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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백제판 흑태자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20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
조회수 : 97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14 21:15:12
흑태자 에드워드(1330-1376)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2세의 아버지로써 백년전쟁 초창기에 크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병력면에서 열세였던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안드로메다 관광까지 시켜주고, 게다가 포로로 잡은 프랑스왕 장2세를 극진히 대접하는 대인배적 면모를 보여서 당시 기사들의 귀감이 된 인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100% 선한 인물은 아니라서 폐왕 페드로를 위해서 자신의 영지에서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고 이걸 원인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흑태자라는 별명도 당시에 생긴게 아니라 나중에 생겼다고 합니다.) 


여튼 흑태자 에드워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에 태자 시절에 큰 활약을 한 인물인 근구수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백제 초창기의 왕들 상당수가 그러하듯 그가 언제 태어났고 몇살에 태자가 되었는지는 알려진게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름은 꽤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양서(梁書)에는 수(須), 《신찬성씨록》에는 귀수(貴首) 또는 근귀수(近貴首)로 속일본기(續日本紀)에는 귀류(貴流) 또는 구소(久素)라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가 언제 태자가 된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태자적부터의 활동상을 보면 상당히 일찍 태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통치(특히 군사적인 부분)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역사적인 첫등장은 369년 고구려 최고의 안습왕인 고국원왕이 전연에게 쳐발린 것을 만회하고자 그나마 좀 만만해 보이는(혹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던 백제를 견제하고자) 백제 변경을 2만의 대군으로 노략질 할 때였습니다. 그는 장군 막고해 등과 함께 급히 군을 이끌고 치양(반걸양)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백제는 말갈이라든지 마한, 가야 등등과는 여러 번 싸워본 경험이 있을지는 몰라도 고구려군에 대한 정보는 사실상 그리 많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천운이었는지는 몰라도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고구려군에 종군하여 다시 백제로 넘어온 사기의 결정적인 제보 <적의 주력은 빨간 기를 든 쪽임>를 알게되고 근구수왕은 고구려와의 첫번째 일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는 무미건조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전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투였습니다.  



첫번째는 근구수왕의 지휘가 매우 VERY 뛰어나다는 점이었고, 두번째는 백제군이 중국이나 유목민족들과 하루가 멀다하고 쳐싸워대는 고구려군을 바를 정도로 강군이라는 점, 세번째는 적의 주력이 빨간 기를 든 군사임을 알고 군을 움직여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백제가 고구려에 비해 정보면에서 앞섰지만 군사력이 안 받쳐준다면 적의 중요한 정보가 있을 든 아무런 소용이 없겠죠). 또한 이 전투는 우리 역사에서 얼마 안 되는 대규모의 회전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여튼 고구려군을 개발살낸 근구수왕은 그대로 추격하여 수곡성까지 이르고 돌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습니다. 근구수는 기세를 몰아 더 북진하려 했지만 여기서 함께 종군한 막고해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는 더 이상의 북진을 멈춥니다. 막고해의 말을 듣고 그대로 회군합니다. 더 북진하면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리고 북쪽 영역을 황해도까지 넓히고 거기에 있는 주민들까지 백제권에 편입한 것만으로도 치양에서의 승리는 상당히 큰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2년 뒤 371년 이번에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부자가 함께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에 짜잔하고 나타납니다. 고국원왕은 부랴부랴 군사를 이끌고 요격하러 내려오지만 그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사령관을 잃은 고구려군은 그대로 패주하게 됩니다. 아마 이 일이 백제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구려에게는 역사상 최악의 순간이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고구려는 훗날 광개토대왕 때 한번, 장수왕 때 혹시나 잊을까봐 또 한번 백제 역사상 최대의 치욕을 2번이나 안겨줌으로써 고국원왕의 복수를 말끔히 해내버립니다. 



4년 뒤인 375년 근초고왕이 죽고, 드디어 그가 왕위에 오릅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가 한 일은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이자 장인인 진고도를 내신좌평으로 임명해서 내각을 재편하여 조정을 안정시키는 것과 그리고 근초고왕 30년부터 수곡성을 함락시키고 북방 변경을 어지럽히는 고구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다시 한번 3만 대군을 소집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합니다. 백제 역사상 마지막 평양성 공격이자 근구수왕의 마지막 평양성 공격이었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소수림왕도 옳다구나 하며 군사를 이끌고 양측 군대가 크게 격돌합니다. 이 두번째 평양성 매치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단순히 싸웠다 정도로만 나와서 누가 이겼는지는 모르지만(물론 고구려본기쪽에는 정벌했다고 나옵니다. 근데 근구수왕쪽과 비교할 때 고구려가 정벌했다고 보기보다는 고구려가 수세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동년 11월에 고구려의 침입이 이어진 것을 보면 백제군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도 근구수왕 3년 11월 이후의 침입 기록을 마지막으로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구려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근구수왕 3년 11월에 있었던 고구려의 공격을 마지막으로 진사왕 6년(390년)까지 양측간의 큰 전투는 일어나지 않고,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듭니다. 이후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대의 기록은 다 자연재해나 진에게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들 뿐입니다. 상당히 카리스마가 넘치는 군주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생각보다 기록이 너무 부족한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사책에는 역시 근초고왕에게 가려서 별로 부각은 안 되지만 (안습ㅠ) 그 역시 백제 최고의 군주인 근초고왕에 못지 않는 인물임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백제 역사는 아시다시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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