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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관우에게 단독군사작전권이 있었을까?
게시물ID : history_260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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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12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09 01:20:52

관우는 단독군사작전권이 있어 독자적으로 양번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 
그 이유로는 
1. 형주 도독과 비슷한 동독형주사의 직책. 
2. 관우에 대한 유비의 신뢰.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니 나는 그러한 견해에 동의할 수 없어 이 글을 쓴다. 
일단 사서를 보자. 


  

선주는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封拜)하니 관우를 양양(襄陽)태수 탕구장군(盪寇將軍)으로 삼아 강북(江北-장강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로 임명했다. 
- 관우전 -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 
유비가 형남4군을 공략한 때는 208년의 일이니 관우가 령 양양태수 탕구장군이 된 시점은 208~209년의 일이다. 양양군은 조조가 남군을 갈라 설치한 군으로 실제로는 위나라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관우는 양양군을 실효지배할 수 없었다. 자국의 땅이 아닌 곳에 임명하는 것을 '요령'이라하는데 이는 적국, 속국 등에 행하여지고 동맹국에는 실행되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령은 관직의 부족을 충당하고 해당 관직에 대한 선임명권이 있었음으로 추측한다. 변경의 요령직에 임명됐던 관우, 위연, 강유 등의 호전성을 볼때 해당 지역의 공략제안 등의 권한도 있었던것 같다. 지금까지 관우가 스스로의 판단하에 단독적으로 군사작전을 행한 적은 없었다. 

관우는 214년 이후로 하여 형주 책임자인 동독형주사의 직책을 담당한다. 흔히 관우가 형주 전체에 대한 인사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관우는 양양태수부의 관속은 임명할 수 있었으나 남군 등의 지역에 대한 인사권은 없었다. 남군태수인 미방은 유비가 임명했고 공안에 주둔한 장군 사인도 유비가 임명한 인사였다. 미방은 장비의 후임자이고 사인은 조운의 후임자이다. 
관우가 동독형주사가 된 214년 이후, 유비집단과 손권집단 간에는 큰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형주 반환을 요구한 손권과 그것을 거절한 유비로 인한 양 진영의 형주 지역에서의 충돌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그전부터 깨질 조짐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형주 반환을 거부한 유비에 격분한 손권은 장사, 영릉, 계양의 3군에 관리를 파견하여 소유코자하나 관우에 의해 그들이 축출당하자 무력으로 기습하여 3군을 빼앗고만다. 이에 대해 유비는 직접 공안으로 출정하고 관우로 하여금 3만을 이끌고 익양으로 진격하도록 한다. 관우가 단독적인 군사작전권이 있었다면 오나라에 3군을 뺏긴 후 즉각적인 대응이 있었어야한다고 보는데 익주 성도에 있던 유비가 공안에 오기까지 관우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사서를 보자. 

  

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 선주전 - 

이 해,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巴丘)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돌려주고, 남군, 영릉, 무릉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 오주전 - 

이후에 유비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유장을 병탄하려고 도모하며, 관우를 남겨 지키도록 했다. 손권이 말했다. 
"교활하게 포로가 감히 속이다니." 
관우는 노숙이 경계를 인접하고 있게 되자. 자주 의심이 있었으므로 경계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그들을 진무시켰다. 그러나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자. 손권은 장사, 영릉, 계양의 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취하도록 했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직접 공안으로 돌아와서 관우를 파견해 세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노숙은 익양에서 관우와 서로 대항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유비는 상수를 경계로 하여 나누었으며, 쌍방의 군대는 대결을 끝냈다. 
- 노숙전 - 

이 때 유비는 관우에게 영을 내려 진수하면서 형주를 독점하고 있으니, 손권이 여몽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楊) 3군으로 공취하라고 했다. 여몽이 2군에 편지를 보내 귀복해 올 것을 바랬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普)만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 유비가 촉에서 친히 공안으로 와, 관우를 파견 3군을 쟁취하도록 했다. 
- 여몽전 - 



이상이 령 양양태수 탕구장군 동독형주사였던 관우의 군사활동에 대한 기록이다. 각 기록에서 전하는 바에 대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유비가 관우에게 영을 내려 형주를 진수하도록 하고 익양으로 진격하라 한 것이다. 손권 또한 노숙이나 여몽에게 영을 내려 관우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그럼 관우가 스스로 군사를 지휘하여 작전한 것은 언제인가? 이것 또한 사서를 보는것이 정확할 것이다.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로 삼았다.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예주 양국),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 관우전 - 


위의 기록을 보면 관우는 유비에 의해 전장군으로 승진하고 가절을 받은 후에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가절은 임시로 절을 받은 것으로서 고위관료에 대한 처벌권이나 지휘권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예로 제갈량의 북벌에서 사마의는 맞아 싸우려하지않았으나 제장 등의 반발로 인해 조정에 표를 올려 신비로 하여금 절을 지녀 제장들을 무마하는 일화 등이 있다. 
아래에는 이해를 돕기위해 자료를 첨부한다. 

