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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곡성> - 끝까지 썼어요~
게시물ID : movie_571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heologeion
추천 : 3
조회수 : 982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6/05/14 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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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어제 새벽, 친구와 함께 본 영화 곡성에 대한 단상을 남깁니다. 

이 글은 <추격자>, <황해> 그리고 <곡성>에 대한 내용 누설을 담고 있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은 글을 읽지 말아주세요.







 
1. 들어가며: 나홍진의 기존 영화들과 이번 영화


- <추격자>,<황해>, 그리고 이번 영화 <곡성>을 통해 알 수 있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대체로 세네카적인 특성을 다수 가지고 있습니다. 세네카 방식의 비극적 성격이란 선혈의 난무를 통한 갈등의 고조, 드라마틱한 갈등 해소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극적 고양감을 완화하는 일련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추격자>에서는 동물적 살인 충동을 가진 하정우를 통해, <황해>에서는 불사신과 같은 김윤석을 통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곡성>에서는 서양식 오컬트적 요소를 끌어들여 살인귀의 밑도 끝도 없는 학살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이 세 작품의 주동인물들은 대개 관객들에게 약간 어이없는 방식의 긴장감 해소를 통해 극을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유혈비극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윤석의 무한 체력, 하정우의 생존력, 곽도원의 죽음을 통한 긴장의 해소가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유혈비극이라는 특성을 가진 나홍진의 영화에서 또 하나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은 '본질의 무의미화'입니다. <추격자>와 <황해>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갈등의 본질이 굉장히 희미합니다. 살인마 하정우의 내적 갈등은 얼핏 히스테릭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살인 충동으로 치환하는 듯한 면모를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확실하게 묘사하기 어려운 면이 많고, 마찬가지로 불사신 면사장의 살인도 사실 그리 대단치 않은 물질적 동기로 인해 벌어지죠. 하정우의 곽도원 암살도 어이없이 실패하고, 곽도원을 암살한 사내들의 살해 동기조차 약간 애매하게 붕 떠버립니다. 두 영화에서 갈등의 원인은 김윤석-하정우라는 대립항이 뚜렷하게 존재한다는 부분 때문에 얼핏 선명해보일 수 있으나, 기실 갈등의 본질은 딱히 중요하지 않게 소외되어버리는 현상을 초래합니다. <곡성>에서는 이 현상이 훨씬 두드러집니다. 살인 동기가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살인이라는, 법적 판결과 사건 이해를 위한 아주 중요한 사건은 '병'처럼 대상화되어 주위를 부유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죽이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럽게 인식되어버리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갈등의 전이현상이 벌어집니다. '왜?'와 '어떻게?' 라는 합리적 의문은 자취를 감추고 '누가?'라는 질문만 남게 되죠. 즉, '배경-동기-범행-색출-처벌'과 같은 논리적 인과와 개연성이 중심이었던 기존의 사건 인식 체계가 '사건-대응'의 새로운 체계로 편입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갈등의 본질을 따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 마지막으로 가볍게 떠올릴 수 있는 나홍진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적 체계의 해체입니다. <추격자>와 <황해>에서 공권력 혹은 또 다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들은 모두 무너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추격자>에서 추가 살인을 막지 못하는 경찰, <황해>에서 면사장에게 학살당하는 조직원들은 기존에 강력하다고 생각했던 사회적 권력이 예외적인 돌연변이의 출현으로 인하여 어떻게 위협받는지를 보여줍니다. 갈등의 해소 역시 살인마와 거의 동급으로 이상한 돌연변이에 의해 변칙적으로 이루어지고요. 기존의 사회적 의미망 내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기호들이 모조리 붕괴되고 해체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제도권의 역할은 무가치하게 전락하고, 가치의 전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최근 개봉한 <검사 외전>과 <시빌 워>, 작년에 개봉한 <베테랑>과 <암살> 등의 영화들은 우리가 평소 중요하다고 인식하는 세력들 간의 혹은 세력 내에서의 갈등과 해소를 그리고 있는 데에 반해 나홍진은 이러한 네러티브를 애초에 거부하고 '합리랑 논리 다 조까'의 형식으로 파격을 추구합니다. <곡성>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의미망의 해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말서를 쓴 뒤, 딸이 이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곽도원은 단 한순간도 경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속, 자신의 허술한 직감, 그보다 더 허술한 동료들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죠. 합리성이 배제되어버리고 오직 폭력이 거칠게 난무하는 사회의 재구축. 이것이 나홍진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특징입니다.



