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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의 부정교합 - 곡성에 관하여 -스포-
게시물ID : movie_570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cksow12
추천 : 11
조회수 : 874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6/05/14 06:24:42
1. 무명이 곽도원에게 돌을 던진다.
 "너희들 중 죄짓지 않은자 먼저 돌을 쳐라"
무명은 곽도원에게 돌을 던진다. 무명은 죄짓지 않은자다. 곽도원은 그에 따르면 죄지은 자다. 죄짓지 않은자가 죄지은 자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곽도원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그리고 무명은 왜 죄 짓지 않은 자일까.

 2. 딸의 아버지.

 딸의 아버지는 곽도원이자 최초의 인류이다. 아담은 의심을 했기에 죄지은 자다.
"이 동산에 있는 실과중 그 무엇이든 취하라. 단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분명히 죽으리라"
성경에서 이 야훼의 선악과에 대한 금지는 단순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이는 모든 것이 허락된 동산에서 하나의 금구를 두어 과연 이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을 믿고 그것을 지키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사실 선악과는 맥거핀이다.

"정말로 너희의 아버지가 그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분하여 묻는다.
"그건 아마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아 질것이라 그러한 것일거야"

사탄은 미끼를 푼다.

하와는 아담에게 저 과실을 먹어볼 것을 권유한다.

미끼를 문다.

그리고 아담은 선악과를 삼킨다.

미끼를 삼켜 버렸다.

3. 곽도원의 의심

 아담이 하나님을 의심한 것은 하와의 꼬임 때문이었다. 딸이 아프고 이상해지자 곽도원의 어머니는 용한 무덤을 알고 있다며 굿을 하자고 한다.
곽도원은 이에 거리끼는 듯 대답한다. " 네"  미끼를 문다. 그리고 일광이 곽도원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일견 곽도원의 의심은 정당해 보인다. 아이는 신들린 것처럼 말을하고, 이성적인 영역으로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문제는 일견 비정상적이고 비 이성적으로 보인다. 관객이 보기에도 곽도원이 보기에도 무속신앙에 기대는 이러한 행위는 남은 유일한 구원처럼 보인다.

 한가지 가정을 해보자. 곽도원이 일광을 부르지 않았다면, 사제의 말처럼 보지 않는 것을 그리 쉬이 믿지 않고 현대 의학을 믿고 병원을 믿었다면. 일은 이렇게 까지 악화되었을까? 연속된 피해자들의 집안에는 굿을 한 흔적과 둥지처럼 보이는 공통된 모습이 보이고 무명의 발언을 통해 굿과, 무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피해자들이 이러한 연속된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의지는 결국 외지인의 조력자인 일광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고 하나같이 파국으로 결말 지어졌다. 곽도원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미끼를 물지 않았다면, 일광을 믿지 않고 자신의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영화는 이러한 합리적 이성의 의심 수준에서 머물수 있는 단서들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1. 버섯. 2. 스케치북 3. 외지인의 성적 소문.
마을에 있었던 기이한 행태들은 건강 식품으로 둔갑한 독버섯으로, 딸의 기이한 행태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나체에 피를 흘리는 여자에 대한 낙서등으로. 그리고 외지인이 여인을 겁탈했다는 소문 등으로. 이성적 의심을 할 수 있는 단서들이 제공된다.

 가정을 해보자.

 곽도원의 딸은 외지인을 만나 성적 추행을 당하게 된다. 평소에 들려오던 외지인에 대한 성적 추문이 이러한 가능성의 신빈성을 더해준다. 이 거대한 심리적 공황을 통해 딸은 남자에 대한 불신 적대감, 그리고 혼란을 보여주게 된다. 스케치북에 그려져 있던 저주의 문구나, 피를 흘리는 여성의 모습등. 그리고 밤중에 자고 있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는 아버지, 즉 남자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과 저주등은 충분히 곽도원이나 관객들로 하여금 '그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의심을 가질 수 있게한다. 하지만 곽도원은 이러한 이성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곽도원은 처음 독버섯에 대한 부검결과를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한 의심을 가졌던 것처럼, 딸아이에 대한 이성적 의심을 져버리고 비 이성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그리고 일광을 불러들인다.

' 미끼를 물어버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원죄에 관한 이야기는 신, 즉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한 믿음을 져버린 결과로 이성을 얻은 것이다.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이성과 지성,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곽도원의 의심은 선악과의 경우와 반대이다. 이성적인것, 합리적것을 의심하고 비 이성적인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몬가 이상하다.

