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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르포 <언더그라운드> 61~65화
게시물ID : art_262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천극진
추천 : 1
조회수 : 53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5/17 15: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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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본 내용은 2006~2007년 지하철 공익요원을 하며 겪은 경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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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Lucky Ten Dollar]

늦은 밤, 술 취한 중년 남성이 역무실에 들어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죄송합니다.’라고 외쳤다.
열차를 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나와 승강장까지 데려가 열차 타는 걸 도와줬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나에게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건냈다.
대부분 횡설수설이라 알아듣진 못하고 맞장구만 쳐줬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그는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서 행운의 부적이라며 나에게 건냈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계속 받으라고 해서 결국 받았다.
그 후로도 열차가 오기 전까지 그는 열심히 내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려고 했지만 역시 두서없는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열차에 타고 역을 떠날 때까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보냈다.

-

몇 시간 후 막차 시간에 중년 남성이 열차에서 내리면서 "이게 막차입니까?"라고 물어왔다.
"네"라고 대답하자.
그는 "수고하셨네요."라고 말하고 떠났다.

그날은 지하철에서 일했던 날들 중 손에 꼽힐 정도로 기분이 괜찮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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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Young Beggar]

열차사령실을 통해 이번에 우리 역에 도착하는 열차 안에 피를 흘리며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처리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승강장에서 기다리다가 도착한 열차에 들어가 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눈두덩이가 찢어져 피가 난 채로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열차 안에서는 기어 다니더니 열차 밖으로 끌어내니깐 기적이 일어났는지 멀쩡히 서서 걸었다.
그는 풀린 눈을 한 채로 쉬지 않고 웅얼거렸다. 
비틀거려서 부축해줬는데 몸에서 진한 술냄새와 악취가 풍겼다.

말을 거니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는데 대략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던 중 어떤 연인들에게 다가가 여자를 붙잡고 매달리며 구걸하다가 남자에게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는 치료보다는 때린 사람 잡아야 한다고 우겼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고, 언제 어디서 맞았는지 기억하지 못해서 그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치료를 위해 부축해서 역무실로 데리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나를 밀치고 계단을 내려가던 연인들을 막아서더니 여자의 핸드백을 붙잡고 늘어지며 이 사람들이 자신을 때렸다고 웅얼거렸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고 남자와 내가 억지로 떼어냈다.

역무실에 앉혀 놓고 상처를 소독하고 밴드를 붙여주고 나자 구부정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역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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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Crusaders]

역무실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역 안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책을 나눠주면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를 제재해달라는 것이다.

가보니 어떤 종교단체에서 교리가 담긴 책자를 배포하고 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근처의 대형 교회 신도들 수십 명이 몰려와 훼방을 놓고 있었다.
역무실로 찾아온 것도 교회 신도들이었다.

신도들이 몰려들어 배포하는 책자를 두세 권씩 받아와서 다른 곳에 버려놓고 다시 와서 받아가는 방식과 옆에서 '나눠주지 말고 꺼지라' 소리 지르는 방식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역내에서는 어떤 물품도 배포해서는 안 되니 어서 나가시라'고 하니깐 배포하던 사람들은 그런 법 조항이 어딨느냐며 어디 그 법 조항 좀 보여달란다.
호루라기 불고 소리 질러도 공익요원이라고 무시하는지 배 째라는 식으로 버텼다.
결국, 역무원이 와서 호통을 치고 경찰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그제야 해산했다.

-

훼방을 놓던 그 대형 교회에서는 매주 역 안에서 음료와 노선도를 나눠주며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그 대형 교회는 매년 수백만 원어치의 물품을 우리 역에 후원한다.
역장은 장로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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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Wise Monkeys]

막차가 끝나고 역 안을 정리하는데 후임이 누워있는 노숙자를 앞에 두고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숙자는 역 안에서 잘 거라 버티면서 안 나가고 있었다.

일단 후임에게 셔터를 내리고 있으라고 한 다음 노숙자를 잡아끌어서 셔터 밖으로 내보냈다.
노숙자는 욕을 하며 내려가고 있는 셔터 밑으로 머리와 발을 들이밀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셔터가 닫혔고 노숙자는 역무실로 걸어가는 우리에게 욕을 하면서 셔터를 발로 찼다.

-

잠시 후 청소용역 직원이 역무실로 찾아와서 셔터 밖에서 아까 그 노숙자와 취객이 싸운다고 했다.
후임과 같이 가서 겨우 싸움을 말리고 돌아왔다.

돌아온 우리에게 역무원이 말하길
"막차 끝난 후에 셔터 밖의 일은 우리 소관이 아니니 니들은 신경 꺼라."

-

지하철에서 일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내가 관리하는 곳에서 일어난 일 아니면 신경을 쓰지 말고, 골치 아플 만한 일이 생기면 최대한 다른 기관에 떠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역무원들로부터 일처리를 아주 잘했다고 칭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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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Coin Sweeper]

자주 눈에 띄는 지적 장애인이 있었다.
항상 흰색 운동복을 입고, 흰색 목장갑을 끼고, 흰색 우대권을 입에 물고 돌아다녔다.

그는 부지런히 역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훑기'를 한다.
승차권 자동발매기, 자판기, 공중전화의 동전반환구를 손으로 훑고 다닌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훑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

어느 날, 근무교대하고 역무실로 올라가면서 동전반환구를 훑고 다니는 그를 발견하고 여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떤 젊은 여성 뒤를 스치듯 지나치며 엉덩이를 훑었다.

여성은 깜짝 놀라 뒤돌아봤지만 상대방이 지체 장애인인 것을 보고는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갈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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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acebook.com/skyextreme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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