  호부 (링크)          모절 (링크) 


사지절使持節, 지절持節, 가절假節 :


삼국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군사와 정사를 통솔하던 관리에게 준 것으로, 중급 이하의 관리를 참할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 다음 등급은 지절持節이라고 불렀는데 관직이 없는 자를 참할수 있었다. 그 다음 등급은 가절假節이라고 불렀는데 군령을 범한 자를 참할 수 있었다. 


절전節傳, 인수印綬, 부책符策 : 

절節은 고대 사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물信物이었다. 주례周禮 추관秋官 '소행인小行人'에 "천하에 이르는 6절에는 산국山國에서 쓰는 호절虎節, 토국土國에서 쓰는 인절人節, 택국澤國에서 쓰는 용절龍節이 있는데 모두 쇠로 만들었으며 도로에서 쓰는 정절旌節, 문관門關에서 쓰는 부절符節, 도비都鄙에서 쓰는 관절管節은 모두 참대로 만들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전傳은 화물 통행 증명서인데 지금의 화물 통행증과 비슷했다.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 문답석의問答釋義에 "무릇 전은 모두 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5치이고 그 위에다 신표로 글을 쓰고 하나의 판자로 그것을 봉한다. 봉한 곳에는 어사의 인장을 찍어서 신표로 삼는다. 지금의 과소過所(행인의 통과에 필요한 증명서)와 같다."라는 기록이 있다. 부符는 조정에서 명령을 전달하고 군사와 장령을 조동시킬때 쓰던 증명서 같은 것이었다. 구리나 참대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다 글자를 쓴 뒤 둘로 쪼개서 각기 하나씩 가졌다가 쓸 때에 맞춰보았다. 사기史記 효문본기孝文本紀에 "처음에는 군국수상郡國守相에게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배인의 사기집해에는 "동호부의 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나라에서 군사를 조동시킬때 사자를 군에 파견하여 부절을 맞춰보아 서로 맞으면 비로소 지시를 듣는다. 죽사부는 모두 참대 화살 다섯 개로 만들었다. 길이는 5치이고 거기에 전문篆文 글자를 새기는데 첫째부터 다섯째까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한구의漢舊儀에 '동호부는 군사를 조동시키는데 쓰는데 길이가 6치이고 죽사부는 징벽하고 출발하는 것을 출입시킨다.'라는 기록이 있다."라고 했다. 책策은 책서策書인데 관직에 임명하고 작위를 수여할때 부신符信으로 썼다. 오늘의 임명서와 비슷했다. 


권력이 컸던 제갈량, 사마의 등도 마음대로 지역정벌을 하지못했는데 그보다 권력이 적었던 관우가 감히 맘대로 그리하진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조조는 사실상 모든 권력을 틀어쥔 실권자였음에도 형식적으로라도 상표하는 절차를 밟았다. 
관우가 유비와 특별히 신뢰하여 그랬다라는 반론도, 관우는 유비가 신임하는 중신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시호가 사후 꽤나 오랜 후에 수여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신용과 국가시스템에 의한 권한에는 거리가 있었던걸로 생각한다. 

 

당초 선주(先主) 때에는 오직 법정(法正)만이 시호를 받았다. 후주(後主) 때에는 제갈량은 공덕이 세상을 덮고 장완(蔣琬), 비의(費禕)는국가의 중임을 떠맡았으니 또한 시호를 받았다. 진지(陳祗)는 총애를 받아 특별히 특별한 포장이 더해졌고 하후패(夏侯霸)는 멀리 와서 국가에 귀부했으므로 또한 시호를 받았다. 그러다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과 조운이 시호를 추증받았으니 시론(時論)에서는 이를 영예로운 일로 여겼다. 



또, 손권의 형남3군 침탈을 관우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반박해보자면, 
관우는 강북에 주둔하여 형남3군과는 거리가 꽤 멀었던데다 형남3군을 뺏겼음에도 유비의 명이 있기전까진 그곳을 지키고있었다. 그리고 애초 군현의 직접적인 방비는 태수 및 현령/현장의 몫이다. 

 

건안 20년(215)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주의 남쪽에 위치한 세군 --- 장사ㆍ영릉ㆍ계양 --- 을 급습하도록 했다. 
요립은 탈출하여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비는 평소부터 그를 알고 있었으므로 예우해 주고 심하게 문책하지 않았으며, 파군태수로 임명했다. 
- 요립전 - 



관우가 양번전쟁을 일으킨 것은 한중전에 호응하여 위나라 내부를 교란시키고 유비가 한중에서 조조를 격파하자 그 분위기에 힘입어 위나라를 더욱 몰아부치기위해 한 것으로 생각한다. 유비는 관우에게 가절을 수여함으로서 그의 지휘권에 대해 묵인 및 단독작전의 허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p.s

김경한 삼국지에는 해당내용이 어떻게 나왔나 궁금해서 발췌함.


적어도 관우의 군사행동은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유비는 건안23년 한중을 공략하면서 형주의 관우에도 여차하면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비상을 걸어놨다. 

(중략)

조인이 완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관우는 전혀 움직이지않았다. 이를 보면 관우가 독자적 판단으로 군대를 출동시켰을 가능성이 없었음을 알 수있다. 관우는 유비로부터 만약에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라는 명령만 받은 상태였지 아직 출병여부에 대한 지시가 없었으므로 완성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않은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smh2829/22070419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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