4. 무명

 무명은 곽도원에게 선으로 묘사된다. 곽도원은 선이다. 죄를 짓지 않는자며, 돌을 던질 수 있는자다. 원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다. 무명은 선한자다. 무명이 말한다. "딸의 아버지가 의심해서." 그리고 닭이 세 번 울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 이 장면은 곡성에서 가장 촌스러운 장면이다. 그리고 가장 혼란스러운 장면이다. 무명은 명백하게 원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 무명의 이 원죄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원죄만을 말하는 것일까? 앞서 말했던 데로 곽도원의 의심과 원죄의 이심은 그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이성에서 비 이성으로, 비 이성에서 이성으로, 즉 곽도원이 한 의심의 결과는 오히려 맹목적인 믿음이다. 그런데도 초월적 존재인 무명은 곽도원에게 의심 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명이 말한 딸의 아버지는 곽도원이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영화 내내 예수에 대한 상징은 외지인의 것이었다. 기적을 행하고 죽은자를 살려내고, 뼈와 살을 가진 고통을 겪고, 결국 죽어 부활한 예수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오롯이 외지인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무명과 곽도원의 장면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무명에게 덧씌워 진다. 그것도 굉장히 노골적인 방법으로. 닭이 세번 울기전에 그를 부정하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촌스럽다시피할 정도로 그대로 옮겨져 있다. 나는 이 장면이 마치 덧붙여진 '외전' 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장면은 이 영화 내내 가지고 왔던 상징을 전명적으로 부정하면서 원죄에 대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새로 상징을 덧붙여 나간다. 베드로와 예수, 그리고 닭. 그리고 원죄에 대한 이야기.

 곽도원은 묻는다. 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무명은 대답하지 않는다.

 무명이 대답하지 않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맹목적인 믿음. 실체를 알수 없는 것에대한 믿음. 실체없는 것에 대한 의심없는 믿음은 모든 종교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무명은 말한다. '나를 믿으라고' 하지만 결국 곽도원은 원죄를 저지른 아담처럼,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처럼, 보지 않고 믿지 못한 도마처럼 믿지 못한다. 결국 모든 고난에도 '믿음' 으로 고난을 극복했던 욥기의 욥이 되지 못한다.

 자 다시 말해보자. 무명은 선이다. 무명이 하는 말은 사실이다. 무명이 하는 말은 선이다. 즉 무명의 '나를 믿으라' 라고 하는 말은 선이며 사실이다.
즉 무명은 영화내에서 해설자이자, 영화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주는 나레이터다.
그렇기에 곽도원은 그 장면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버리고 '맹목적인 믿음'을 택해야 했다. 영화내내 예수라는 가면을 쓰고 있던 외지인에게 잠깐 빌려온 가면을 영화 내내 토착신으로 보이는 무명에게 이 우화같은 장면을 위해 덮어 씌운것은 잊자. 그리고 노골적인 베드로의 장면을 짜집기한 것도 잊자. 그걸 다 잊고서도 무언가 이상하다. 왜 언제부터 '맹목적인 믿음' 이 선이 되었던건가?. 선악과가 맹목적인 믿음에서 이성으로가 의심의 결과라면, 곽도원은 이성적인 의심에서 맹목적인 믿음이 의심의 결과이다. 무명은 '의심해서' 라고 말했다. 즉 곽도원이 맹목적인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런데 무명은 말한다. 다시한번 무조건 믿어라.
 
 영화는 피해자가 피해를 받는 이유를 비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 해결방법은 다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자가당착적인 질문과 대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딸의 아버지에서 곽도원을 제하면 된다. 모든 고통의 이유는 단지 원죄 때문임을 말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 무명과 곽도원의 이 자가당착적인 질문과 대답에서 곽도원을 제함으로 의심의 결과가, 선악과를 먹은 그 원죄 때문에 너희들이 '밭 가는 고통과 출산의 고통' 임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무명과 곽도원의 질문과 대답을 재구성 하면 이렇다.

 곽도원: 왜 제가 제 딸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무명: 옛날에 아담이 야훼를 의심했거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원죄를 저질렀어.
 곽도원: .....원죄?
 무명: 그래, 원죄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죽고, 너희들 모두 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야.
 곽도원: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무명: 아담이 의심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날 무조건 믿어. 맹목적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어. 그럼 구원 받을거야.

