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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털코트를 입은 여자.
게시물ID : soju_121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호기심지옥
추천 : 4
조회수 : 61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10/24 03:56:02

-아 됐어 집에 갈게.

그 날도 나는 여자친구와 싸웠다.


나는 백수였다.

여자친구는 어떤 영화에서 유행어가 된 그 여대를 다니고 있었고 집도 꽤 잘 살았다.


주머니 속에는 5천원도 들어있지 않은 날이 많았고,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에 돈이 없는 날에는 여자친구를 만나기를 꺼려했다.


처음에는 여자친구도 이해했다

-돈 있는 사람이 쓰면 되는거지 뭐.


나중에는 이해하기 힘들어했고 우리는 자주 부딫혔다.

 -야 좀 심한거 아냐?

 -그래서 내가 안나온다고 했잖아.

 -정말 한푼도 없을지는 몰랐지

 -너네 집 앞에서 커피나 한잔 마시자니까 니가 영화보자며


그 날은 몇만원이 수중에 들어왔다.

누나가 키보드 위에 놓고 간 돈.

-컴퓨터 앞에서 궁상 떨지 말고 좀 나가라 임마


나는 오랜만에 누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여자친구의 집이 가까운 압구정동에서 만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압구정동 디자이너스 클럽 옆에 무슨무슨 아트홀이 있다.  10년 전 그 자리엔 극장이 있었고 건물 외벽 기둥에는 고릴라가 달려 있었다.  아마 킹콩을 연출한 것이었겠지.


그 킹콩을 흉내내는 고릴라 조형물아래에서 우리는 싸웠다.


그 날 싸움에는 여러 이유와 과정이 있었다.

영화표가 없었고, 가을 비는 내리는데 우산도 없었고.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 그 시점에 여자친구의 친구들이 여자친구와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는 그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내 눈치를 봤고, 나는 그 모습을 비꼬아 말했고, 등등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지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집에 가겠다고 짜증을 부리고 등을 돌리는 여자친구의 등 뒤에 퍽이나 집에 가겠다고 소리쳤다.

마침 비가 그쳐버린 덕에 여자친구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붙잡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길을 건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쪽팔렸다.


우리집으로 가는 버스가 길 건너에 보였다. 하지만 난 길을 건너지 않고 같은 번호의 버스를 반대방향으로 올라탔다. 대학로까지 갔다가 우리집으로 돌아가는 가는 버스. 지금은  버스를 타고 얼마 되지 않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토요일 한 낮에 홀로 버스를 타고 왕복 2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다녀올 생각을 하니 한심했다. 창밖을 보면 괜히 궁상을 떨고 싶어질 것 같아. 통로쪽을 향해 자리를 옮겨앉았다.


버스를 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MP3도 없었고, 책도 들고나오지 않았고, 여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멍해졌다.

앞자리 등받이의 무늬와 그 옆자리 등받이의 무늬는 왜 비슷하지만 다를까. 몇미터짜리 천을 가지고 재단을 하면 같은 무늬가 보이지 않을까? 지금 건너는 다리가 성수대교인가? 성수대교가 무너졌던게 언제였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건 언제였지? 저기 앞에 배춧값이 비싸네 싸네 하는 이야기를 아주머니는 한달에 전화요금을 얼마나  낼까? 남편이 통신사 직원이라 무료일까? 저 교복입은 여자애는 스클룩일까? 그냥 노안일까? 빗방울 소리는 왜 저렇게 한소리처럼 들릴까? 빗방울들 소리가 아니라 한음절로 주욱 이어지는 소리는 참 신기하다. 창밖에 저 티코는 왜 저렇게 장식을 많이 했을까? 


-저기요. 


저기 저 차사는데 든 돈이 더 클까 차 치장하는데 든 돈이 더 클까?


-저기요


저기요. 비가 내리는데 나는 우산 없이.......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니 웬 여자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보고 말했다.

-저기 00씨 맞죠?000씨


내 이름은 맞지만 나는 그녀를 기억할 수 없었다.

-네. 맞긴 한데요.


하지만 그녀는 말을 잇지 않고 미소를 짓고는 창밖을 내다 봤다.


내가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해서요.

-아 저 기억 안나요? 어 음....괜찮아요. 

-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창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어깨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 핑크색털반코트. 무릎 보다 약간 위에 놓인 검은색 스커트. 검은색 스타킹. 치마와 스타킹의 경계에 놓인 루이비통가방. 검은색 힐. 기억나지 않았다.