2. 핵심요소: <곡성>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힘에 대하여

<곡성>은 스릴러에 오컬트적인 요소를 끌고 온 영화입니다. 유혈비극에 초자연적인 힘을 끌고 와버린 이상, 플롯은 단순해집니다. '귀신이 사람을 죽이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로 말이지요. 이 부분에 있어서 나홍진은 외국 호러물에서의 귀신 이미지를 차용합니다. 혹시 외국산 호러물과 국산 호러물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분이라면 외국 호러물에서의 이미지 차용이라는 말이 아주 쉽게 이해게 되실 겁니다. 외국 귀신은 살인에 동기가 없습니다. 현대 서양 호러물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Dark romanticism과 그 전에 중세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original sin에 대한 개념 등으로 말미암아 서양인들의 무의식 속에는 대항할 수 없는 절대악, 추정할 수 없는 악의에 대한 원형적 공포가 있습니다. 때문에 귀신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유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본 호러물 또한 유사합니다. 다신론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악의를 가진 귀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에 반감이 없습니다. 잔혹한 역사, 재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고는 내일을 그릴 수 없는 환경 등으로 인해 일본인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한국의 그것과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죽음에 수단적 필요성은 있지만 원인의 근본적 고찰은 불필요하죠. 반면 한국의 귀신은 다릅니다. 언제나 사연이 필요하죠. 그리고 나쁜 귀신이란 없고, 나쁜 사람과 나쁜 환경만이 있을 뿐이라는 집단적 인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홍진은 싸이코패스(하정우), 금과 힘을 상징하는 잔혹한 이방인(면사장), 마지막으로 <곡성>에서의 '일본놈 귀신'을 통해 이를 전복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일본놈의 집에는 서양식 주술 도구들이 널려있죠. 산양(바포메트), 사진(영혼을 담는 상징), 골룸과 같은 악마적 디자인 등은 모두 '밑도 끝도 없는' 외국 귀신의 이미지들을 관객들에게 주입하기에 부족함 없는 소품입니다. 그럼 왜 나홍진은 이런 서양식 귀신 이미지를 차용해야 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입니다.


a-1. 죽이는 동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게 하기 위해

- <곡성>을 인터넷에서 사전 그대로의 뜻으로 풀이해보니 '제사나 장례를 치를 때 내는 소리' 라고 하네요. 이 뜻 풀이대로 생각해보면 필연적으로 작품 배경이 되는 동음이의어의 장소 '곡성'은 죽음의 공간으로 전락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곡성'이라는 장소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죽음의 동기에 대해 중요치 않은 상황에 처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끊이지 않는 살인사건, 한적한 시골에 잠입하여 동물을 뜯어먹는 골룸 같은 일본 놈, 이상한 식물이 핀 살인현장, 갑자기 미쳐버린 딸 등등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의문은 무가치하다는 점을 관객은 스스로 깨닫게 되고 더불어 '왜' 라는 의문보다 '누가'라는 의문이 더 앞서게 되죠. 에드가 앨런 포의 <도둑 맞은 편지>에서도 유사한 서술 구조가 나타납니다. 무동기, 무가치. 

a-2. 누가 '타자'인지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 살인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드러난 현상만을 놓고 볼 때,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반문하실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부녀자 강간에 대한 소문이 도는 자, 생식에 대한 소문이 도는 자 등등 소문만으로도 이미 일본 놈은 꺼림칙합니다. 게다가 빼도 박도 못 하는 곽도원 동료의 '증언'은 일본인이 확실한 타자로 보이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인상을 제공합니다. 더구나 황정민과 대비되는 주술 장면에서도 일본인은 이국적 주술요소를 보여줌으로써 아주 대놓고 '나는 대한민국 곡성 놈들과는 다른 놈'이라는 인상을 줘요. 이 놈이라면 정말 사람들을 마구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통의 존재'로서 존재하는 확실한 타자입니다. 외국인이라 말도 안 통하는 장면도 어설픈 신부지망생의 통역으로 일부러 보여주었죠. 그것도 여러번.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점점 진행되어가면서 이렇게 '조명된 타자'인 수상한 일본놈이 진짜 범인인가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게 됩니다. 즉, <곡성>에서 드러난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질문인 '왜 우리는 합리적 의심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는가?' 라는 물음을 도출해내기 위한 장치로써 기능하고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왜 우리는 합리적이지 못하게 되었는가?'로도 정리할 수 있겠네요. 



3. 본론: 왜 곽도원과 신부지망생과 우리들은 확신을 잃어갔는가?


