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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반말주의)피그말리온과 오타쿠
게시물ID : phil_121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ishCutlet
추천 : 6
조회수 : 136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8/08 16:00:25
의식의 흐름대로 막쓰고 나서 다시 정리한 글이라, 반말로 쓰여졌습니다.

---------------------------------------------
1 - 오타쿠

1.
전에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피그말리온도 그리스 신화라서 그렇지 요즘으로 치면 오타쿠'
라고 말해서 빵 터진 적이 있었다.
빵 터졌다는 건, 발상의 전환이라는 면도 있지만 그만큼 공감했단 거다.
전에 한번쯤은 피그말리온이 오타쿠보나 나을게 뭐야,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왜 그런지 마음이 쏠렸다.
"요즘으로 치면 오타쿠"란 말이 결코 오타쿠에게 호의적인 표현은 아니다.
'피그말리온이 그리스 신화로 포장되서 그렇지,
현실이라면 고작 오타쿠가 아닌가?'는 뉘앙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내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더 마음이 찔렸을 거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봤었다. '오타쿠가 어때서?'를.


2.
오타쿠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인 것은 현실이다.
물론 대놓고 물어보면 웬만해선 '취존'이라고 답하겠지만,
호불호를 따지자면 오타쿠에 호의적인 사람은 많지 않다.

오타쿠에 대한 비호감은 '안여돼'(안경 여드름 돼지의 줄인말)라는
지극히 혐오적인 표현에 집약되어 있다.
이 표현은 오타쿠에 대한 지극히 편협한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나마 요즘은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 변화가 많이 이뤄져서
안여돼라는 표현은 많이 줄어들었고, 꼭 방구석 폐인, 니트, 또는 외모에 자신감 없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오타쿠 취향일 수 있다는 점은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자조적인 농담들이 오가고 현실에서 오타쿠 취향을 공개하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다.


3.
사실 사람들이 오타쿠라고 부르는 대상은 일정한 공통점으로 딱잘라 구분지을 수 없다.
이건 범주화의 문제다. 집합적인 대상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울때 우리는 범주화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힙합이라고 부르는 음악들의 특징, 또는 공통점이 A, B, C, D가 있다고 치자.
어떤 노래는 A B C를 만족하고 노래는 B C D를 만족한다.
또 어떤 노래는 A D를 만족하고, 또 어떤 음악은 C의 특징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은 핵심적인 특징일 수도 있고, 다른 것들은 비교적 부수적인 특징일 수 있다.
이를테면 이 범주에 해당하는 다수에게서 A의 특징을 찾아볼수 있고, 오직 소수만 B의 특징을 가지거나,
이 범주에서 D의 특징을 다수 발견하기는 하지만 다른 범주와 비교하여 이 범주에서만 특별히 발견되는 특징은 아닐 수 있다.

요컨데 '힙합'이라는 범주화 된 개념을 설명하는 A,B,C,D라는 특성들은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단일한 특성으로 개념을 구분 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힙합'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A,B,C,D의 특성을 떠올리며, 어떤 대상이 '힙합'이라는 장르에 속한다고 할때 대상으로부터 A,B,C,D의 특성을 예상한다. 


4.
오타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타쿠는 일본어 어원상 '댁'(宅)을 뜻하는 말로, 집에서 잘 나오지 않는 은둔 성향으로부터 따온 말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오타쿠 중에는 일반적인 직장인으로 출퇴근하는 등 사회생활인도 많고,
직장 생활과 무관하게 활발하게 대인관계를 맺는 사람도 많다.

그럼 애니메이션 취향이 문제인가 하면, 가장 대표적인 취향 중 하나일 뿐, 오타쿠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취향은 너무 다양해서,
드라마, 영화, 미술, 음악, 소설, 기계, 기술, IT등의 분야를 비롯해 밀덕(군사), 역덕(역사)도 있으며,
좁게는 하나의 작품, 한명의 인물만 깊숙히 파고 드는 사람부터 그 분야를 폭넓게 아울러 대부분의 작품을 섭렵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떤 취향을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다.