안경자국이 약간 남은 낮지 않은 콧등에 동그스름한 코끝. 조금 큰 편일 것 같은 눈은 약간 위로 향해 있었고 속눈썹은 뷰러와 마스카라의 힘으로 단정하게 위로 말려 올라가있었다. 눈 주변에는 펄기가 살짝 보이는 연한 핑크의 아이쉐도우.  볼에 여드름흉터는 없이 오른쪽 볼에는 아주 작은 점 두개가 나란히 밖혀있었다. 눈주변의 아이쉐도우와 비슷한 색감의 핑크빛 볼터치. 그녀를 아무리 기억해보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복색을 보니 결혼식이라도 다녀오는 걸까? 


미팅에서 만났나? 소개팅? 친구여자친구? 조인트MT가서? 그냥 수업 같이 들었던 학교사람인가? 여자친구 친군가? 미간을 찌뿌리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요?

-아. 이거. 토끼털이에요?


그녀를 관찰하다가 놀라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라는게 토끼털이라니. 그녀의 옷을 가르키며 멍청하게 질문한 내 꼴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버스안에 있던 꽤나 많은 사람들이 내쪽을, 나와 그녀쪽을 바라보았다.


그 때 버스가 급정거하며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팔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중심을 잡았다. 버스의 급정거에 놀랐을텐데도 웃음이 다 가시지 않은채로 내 팔을 놓고 말했다.


-토끼털인지 

웃음

-몰라요. 

웃음

-무슨털인지. 

웃음

-그러보고보니

웃음을 삭이며 짤막 짤막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니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옷을 펼쳐 텍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옷을 펼치는 모습에 그녀의 코트안에 다른 옷이 있을거라는건 알지만 멍청하게 놀라버렸다.


옷 안의 택을 보고 나서 그녀는 말했다.

-아니네요 토끼털

-네. 아니네요.

그녀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저 기억나셨어요?

-아니요.

-네


그녀는 한 번 더 미소짓고는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대체 누굴지, 그리고 토끼털은 왜 물었을까에 대해 고민하며 그녀를 보다가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스타킹의 올이 나가있었다. 꽤나 길게 뜯어진 스타킹밑으로 하얀 살색이 보였다.


아까 버스가 급정거 할 때 내 손에 나간걸까?


말을 해줘야할까? 말아야하나? 고민끝에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녀는 바로 돌아봤다.

-네

나는 스타킹얘기는 하지 않았다.

-저 어떻게 아세요?

그녀는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냈다. 나는 설마 저 지갑속에 내 사진이 담겨있을지도 모른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변명이지만 누구나 그 정도 상상은 하지 않을까? 다이어리를 넘기는 그녀의 옆모습은 꽤나 진지해보였다. 한장한장 넘어가는 다이어리에는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자주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여깄네요.


사진안에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있는 모습의 내가 있었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만 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은 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이거 직접 찍으신거에요?

-아뇨.

-그럼 누가 찍은거에요?

-음...모르겠어요.


나는 그녀의 곤란하다는 표정에 어디서 귀척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 내려야되요.

-저기

-네?

-스타킹이요.

-네?


그녀는 자신의 스타킹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이를 어째.


그녀는 가방으로 무릎을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리를 치웠다. 


-고맙습니다.

통로에 선 그녀가 말했다.

그녀 무엇에 대해 고맙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리기전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버스밖으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착찹했다. 대체 누구일지 이제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버스에서 내려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워 누구인지 물어보는 상상을 했다. 버스는 출발했다. 앞서 했던 멍한 생각들은 더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몇 정거장 뒤 나는 창가쪽으로 자리를 옮겨앉다가 핑크색 장지갑을 발견했다. 아까 그녀가 다이어리를 꺼내고 다시 넣지 않은 듯 싶었다.돌아가서 그녀가 내린 정류장으로 찾아가도 그녀를 만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지갑을 보다가 생각났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 낼 방법이 생겼다. 지갑을 열어보면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갑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인지 단지 궁금할 뿐인지 내 스스로 알 수 없었다.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이 지갑을 열어보지 못하게 했다. 지갑을 열어본다면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서가 아닌게 될 것 같았다. 그녀와 인연을 이어보고 싶어서 그 지갑을 열어보는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특히 여자친구가 물어본다면 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버스는 어느덧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비는 이제 완전히 그쳤다. 나는 정류장옆 빗방울에 얼룩진 건물 계단에 핑크색 지갑을 들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 여자를 생각해 볼수록 매력있었다. 내 안에서 내가 그녀를 점점 더 예쁘고 아름답게 가공하고 있었다. 지갑에 코팅된 에나멜에 손에서 난 땀으로 지문이 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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