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나를 찾으러 가는 여행
여행을 떠나기 몇 달 전 나의 정신적 멘토인 L 선배의 권유로 김형태 씨의 방황의 기술(하단 인용)이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오토바이, 도보, 자전거 뭐라도 좋으니, 일단 떠나라는 선배의 말씀에 처음엔 적잖이 당황도 했지만, 자여사 카페의 자전거 여행기들과 그냥 걷기라는 디씨인사이드 여행기 등을 읽다 보니 어느새 나도 얼른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나의 여행이다.
거창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떠난 여행임에는 틀림없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그 방법이 서툴고, 잘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었지만,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다 보니 원하는 것들을 아니 그 이상을 얻을 수 있었다.
공익근무 소집해제 8월 27일.
태풍이 한반도를 상륙했던 터라서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카메라 등 기초 장비의 배송을 기다리고 드디어 떠날 날이 왔다.
2010년 9월 3일 아침 10시경
이하 김형태 님 공식 홈페이지에서 인용해 왔습니다.
[본] 방황의 기술
나는 계절 중에서 여름이 좋다.
끔찍한 열대야와 지리한 장마는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불어오는 바람에 여름 냄새가 흘깃 감지되면 모종의 해방감과 모험심이 발동한다. 여름은 언제든 요란한 준비 없이 일상에서 탈출해 갑자기 훌쩍 떠날 수 있으며, 목적지도 없이 여행하다가 배고프면 길가의 밭에서 과일이나 채소 서리로 끼니를 때우고 날이 저물면 별빛을 지붕 삼아 노숙을 할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다른 계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실제로는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무모한 여행이 낭만으로만 가득 채워지는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여름에만 가능한 무모한 여행의 기대감이 주는 해방감은 '관광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루한 일상과 완전히 다른 변화무쌍한 새로운 환경에 맞닥트려 당황하고, 적응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즐기는 '방황의 즐거움'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을 원하고 안정되고 굴곡 없는 생활을 원하지만 실제로 삶이 가장 견디고 힘들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낄 때는 다름 아닌 변함없이 똑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아무런 어려움이나 위험이 없이 안락한 날들이 계속 주어진대도 인간은 결코 그 안에서 온전히 평화만을 만끽하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나긴 진화의 시간을 겪으며 수많은 환경의 변화와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해오며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가 운동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 몸이 더 불편하듯이, 탐험가가 집에서 웹서핑만 하고 있으면 좀이 쑤시고 괴롭듯이 환경의 변화에 결사항전하며 오늘의 문명사회를 이룩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안락한 생활이 어느 정도 반복되면 오히려 불안이 엄습하고 불안에 휩싸인 정신은 병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거나 스포츠나 게임을 통해서 스스로를 '어려운 환경'에 내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난관을 헤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강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충전하고 비로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 있어서 여름은 2~30대 청년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티셔츠 한 장에 반바지 차림으로 배낭 하나만 대충 둘러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름처럼, 청년에게는 청년에게만 허락된 방황의 특권이 있다. 청소년은 미성년자라 안되고, 장년에게는 갖가지 책임 때문에 안되고, 노년에는 체력적으로 안되는 방황의 특권이 있다. 이것은 특권인 동시에 사회적 임무로서 청년기를 거친 어른이라면 모두 군 복무를 치르듯 청년기에 방황의 시간들을 감당했고 그 정도에 따라 삶의 보상도 달라지고 생에 대한 자기만족도도 달라지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무사안일한 단조로운 평화에 고착되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위기를 경험하면서 성장하며 안정을 느끼기 때문에 혈기왕성하며 미래의 무한한 변수를 가진 청년기에는 수많은 환경의 변화에 던져져야 하고 그 낯선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은 안정된 직장을 찾아 기성사회의 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거나 갖가지 핑계로 현재의 상태로 눌러앉을 궁리로 청춘을 탕진해서는 안된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이오 시절은 청춘이니 젊음 하나 믿고 떠나라.
소문난 명승고적, 맛집 멋집을 찾아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이제껏 만난 적이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 씨름하고 도전하기 위한 방황의 여행을 떠나라. 국토종단 자전거 여행도 좋고 무전여행도 좋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책으로의 여행이나 불꽃같이 타오르는 거침없는 연애도 좋다. 또 여러 가지 사회적 경험에 도전하는 것도 좋다. 다만 진정한 자아 여행의 가치는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출발 시점부터 내딛는 걸음걸음의 과정 속에서 매 순간 만나는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있다.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고 낯선 환경으로 이끌고 가는 방랑의 여행. 여행 일정과 목적지와 사전 정보를 잔뜩 안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해본 사람은 그 사전 정보가 현지에서 얼마나 무용한지를 안다) 아무런 준비도, 사전 정보도, 목적지도 정해져 있지 않은 여행처럼 청년의 방황의 여정은 당혹스러움과 난처함이 난무하는 모험과 스릴의 고생길이어야 마땅하다. 이것을 구시대의 극기훈련을 추천하는 것과 혼동하면 안 된다. 단순히 참을성을 기르기 위한 고생길이 아니라 변화에 대처하는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 여정이다.
몸이 떠나는 여행은 쉽고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그보다 먼저 정신이 무사 안일주의에서 보따리를 싸고 일어서야 한다. 일단 크고 작은 고정관념에서부터 벗어나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 "난 원래 그래" 같은, 자신을 단정하고 고착하는 말투와 사고방식을 떨쳐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깊이 관찰하고 더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가치로 미분할 줄 알아야 한다. 불확실한 가치관들을 머릿속에 잔뜩 담고 있는 것은 분명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가치관은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것이고 변화할 것이다. 세계가 변화를 일으킬 때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는 것은 고정관념과 비례한다. 하지만 혼란에 익숙한 사람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해결점이나 탈출구를 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모두가 당황할 때 당황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그 시대, 그 사회의 리더이다. 변화에 익숙한 자가 미래의 리더가 된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청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로서의 방황의 의미이다. 이 자아를 찾아 떠나는 방황의 시간은 청년을 유능한 인간으로 성장시켜준다. 생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경험들이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이 이것은 특권이자 임무이고, 다음 시대를 물려받을 신인류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숭고한 여정의 성장통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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