그럼 한 분야에 파고들어 집중하는 '덕질'이라는 행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물론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의에 가깝겠지만,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오타쿠라고 부르는 대상을 고려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5.
우리가 수많은 전문가들과 취미생활인들을 모두 덕후라고 부르지는 않는 반면에
누군가 '쟤는 오타쿠 같이 생겼어'라고 말할 때,
그의 편견에 불편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순식간에 납득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소위 '안여돼'의 외모적 특성을 가진 사람을 볼 때, 
이를테면 이런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편견을 가질지 모른다.

'저 사람은 자기 관리를 하지 않고 게을러서 살이 졌어.
뚱뚱하고 못생겼으니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고,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으니 밖에 잘 나가지 않겠지?
밖에 잘 나가지 않으니 잘 안 씼어서 피부도 더러워.
맨날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니 눈도 나쁘지. 저 사람은 오타쿠야.'

많은 경우 이런 외모적 판단은 진실이 아니다.
딱히 많이 먹지 않아도 쉽게 살찌는 체질이 있고,
매일 구석구석 세수해도 뾰루지나는 피부도 있다.
한국인의 약 40%가 안경을 쓴다.

혹은 만에 하나 그런 편견 중 일부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가진 한두가지 외모적 특징을 근거로 범주화된 틀에 집어넣는 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타인의 개성을 단정짓는 것이다.
아니 설령 그가 오타쿠인게 사실이고 외모에 자신감이 없어 두문불출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누구나 개성이 있고, 그 중엔 장점도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내면과 외면을 모두 보고 싶어하지만,
우선 보이는 것은 외면이고 내면을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외면으로 내면을 판단하려고 한다.
외면적 단점이 꼭 내면의 단점으로 이어지란 법은 없다.
적어도 외모만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의
정서적 결함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사소한 단점일 뿐이다.




2 - 피그말리온

0.
사실 앞서 서술한 내용은 내가 오타쿠에 대해서 부당하게 까려고 하는건 아니라는 변명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도 실내활동에 더 관심이 많아서 오타쿠 같은 취향도 있고
외모도 난쟁이똥자루라 별로 내세울 만한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런 조건이라서 오타쿠를 막 까고 그럴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고)
그런 내 성격과 외모에 대해서 스스로 괜찮은 개성이라고 생각하듯이,
누가 어떤 개성을 가지든 그건 그것대로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타쿠에 대한 편견들을 최대한 제외하려고 노력해도,
나는 오타쿠에게서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을 하고 캐릭터 베개를 항상 동반하는 어떤 오타쿠가 있었다.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고, 조용히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삶에 대해서 판단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을 뿐더러 불쾌한 감정마저 드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1.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여인 조각상을 지극히 사랑했고,
그의 사랑과 정성에 감동받은 신들이 조각상을 갈라테이아라는 인간 여성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모습은 피규어를 애지중지하며 "나의 미미쨔응은 카와이하다능!"이라는 모습으로 정형화된
오타쿠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이며 왕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에 부러울 것 없는 처지였고,
스스로 갈라테이아를 조각할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소외, 무능, 불결함 같이 오타쿠에 씌워진 부당하고 혐오적인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나는 피그말리온에게서 불쾌함을 느낀다.

따라서 피그말리온에 대한 불쾌함을 이해함으로써
여러가지 특성이 뒤섞여 범주화된 오타쿠라는 개념 중에서,
어떤 삶의 방식과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끼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2.
신화에 따르면 키프로스는 매매춘이 성행해서 여인들이 온갖 지방 사람들에게 몸을 팔고도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여인들을 혐오했고, 자신만의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매일 그 여인상이 자신의 아내가 되기를 바랬고, 신들에게 기도했다.
피그말리온의 혐오는 사적으로 알게된 개개인의 개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키프로스의 여성이라는 피상적인 집단을 향한 것이었다.
그의 여성혐오는 현실에는 부재하는 자신만의 이상형에 대한 갈구로 이어졌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비현실적으로 순결한 이성에 대한 갈망.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의 욕망은 순수하고 순결한 것이었던가?
피그말리온은 신들에게, 갈라테이아가 딱딱한 대리석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자신의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하며 조각상에 키스하고 포옹했다. 결국 그가 원하는건 그가 성적 욕망을 해소할 '아름답고' '순결'한 육체일 뿐이었다.
이런 사랑이 키프로스 여인들의 사랑보다 더 나은 것일까?