곽도원 = 신부지망생 = 관객들로 등식을 정리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부분이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셋 모두 현혹되는 대상들이고, 가치 판단은 가능하나 그에 따른 합리적 상황 판단은 힘들어진 이들이죠. 특히 신부지망생은 곽도원과 거의 한 몸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곽도원의 '또 다른 자아' 수준입니다.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었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경찰 동료의 죽음을 대신 목격하고, 소통이 어려운 일본인과의 어설픈 소통 시도 역시 대신 했으며, 마지막에 감독이 마치 덤처럼 넣어놓은 일본 놈과의 대담 역시 그러하죠. 신부지망생은 아주 친절하게도 작품 해석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일본놈의 대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구절이죠.


(성경 머시기)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 첫 장면에서 무슨 뜻인지 무신론자인 저는 감도 잡히지 않아던 이 부분의 뜻이 영화 말미에는 명확하게 다가옵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착각, 이성이라는 놈의 기능적 한계 등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니까요. 이 부분을 앞에서 정리한 나홍진의 영화 특징과 관련하여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순서는 <곡성>의 수미상관 수법처럼 거꾸로입니다^^



3-1. 사회적 체계의 해체: 무너져버린 합리성 

- 작품 초반, 경찰인 곽도원은 굉장히 무능력한 남성으로서의 모습을 여과업이 드러냅니다. 겁이 많고, 얼핏 합리적인 듯 하지만 귀신에는 놀라 나자빠지는 모습, 딸에게조차 무시 당하는 모습 등에서 가부장적 권위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죠. 그러나 작 중 자신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수록 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성을 띄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곽도원이 취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계획 살인'과 '굿' 이죠. 갓뎀잇! 경찰이라는 양반이 동료가 뭐에 씌인 표정으로 일본놈이 범인이고 살인 현장 사진을 봤다고 해도 헛소리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딸의 신발을 보고는 감정적으로 일본인에게 '3일 안에 나가라. 나가지 않으면 죽인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상하죠? 왜 본부에 알리지 않았을까. 왜 독단적으로 행동했을까. 왜 이방인(스스로는 여행자라고 말한)에 불과한 일본인에게 3일 씩이나 시간을 준 것일까? 등의 합리성은 개나 주는 선택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정확하게는 관객들을 현혹해요. '일본놈이 사실은 범인이 아닌 거 아냐?' 하고 말이죠. 
- 곽도원의 비합리적인 행동들은 딸의 무시무시한 변모 이후에 그럴싸해보이도록 포장됩니다. 이를테면, 곽도원은 경찰로서의 자기 자신은 잃어버리게 되요. 초반에는 주구장창 범죄를 수사하던 어설픈 경찰로서의 모습이 관객들에게 발암을 유발하며 무능함을 보여주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사회와의 연결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결국에는 삶과 죽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을 '오컬트'의 영역에 스스로 걸어들어갑니다. 누군가는 '어차피 경찰로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곽도원이나 다른 경찰들은 일본인을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단 한번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증인이 명백하고, 누가봐도 수상한데 말이죠.  
- 황정민이라는 무당이 등장하면서 극 중에 간간히 등장했던 일본인 골룸, 미친여자 천우희 등의 요소들은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의미했었던 '경찰 직무'라는 합리적인 선택지를 버린 곽도원에게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죠. '1000만원을 주면 귀신을 물리쳐주겠다'는 손쉬운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황정민은 무너져버린 체계에서 새로운 권위를 세우는 데에 성공합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요.
- 이렇게 극이 진행되어가며 극은 점차 양자 택일의 선택지를 강요합니다. 새로 등장한 천우희의 말을 따를 것이냐 혹은 새로운 체계를 정립하는 데에 성공한 황정민의 말을 따를 것이냐. '누가 귀신인가'의 문제에서 곽도원은 결국 새로운 체계를 선택하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천우희가 떨어뜨린 딸 아이의 핀 때문에요. 일본인의 집에서 발견된 딸의 신발과 몸에 새겨진 성폭행 흔적을 암시하는 듯한 자상은 '여자라서 도와준다'고 말하는 천우희의 말에도 힘을 잃게 됩니다. 즉, 진실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 믿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해진 착오와 그릇된 신념의 세계를 곽도원 스스로가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3-2. 본질의 무의미화: 정보 과잉

- 왜 곽도원과 관객, 그리고 신부 지망생 모두가 현혹될 수 밖에 없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원인 제공은 물론 나홍진 감독이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을 우리에게 주입했거든요. 작품 초반에만 등장하고 중반에는 실루엣만 나와서 마지막에 뜬금포로 등장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천우희는 그 어떤 사람이 보기에도 또라이 여자입니다. 또한 일본인은 가장 정보가 많이 유출된 상황인데 어느것 하나 제대로된 정보는 없가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왜 현혹될 수밖에 없는가의 문제에서 나홍진은 분명한 실마리가 될 대사를 하나 준비해놓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죠. 뭐냐하면 바로 이거에요.

