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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유쥬얼 서스펙트, 식스센스 등의 반전영화 전성시대 이후로 ‘좋은 스릴러 영화 = 관객을 잘 속여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반전이 있는 영화’라는 공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관객들은 스릴러 영화를 볼 때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인물을 하나하나 의심하였고 이는 결국 반전이라는 소재로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곡성은 이러한 스릴러 영화계의 클리셰를 통쾌하게 비튼 영화였다.
믿음과 의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절대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신앙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으로 의심은 곧 죄이다.(영화는 감독이 밝혔다시피 기독교적 상징을 많이 차용하였다.) 아담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사람이 많으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도록 하고 영화에서의 곽도원의 죄 역시 단순히 소문에 근거한 외지인에 대한 의심이었다. 종교 세계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하면 악마는 사람들을 현혹하여 신에 대한 의심에서 그 힘을 얻고 다른 여러 종교에서도 악령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두려움으로 인해 악령은 그 초자연적인 힘을 얻곤 한다. 결국 초자연적인 악령 힘이란 인간의 의심과 믿음에 근거하는 힘인 것이다. 곡성의 피해자들은 사실은 독버섯이 문제의 시작이었지만(곽도원의 딸은 아마도 성폭행) 악령에 의한 소행으로 단정짓고 굿을 통해 악령을 몰아내고자 하였고 결국 모두 죽임을 당한다. 굿이라는 악령에 대한 믿음은 결국 역설적으로 악령의 힘을 강화시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맹목적 믿음의 정답은 누가 알려주는가?
사실 어느 정도는 ‘외지인 = 악, 천우희 = 선, 황정민 = 악의 하수인’ 의 구도가 잡혀있긴하지만 비틀어 해석하자면 얼마든지 반대의 해석도 가능할 정도로 감독은 선택의 여지를 관객에게 주었다. 곽도원은 영화내내 끊임없이 외지인을 의심하고 관객 역시 누가 진범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마지막에 곽도원은 결국 두가지의 믿음 중 어느 믿음을 선택할 것인지 양자에게 요구받고 선택하게된다. 하지만 두 믿음 모두 친절히 그 근거를 설명하며 설득하기 보단 “일단 믿어”라는 맹목적 믿음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감독은 끝까지 어느 믿음이 진짜 구원을 얻는 길인지는 명쾌한 답을 내려주진 않는다. 도제가 외지인을 찾아갔을 때 역시 외지인은 악마의 모습을 하지만 성흔을 가지고 있고 성경구절을 읊는 양반되는 태도를 동시에 취한다. 외지인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끝까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도제의 믿음에 달린 것이라 말한다. 우리의 종교적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지만 그에 대한 의심은 용서되지 않고 오직 절대적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정답이었는지는 그 누구도 명쾌히 내려주지 못한다.
비공감의 이유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많은 관객의 찝찝함의 원인 중 하나는 곽도원의 의심이 그렇게 벌을 받을만한 큰 잘못인가에 대한 비공감에서 나올 것이다. “그 정도 의심도 못하나?”
그것 역시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은 관객의 의심과 믿음을 조종하며 이렇게 묻는거 같다. “평소엔 그렇게 의심 많이 하고 사시는 분들이 어째서 자신의 종교(굳이 특정 종교관이 아니라 개인의 여러 굳은 신념에도 통용될 것이다.)에는 의심 못하고 사실까?”
때로는 내려놓는 것이 정답일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의심 역시 마찬가지로 ‘죄’이다. 의심없이 영화를 감상하다 감독에게 속아넘어감으로써 반전에서 더욱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스릴러 영화의 큰 재미였는데 의심병이 도진 관객들은 그러한 쾌감을 얻는 길을 박탈당한지 오래이다. 영화 장치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반전을 예측하고 잘난척하는 것도 기분 좋을 수 있겠지만 때론 모든걸 내려놓고 감독의 의도대로 따라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믿음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의심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