3.
사실 피그말리온 신화의 구체적인 배경, 그의 여성혐오와 갈망을 제외해도,
그가 조각상을 사랑했다는 단순한 개념만으로도 위화감을 느낀다.

문제는 사랑의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일방성이다.
그가 수세월동안 응답없는 조각상을 향해 말을 걸고 키스하고 포옹하며 사랑을 키워온
무시무시할 정도의 집념. 집착.

그가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이런 사랑을 베풀어 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매일 같이 부드러운 살결을 가진 인간이 되길 기도한 것은 그의 사랑이 응답받기를 기대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무슨 근거로 갈라테이아가 자신만을 사랑할 것을 기대했을까.
수세월동안 그가 대상에게 베풀어온 애정의 대가로,
그리고 신들에게 청탁하여 그녀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대가로,
그녀의 육체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요구한 것 아닌가.

그가 사랑한 것은 절대로 갈라테이아의 개성과 의지가 아니었다.
피그말리온은 단 한순간도 갈라테이아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으며,
그녀의 생각을 들어본 적도 없고 그녀의 의지를 목소리로 확인한 적이 없다.
그가 매일 정성을 들여 사랑한 것은 그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 조건,
즉 육체의 아름다움과 순결이었으며, 자신이 일방적으로 제공한 수고로움에
충실하게 보답할 성적 대상이었을 뿐이다.


4.
현실에 부재하는 이상형에 대한 일방적이고 집착적인 갈망.
정말 다양한 오타쿠 문화 중에서 이런 문제의식에 해당 하는 건 '모에 문화'다.
'모에'또는 '모에화'가 뭔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것도 일종의 범주이긴 하지만, 좀 추려서 설명하자면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애착이다.
특히 현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모아 만든 결정체 같은 거라고 볼 수 있겠다.

의외로 그런 미소녀 캐릭터들은 완벽한 인물이 아니고, 오히려 일상에서 볼수 있는 실제 인물들의 행동을
특정한 분류로 전형화 함으로써 인물의 개성을 강화하여, 재미있고 매력적이도록 탄생시킨 것들이다.
물론 문화컨텐츠를 생산하는데 있어서 전형화 자체가 나쁜건 아니고, 질적 향상을 가져온 면도 있다.

하지만 모에는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결과물이다.
이를 위해서인지 '미소녀' 캐릭터들은 그녀들이 어떤 개성을 가졌든지, 반드시 성적 대상화 된다.
원작 자체가 성적대상화를 직접 표현하지 않으면, 팬들이 성적대상화한다.
모에화는 '미녀'도 아니고, '소녀'도 아니며 '미소녀' 캐릭터라는 점은
'아름다움'과 '순수함'에 대한 욕망의 반영이다.

물론 모에화의 결과물이 '미소년'일 수도 있다. 또는 '미남'이던가.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세분화된 비중과 그 규모를 보았을 때,
'모에화'문화는 '미소녀'로 대표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5.
물론 모에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고 해도, 그냥 가벼운 연애소설 정도의 느낌으로
건전하게 즐기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스스로 오타쿠라며 자학적인(?) 놀이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밑바닥에는 분명 그런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내가 불쾌하게 느끼는 것은 결국 오타쿠가 아니라
소통이 없는 일방적 애정에 잠재된 폭력성이고,
그런 폭력이 지금 사회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오타쿠의 애착은 가상의 존재인 캐릭터를 향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세상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상정한 이상형에 끼워맞추고는
그런 환상이 깨질때 자신의 욕망에 따르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심지어 상대를 해치기까지 한다. 때리거나, 강간하거나,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가 순결하지 않다고 비난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애초에 그런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 사랑에 대해..
동시에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지는 경우란 아주 드믄 일이다.
보통은 한사람이 먼저 사랑에 빠지고, 구애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는 서로에게 가벼운 호감을 느껴 만나기 시작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깊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게 가장 바람직한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싶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상대방에 대한 집착과 일방적인 욕망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가벼운 호감만으로 시작한 관계가 깊은 사랑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도 흔하지 않고,
한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고나 같은 거라서,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엔 정답이 없는 거니 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처음부터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결국 아무런 결론도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많고, 그런 와중에 행복한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단지 나는, 사랑은 함께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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