ‘민주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의 민주화도 정치의 민주화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백성이다. 고통 받는 약자들이 함께 뭉쳐서 자신의 요구를 외칠 때에서야 비로소 조금씩 전진할 수 있는 게 경제민주화다. 정당은 이들의 분노를 조직화하고 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김 대표의 경제민주화에는 민이 빠져있다. 밑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힘은 위험하니 대신 위에서 베풀겠다는 개념에 가까워 보인다.
김종인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을 찾아갔을 때다. 그는 이 자리에서 “노조가 사회적인 문제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근로자의 권익 보호에는 상당히 소외되는 분야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새누리당에서나 자주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김종인 대표가 누구와 더불어 경제민주화를 하려는 건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 약자에 대한 공감 부족은 주한 일본대사를 면담 한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는 합의를 했지만 이행이 제대로 안 되고 있으니 이행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발언한 데서도 드러난다. 당 대변인은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고 백방으로 뛰고 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김 대표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관심만 있었더라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인 대표에게 경제민주화 조항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해 준 사람은 남재희 전 장관이다. 그가 20여년 전에 119조 2항은 ‘김종인 조항’이라고 맨 먼저 언론에 기고한 게 시발이었다.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운 사이다. 그런 남 전 장관도 최근 <한겨레>에 실은 칼럼에서 이런 애기를 했다. “언론인 임재경씨는 ‘경제민주화를 비스마르크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고 촌평을 했다. 밑에서부터의 역동적인 힘은 누르고 위에서 시혜적으로 베푼 것이 독일제국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수법이었다. ‘각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 셀프 셀프 셀프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는 달리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기준은 대단히 높아 보인다. 자존감과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모든 국민들이 이른바 ‘셀프 2번 공천’ 파동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셀프 대표 추대’에 나섰다.
김 대표가 이끄는 비상대책위원회는 27일 회의를 열고 다음달 3일 당선자-당무위원 연석회의를 열기로 했다. 연석회의에서 차기 당 대표를 뽑는 전국대의원 대회를 언제 열지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당내 기류로 봐서는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내년 1~2월까지 계속 당 대표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한때 김종인 대표 측근들이 추진했던 합의 추대는 물건너 갔지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전당대회 연기 카드가 대안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당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국민의당 안철수, 천정배 대표는 선출된 권력이다. 그 권한을 연장하는 것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연장하는 건 전혀 다르다. 비대위 체제는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상태를 넘기기 위한 과도기적이고 임시적인 체제이다. 총선이 끝났는데도 비대위를 1년 동안이나 유지한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추진된다는 건 그만큼 당의 세력 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표는 광주 발언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태다. 김부겸 당선자는 아직 움직이기에 섣부르다. 6선의 정세균 의원은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듯하다. 박원순 시장, 안희정 지사는 서울시와 충남도에 발이 묶여있다. 당이 권력의 진공 상태에 빠진 듯하다. 그 절묘한 지점에서 김종인 대표가 서있을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김종인 대표의 좌우명이 “자연의 주어진 여건대로 산다”라고 한다. 주어진 여건을 너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현대적인 정당을 추구하는 더불어민주당이, 그것도 원내 제1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군주’를 계속 모신다는 건 스스로의 힘을 너무 불신하는 거다. 자존감이 바닥인 게다.
김의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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