곽: 왜 내 딸이 이렇게 됐어야 하지?
천: 너는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심했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이런 뉘앙스였음)

- 혹시 작품을 보면서 이거 눈치채신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어요. 작품 내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에는 거짓이라고 마땅히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소름끼치지 않나요? 일본인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자기가 착한 놈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더불어 곽도원의 분신인 신부지망생의 물음에는 악마적인 조롱을 날렸죠. 절벽에 굴러 떨어져 우는 모습을 우리는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악인도 다리가 부러지면 울 수 있습니다. 악인은 감정 없는 매몰찬 철인이 아닐 수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을 버렸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쁜 놈이 울었다 혹은 착한 놈이 지 입으로 자기 착하다고 할리가 없다'는 기존의 언어 체계 속에서 정보를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천우희는 처음부터 애초에 일본놈을 죽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곽도원과 우리 관객들은 모두 다 일본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드러난 모든 정보들을 토대로 종합해보면 천우희가 나쁜 여자일 수 있는 합리적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곽도원이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에 일정 부분 공감할 수 밖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진실들과 파편화된 data들이 우리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황정민은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장독대를 깨서 까마귀를 보이게 한 것? 전형적인 사기꾼의 수법이죠.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는 데에 효과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더불어 황정민은 작중에서 유일하게 금전 논리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행동 원리가 완벽하게 달라요. 더불어, 훈도시를 입고 있었던 장면은 아주 적나라하게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꺼림칙한 감정만을 가지고 이를 그냥 묵인해버리죠. 우리는 왜 살과 뼈가 있는데 의심하고 또 침묵해야만 했을까요. 
- 이렇듯 정보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곽도원은 문제 해결, 즉 딸과 가족의 목숨을 살려야한다는 명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시스템이 고장나고, 정보가 많아 단지 '문제 해결의 신뢰도가 그리 높을 것으로 추정되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가 추천하는 굿을 행한다'는 관성적인 판단을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곽도원과 같은 사례를 우리는 수도 없이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가장 단적으로 세월호와 국정원 커넥션 문제만 해도, 이미 많은 정보들이 우리들에게 합리적인 현실 인식을 위한 사인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너무나 많은 정보'로 인하여 정상적인 판단(연결고리가 분명하게 있다)을 어렵게 만드는(그럴리 있겠느냐) 결과를 낳고 말았죠.  
- 곽도원은 의심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의심했습니다. 후배의 경고(진실), 천우희의 경고(진실), 벼락맞은 남자의 경고(진실), 황정민의 초기 경고(진실) 등. 일본놈의 살해 순서는 다음과 같아요. 곽도원과 큰 관련없는 마을 가족1 - 일본놈이 강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가족2 - 일본놈의 골룸 상태를 본 벼락 맞은 남자3 - 일본놈의 비밀을 본 곽도원 경찰 동료 가족4 - 마지막으로 곽도원네 일가. 사건을 늘어놓으면 왜 곽도원의 일가가 죽어야하는지 명확합니다. 일본놈의 진실을 알게 된 가장 마지막 피해자니까요. 


3-3. 세네카적 유혈비극: <곡성>이라는 작품의 가치 

 - 나홍진이 이 영화 <곡성>에서 처음과 끝을 무슨 이상한 꽃을 클로즈업 함으로써 수미상관을 맺은 데에는 이런 비극적 사건이 반복적으로 행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전달하는 이 반복적 비극의 메시지는 기존의 틀을 깨버리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일본놈의 타도, 황정민의 사기죄 구속과 같은)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을 형성합니다. 비체계적인 세계에서 정보 과잉이 불러올 지속적인 참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세네카적 희곡들의 특징은 마치 페트라르카풍의 시들처럼 같은 형태에 내용만 바뀌어 행해지는 '재현성'에 있습니다. 이 <곡성>이라는 영화를 제가 리뷰 처음에 세네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곡성>은 그 자체로 이미 재현성을 통해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강력한 주제의식을 담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왜 우리는 현혹될 수밖에는 없는가, 라는.
- 세네카적인 극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의 희곡들이나 다른 상업적 폭로영화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플롯 상의 참신성이라는 같은 미적 가치를 가져을 뿐만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드라마틱하게 해소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현대 스릴러나 폭로물에서 핸드폰 녹취와 동영상 촬영이 무슨 deus ex machina인 양 휘둘러대는 촌극에 질릴만치 질려버린 상황에서 <곡성>은 꽤나 참신한 결말을 유도했다고 봅니다. 그럼으로써 '유혈비극'이라는 포멧이 단지 강렬하고 자극적인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성적인 우리의 기존 상식에 서늘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요.





4. 한 줄로 긴 글을 정리하며

- <곡성>은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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