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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꿈 속의 창작자
게시물ID : panic_877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lassWinter
추천 : 11
조회수 : 80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5/11 09: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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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는 수척하고 초췌했다. 어째서 불렀냐고 연신 물어봐도 대답 없이 그저 술병만 조용히 들이킬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술잔을 비웠다. 평소에 방 밖으로 나오는 걸 보기도 힘든 사람이, 혐오하던 술까지 마시자며 사람을 부르는데 얼마나 중대한 일일 것인가. 호기심은 내게 깊은 인내심을 가져다주었다. 

몇 병이나 마셨을까,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의 오랜 버릇대로 스마트폰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응? 젠장. 말해주지. 말해 준다고. 그러니까, 이런 말이 있어. 미국 쪽 얘기야."

유학도 갔다온 고급 인력 주제에 소설계에 투신해서인지 그는 그에 대한 얘기를 많이 쓰는 편이었다. 단적으로 데뷔작인 '꽃비'부터가 멀리 떨어진 사람에 대한 공포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그가 으레 말하고 했던, 유학 시절의 무용담을 하려는 줄 알고 약간은 김이 샜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꿈 속에서 창작하지 마라. 그래. 대학교에서 들었어. 대학교에. 내가 원래는 영어 소설을 쓰려고 했단 말이야. 문법에 약하지만 않으면. 그래서, 내가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이란 걸 들었어. 문창과 정도 돼. 딱 한 학기 듣고 나랑 적성이 안 맞아서 때려쳤지."

꿈 속에서 창작하지 말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지금 하려고 하잖아. 보채지 말아봐."

그는 술을 한모금 더 마셨다.

" 수업에서 한다는 게 딱 한가지 밖에 없었어. 매 주 단편을 쓰고 돌아가면서 심사를 받는거야. 내가 지금 단편 소설만 줄창 쓰는 이유가 거기서 영향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삼주차였나 한 백인 학생 하나가 최초로 만점을 받은 적이 있어. 근데 그 소재가 특이했지."

잠시 긴장되는지 스마트폰을 손에서 이리저리 돌리던 그가 술잔을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꿈에서 창작하는 사람에 대한 공포소설이었어. 설명에 유명한 민담이라고 적어놓았는데 수업을 듣는 21명의 사람이 전부 무슨 민담인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런데도 소름끼치는거야. 아주 끝내줬어. 이해가 돼? 보통 민담, 도시전설 같은 걸 소재로 하려면 알려진 걸 바탕으로 공감하는 공포를 끌어내야 하잖아. 그게 아니면 무지막지하게 필력이 좋던가."

근데 그 학생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평범하게 C나 받던 사람이 그 소재를 썼더니 단박에 A를 받았더라, 하는 거였다. 평가의 주체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었으니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던가. 그는 이미 이야기를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나는 당분간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수업 도중에 교수님이 우리 모두 그 문제의 민담을 모른다는 걸 알고 해설도 해 줬지. 교수님은 알고 있었거든. 너도 편집자지만 글 몇번 끄적거려봤으니 알 거 아냐. 상상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될 때가 있는 거. 그게 사실은 브레이크야."

브레이크?

"인간의 집중력이라는게 빈곤해서 한 얘기를 머리로 오래 못 그리거든. 현실에는 방해물이 너무 많으니까. 근데, 근데..."

꿈에서는 가능하다는 얘기겠지. 옛날에는 소설도 몇 번 써보았지만, 나는 어째서 그게 문제가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은 걸 보니 그와 같은 잘 나가는 소설가들, 소위 '업계'에서나 통하는 그런 문제인 걸까.

"그러니까, 먹힌다고. 삼켜지는 거야. 자기가 만든 시작도 끝도 아는 이야기에 먹혀서 영영 못 나온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핫하..."

서러운 웃음을 내뱉으며 그는 갑작스럽게 문장을 끝냈다. 이어지는 건 끝없이 넘어가는 술이다. 그는 거의 인사불성 직전에 이를 때까지 다른 화제로 나와 실없는 얘기를 계속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연 건 대리기사를 기다리기 시작했을 때 였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그는 아까 했던 이야기를 마저 하겠다며 내게 선언했다. 물론 나도 만취한 상태라 딱히 무언갈 하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넌 소설을 쓸 때 감정을 얼마나 이입하냐?"

"옛날에 습작이나 쓸 때에는 조금 이입은 했었지. 넌 심한가 봐?"

"심하면 쓰다가 울 정도로도 했었지. 그러니까 내가 일인칭을 쓰는 거야."

그런가.

"들어봐. 이번에 내는 거. 겨울에 원고 끝냈잖아. 그 무렵에 내가 깨 있던 거의 모든 시간에 그 원고 생각만 하고 있었어. 퇴고를 할 때 영혼을 깎아먹는다는 말 그대로 오로지 그 작업에만 신경쓰고 있었지. 하루는 그러다 잠에 들었어."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아마 대리기사가 언제 오는가, 정도였을 것이다. 난 그의 넋두리를 전혀 집중해서 듣고 있지 않았다.

"꿈에서 영감이 들었지.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이 꿈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어. 플롯을 세우면 즉각적으로 눈 앞의 풍경이 거기 맞춰 변화했으니까. 난 기쁨에 미쳐 날뛰며 영감을 구체화시켜갔지. 도입부가 세워지고, 그 위에 전개부가 씌워지고, 위기, 절정, 그리고 결말까지. 완벽했어. 복선은 복선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고 모든 대사 하나하나가 완벽했지. 원하면 어느 시점이든 가서 수정하면 됬어."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난 그대로 가위에 눌렸지. 공포소설을, 내가 만든 공포소설을, 읽으면서 가위에 눌린 거야. 내가 써놓은 묘사 하나하나가 내가 가장 보기 두려운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 한번만 들어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그걸 그대로 책에 옮겼을지도 모르는데 난 거기서 더 들어가기 두려웠어. 그래서 억지로 빠져나왔다."

대리기사가 도착하자 그는 내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거기서 한번이라도 끝까지 읽었다면 후회는 없었을 텐데."

그의 말을 단순한 횡설수설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묵묵히 대리기사비를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다음에 그를 만난 건 장례식이었다. 그는 잠 자는 동안 부정맥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는 부정맥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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