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라는 말은 원래는 단순히 '일본과도 친하게 지내자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추종하는 자들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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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자 전우용님 글 -
요즘 사람들은 ‘친일파’라는 단어를 “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일파” 정도로 이해합니다.
친(親)이라는 글자에서 바로 ‘친구’를 연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한국에서 ‘친일파’라는 말이 비난의 뜻으로 쓰이는 건 한국인들이 과거에 연연하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실 '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건 비난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의 국제관계와 관련해 친(親)이라는 글자를 처음 쓴 건 중국인 황준헌입니다.
널리 알려진대로 그는 <조선책략>에서 조선 생존을 위한 외교 전략으로 ‘친(親) 중국, 결(結) 일본, 연(連) 미국’을 제시했습니다.
연(連)은 연합, 결(結)은 동맹으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종주국 행세를 했던 중국에 대한 친(親)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당연히 동맹보다 더 강력한 관계였습니다.
그 시대에 친(親)은 선친(先親), 양친(兩親), 엄친(嚴親) 등에서 보듯 대개 아버지 또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조선책략>이 제시한 ‘친중국’은 ‘중국을 어버이로 섬기며’ 또는 ‘중국의 품 안에서’라는 뜻이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겁니다.
‘친일파’라는 말은 갑신정변 전후 일본 언론에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선 정치 세력을 ‘친청당’과 ‘친일당’으로 구분하면서 마치 조선 내에 ‘일본을 새 종주국으로 받들려는 세력’이 있는 것처럼 호도했습니다.
한국인들이 ‘친일파’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건 을사늑약 이후입니다. 이때의 ‘친일파’도 같은 의미였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일본을 부모로 섬기는 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토왜(土倭)와 친일파 모두 ‘한국인이면서 일본을 부모로 섬기는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친(親)이라는 글자의 뜻이 변했기 때문에, 이제 ‘친일파’라는 말로는 일본을 부모처럼 숭배하는 자들의 본질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일본 군국주의가 낳은 정신적 사생아라는 의미에서 ‘토왜’나 ‘토착왜구’라는 말을 쓰는 게 낫다고 보지만,
이 말이 불편해서 '친일파’란 말을 계속 쓰려면 본디 ‘일본을 부모처럼 섬기는 일파’라는 뜻이었다는 건 알아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