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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에 관한 두서 없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21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2/4
조회수 : 95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0/17 1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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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 참 이게 요즘도 환국의 영광이나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 등을 찾는 분들을 포함하여 대개 그렇지만 당시에도 목메어 부르는 애달픈 이름이었기는 한것 같습니다.
 
물론 그 목적이야 좀 다르기는 다른 것은 자명한 노릇으로 공민왕 시절에는 원나라의 압제를 벗어던진 자주적인 고려를 위하여, 우왕때는 원에 이은 명나라의 압제를 막아내기 위한 이른바 예방 전쟁이었는데 참 이게 문제라면 문제인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까놓고 말해 양 쪽 모두 능력이 안되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동 정벌은 우왕때의 흔히 위화도 회군으로 새 시대의 여명을 올린 쿠데타의 배경 즈음으로 기억하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문제와 현실적으로 뒤엉킨 중대한 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왕 시기에 있었던 요동 정벌에 있어 당시 얽혀있던 주요한 인물인 이성계와 우왕, 최영의 관계에 관해 좀 더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M모 방송에서 말하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여장부 기황후가 보낸 고려 정벌군(...)을 패퇴시킨것을 비릇하여 개경 수복, 왜구 격퇴등 근 30여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은 명장중의 명장입니다, 특히나 공민왕 시절 두 차례의 북진을 통해 짧으나마 요동을 점령하기도 하는 등 경험도 풍부하고 능력도 출중했습니다, 물론 공민왕 시절 북벌 그러니까 요동 정벌이 성공한 배경에는 이성계를 비릇한 뛰어난 무장들과 인재, 그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의 국력과 한족 부흥 운동을 기치로 내건 명나라의 대두와 그에 따른 원나라의 천도 그리고 이러한 까닭에 발생한 일시적인 만주 지역의 전력 공백기가 그 원인이라 할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왕 시기는 조금 아니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고려가 상대해야 할 이는 원나라가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강국 명나라로 필히 전쟁은 장기전이 될수 밖에 없었으나 고려로서는 그러한 전쟁을 수행한 능력이 전무했습니다, 가령 왜구가 약 15년동안 수백 차례나 평균 1년동안 2~30번 횟수로 몰려왔는데 고려는 이 들을 억제할 방도가 없어 해안가를 버리고 주요한 강안에 요새를 만들어 그 들이 내륙으로 진공하지 못하게 막는데 급급했습니다, 그 뿐일까요? 여진족의 문제는 공민왕이 요동을 포기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우왕 시기라고 해서 다를것은 없었고 고려의 주 전력을 요동으로 보내고 나면 말 그대로 고려 전역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리는 상황인데다 군수 물자의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 역시 무리한 상황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이러한 문제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보자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선 일의 시작을 보면 명나라에서는 막대한 양의 공물을 비릇하여 철령위의 설치를 통보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철령 이북의 땅은 원나라 쌍성 총관부와 동녕부에서 관할하던 땅이니 원나라를 몰아낸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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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철령이란 중국에 있는 동명의 지명이 아니라 지금은 북한에 있는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의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그러니까 고려는 수복한 쌍성 총관부 비릇하여 동녕부를 모두 반환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참 어이가 집을 나가는 이야기이지요.
 
당연하게도 이에 반발한 고려 조정에서는 대책을 어찌해야 할지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물론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게 당장 고려의 군사적 능력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일이었으나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다른 탓에 무의미한 수준의 갑론을박이 반복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왕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명에 사신을 보내 부당함을 항의 하는 한편 당시 조정과 군부의 1인자 였던 최영을 불러들여 단 둘이 이 문제를 상의하기 시작합니다,
 
사족이지만 "나의 아버지도 자다가 해를 당하였는데, 나도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 우왕이 남긴 이 말에서 볼수 있듯 청렴 결백의 대명사로 알려진 최영이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영은 딸을 우왕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권좌를 돈독하게 다졌고, 우왕은 자신을 지켜줄 무력을 손에 넣은 서로간에 좋은 거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으니 말이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우왕은 최영과의 상담을 통한 결론을 따라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전국의 요지에 성을 보수 하며 전국의 주요한 병력과 그에 수반되는 물자들을 서북 방면의 국경으로 집중시켰고, 한양에 산성을 축조하여 만일의 사태에 왕족들을 피신시킬 계획을 준비합니다.
 
이 과정에서 요동 정벌에 반대하던 공산 부원권 이자송이 최영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사실상 다른 신하들에게는 반론을 허락치 않는 모습을 보이나 문제는 그 어떠한 상의나 대담에서도 고려의 2인자이자, 요동 일대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성계를 철저하게 배제시켰으며 오로지 최영과 우왕간의 관계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그를 따르던 군부의 세력들과 개혁 세력 모두에게서 불만이 고조되는 원인이 되는데 이유를 보면 나름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왕으로서는 어찌보면 반 정부적인 개혁 성향의 관료와 정치가들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었던데다 최영으로서는 뛰어난 전공을 자랑하며 조민수를 비릇한 이른바 신군벌 세력들과 함께 군부에서 입지를 위협하고 있는 이성계에 대한 부담을 버릴수가 없었을것입니다.
 
그랬기에 이성계를 부담없이 버릴수 있는 원정군 사령관의 자리에 앉혀놓은 것이고 말이지요, 물론 능력도 그러한 원인이기는 했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우왕의 요동 정벌은 다소 비 현실적인 무모한 상황이 없지 않은 셈이지요.
 
공민왕 시절 고려가 상대했던 원나라의 병력은 주력 부대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원을 북으로 몰아낸 명나라는 요동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정예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고 이 들은 고려가 능히 쉽게 해쳐나갈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정벌 이후에 어떻게 할지 어떠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요동을 정벌하고 백성을 이주시키며 장기적으로 병력을 주둔 시켜야 하는데...이 모두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병력이 모잘라 출병 직전까지 병력을 모으고 있다 도저히 안되어 승려들을 징병하는가 하면 당장 먹을 군량 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문제를 끌어안고 당장 나가 이기고 돌아오라고 하니 막막하기 이를데 없는 것은 자명한 노릇으로 여기서 이성계의 사불가론이 나옵니다,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것이 첫째요,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폐해를 불러일으키는것이 둘째, 세번째로 원정을 틈타 왜구가 몰려오면 막아낼 방도가 없고, 끝으로 장마로 인하여 병사들이 질병에 노출되며 활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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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아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위에서는 닥달하기만 하니 올라가는 길을 비릇하여 위화도에서 몇 차례 회군을 요청하다 결국 명령을 어기고 내려가며 무력 충돌을 포기하는 대신 최영의 제거를 요청하나 도리어 진압의사를 강경하게 표시하신 우왕을 밀어버리고 창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왕의 요동 정벌은 이성계의 반란으로 연결짓고 덮을 일은 아닙니다, 그 원인은 현실에 무지했고 권력에 대한 위협만으로 판단하여 철저하게 이성계를 배제한 최영과 우왕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일이며 당시 극도로 피폐해진 고려말의 현실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일로 이성계라는 인물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볼 필요성이 매우 큰 일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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