 나는 다시 말하지만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가장 촌스럽고, 가장 실패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영화가 내내 쌓아 올리며 여러 상징들을 흩뿌리며 말하고자 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감독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덧붙인 장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상징들, 즉 외지인에 대한 예수의 이미지, 무명의 토착신 이미지, 등과는 전혀 다르게 갑작스럽게 무명은 예수가 되고, 메시아가 되고, 곽도원은 베드로가 되고, 원죄와 믿음에 관한 설교같은 대담이 오간다. 그렇기에 영화는 혼란스러워 진다. 흩뿌려진 상징들은 종국에 와서야 하나의 공통된 상징으로 하나의 결과물들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동안과 정 반대의 상징들로 인하여 그 동안 쌓아왔던 상징들이 부정되고 흩뿌려 진다. 어떻게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할지 혼란스러워 진다.

5. 도마의 이야기

예수가 죽고 부활한 예수의 소식을 들은 도마는 예수를 의심한다. 그의 상처들을 직접 만저보고 느껴야만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예수는 자신을 만져보라고 말한다. 이에 도마는 직접 만지지 않고서도 그의 존재를 믿는다. 이에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을 한다. 동굴안에 외지인이 숨어있다. 부제는, 양이삼 부제는 그에게 묻는다.

 "너는 대체 무엇이냐."
외지인은 대답한다.
"너는 이미 마음에 내가 악마라고 결정 내리고 온것 아니냐."
"아니다,"
"너는 단지 내가 악마라는 걸 확인하러 온 것일뿐, 내가 무슨말을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로 변한 외지인은 양이삼에게 말한다.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양이삼은 외지인의 손에 난 성흔과 온 몸이 악마처럼 변한 그의 모습에 속삭인다.
만져보지 않고 소리친다.

"주여"

 양이삼은 부제이다. 부제만이 일본어를 할수 있고, 부제만이 외지인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외지인은 예수, 혹은 신이다. 오로지 부제만이 그와 대화할 수 있다. 차에 치어 죽고난 후 부활한 예수에게 처음 다가간 부제는 예수가 악마로 변해 있는 것을 본다. 영화는 내내 뼈와 살이 있는 예수의 모습을 외지인에게 덧씌웠다. 외지인은 예수이며, 신이며 악마이다. 단지 이 악마가 신이나 예수가 아닌 단지 악마임을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 악마의 손에 성흔이 나타나서도, 누가볶음을 말해서도, 죽고 난 후 부활해서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 내내 예수의 상징을 통해 외지인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지인은 악마인동시에 신이며 예수이다. 예수인 동시에 신이며 악마이다. 염소머리와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을 합해논 신이며 인디언의 풍습처럼 사진으로 영혼을 흡수하는 모든 종교를 망라한 신의 모습이다.
 단순히 특정한 종교에서 나오는 신이 아닌 공통적으로 인간의 마음에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추상적인 모습을 구체화한 모습이다. 부제가 외지인을 악마로 본것은, 부제 양이삼이 그를 악마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지인은 말하는 것이다. '나를 만져라. 그리고 너의 믿음을 확인하라."

 6. 욥기

 중간중간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 영화가 욥기와 닮아 있다고 본다.
신은 시련을 내리고, 그 시련은 단순히 사탄과의 내기일 수도, 혹은 욥기에서 나오듯이 레비아탄 베히모스처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사역의 일부일 수 있다.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스스로 욕창까지 걸려 기와로 몸을 긇어내는 와중에도 욥은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 곽도원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도대체 무슨 잘못을?
 욥은 신을 부정하라는 부인의 말도 무시한 체, 분명히 네가 무엇인가 불경한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계속해서 나는 잘못이 없다며 믿음을 유지한다.
그리고 곽도원은 계속해서 도대체 무슨 잘못을 내가 저질렀느냐고 묻는다.
 신은 계속해서 맹목적인 믿음을 말한다.
 무명은 계속해서 믿음을 말한다.
한가지 다른것은 결국 욥은 믿음을 유지했고, 곽도원은 실패 했다는 것이다. 욥의 가족과 부인의 입장에서 신은 어떻게 보였을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선한 사람의 죽음과 선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신은 어떠한 모습일까.

 외지인이 단순히 악마 였을까? 아니면 피해자의 눈에는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라도 악마로 비춰지는 것일까. 이렇게 거대한 고통을 주는 존재가 신일수 없고 분명 악마일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양이삼의 눈에 외지인을 악마로 보이게 만든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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