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2006~2007년 지하철 공익요원을 하며 겪은 경험담입니다.
#66 [Commercialism]기업은 사회봉사단체가 아니라 효율 높은 이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익단체다.
지하철 공사가 친절ㆍ봉사ㆍ안전의 이미지를 가지려 하는 것도 높은 이윤 추구의 수단일 뿐이다.
-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승객들의 안전을 지킨다며 모든 역의 승강장마다 설치하기 시작한 '승객 구호장비 보관함'
내가 있던 역에서는 사고가 일어난 지 3년 2개월 만에야 설치가 완료되었다.
보관함 윗부분에는 응급상황 발생 시 참고하기 위한 비상마스크 착용요령이 크게 설명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자 그 부분은 광고판으로 교체되었다.
만약에 사고가 발생한다 해도 사용설명이 없는 비상마스크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
언제부턴가 승강장 기둥 사이와 안전난간 사이마다 광고판이 한둘씩 설치되기 시작했다.
승강장 근무를 할 때, 광고판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반대편 승강장에서 사고가 발생해도 확인하기 힘들다.
광고판은 점점 늘어만 갔다. 실연을 당한 남자가 애인의 지하철 출근길에 건너편 승강장에서 전화로 자살 예고하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
선로에 남아있던 핏자국은 밤사이 야간반 공익요원들이 지웠다.
청소용역 직원들이 무섭다고 선로에 내려가지 않으려 해서 만만한 공익요원들이 대신 내려가서 물청소했다고 한다.
핏자국을 지우던 중 자살자의 핸드폰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애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나 전화통화기록이 남아있겠지...
-
열차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승강장은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투신자살 사건은 인터넷 뉴스의 한구석을 조용히 장식했을 뿐 금방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나도 애써 잊으려 했다.
-
출근하자마자 역장에게 불려가 어제 사고 수습했을 당시 내 복장 상태가 불량했다며 한참 훈계를 들었다.
어제 갑자기 사고가 났을 때 급하게 뛰쳐나가느라 모자를 쓰지 않고, 상의를 바지 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량한 복장 상태가 CCTV에 찍히면 역장이 공익요원 관리 소흘로 본사에 나쁜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다음에 사고가 터지면 복장 상태를 잘 점검하고 출동하란다.
대기실로 들어서는데 다른 반 선임이 내 어깨를 세게 밀치며 '왜 어제 복장 상태가 그따위였냐?'라며 으르렁거렸고 옆에서 다른 선후임들이 말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모두의 관심은 내 복장에만 쏠려 있었다.
-
보통 투신자살 사건이 일어나면 열차기관사는 2주일의 특별휴가를 받는다.
그 후에 그만두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고 이후 본사에서 감사가 나온다고 해서 당분간 근무가 엄격해졌다.
하루 종일 쉬지 못하고 승강장을 돌아야 했다.
근무가 힘들어지자 선임들은 줄줄이 휴무를 몰아서 썼다.
당시에 사고 수습은 나 혼자 했지만, 일주일 넘도록 쉬지 못하며 계속 근무했다.
-
사건에 대한 인터넷 뉴스에 800여 개의 리플이 달렸다.
대부분 억측으로 시작된 남녀 성별 싸움이었다.
네티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는 찌질이에 인생의 패배자로, 여자는 남자 등골 빨아먹고 버린 된장녀로 몰아갔다.
사건정황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단 몇 줄의 기사를 가지고 사람들은 서로 온갖 욕설을 뱉어내며 싸웠다.
하루에 평균 5시간 이상 걸어 다녔다.
온종일 넓은 역을 돌아다녔고, 계단을 지겹게 오르내렸다.
지하철에서 근무한 지 10개월쯤 지났을 무렵부터 왼쪽 무릎이 조금씩 아파졌다.
관절연골이 닳아서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
그날도 새벽 6시부터 계속 승강장을 돌았다.
한 시간 반 정도 근무를 서니 무릎이 너무 아파졌다.
더는 참기 힘들어 초소에 앉아 잠시 쉬었다.
잠시 후 열차가 도착하자마자 기관실에서 양복 입은 사람이 내리더니 내 쪽으로 왔다.
본사에서 현장점검 나왔다며 승강장 근무 안 서고 왜 초소에 앉아있느냐고 한참동안 갈군 다음 내 이름을 적어갔다.
징계를 받을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다시 아픈 무릎을 끌고 승강장을 돌았다.
나중에 역무실에 올라가서 역무원들에게 물어보니 그가 나를 겁줘서 못 쉬게 하려고 갑질한 거였다.
저녁 10시쯤 역 근처 파출소 지구대로 익명의 제보전화가 왔다.
우리 역 승강장에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있다는 것이다.
제보대로 승강장의 기둥 밑에 직사각형의 갈색 플라스틱 가방이 놓여 있었다.
비상이 걸렸고 역무원, 경찰, 구급대원, 폭발물 처리반이 총출동했다.
열차 운행 중지 시키고 승강장의 승객들을 모두 역 밖으로 대피시켰다.
그렇게 한참 야단법석을 떨면서 조사하고보니 다행히도 빈 가방이었다.
제보한 사람이 112에 신고한 게 아니라 추적하기 어려운 파출소 직통전화로 신고한 걸 보면 일부러 가방을 갖다놓고 장난친 걸로 추측된다.
덕분에 다음날 본사에서 조사단이 나온다 해서 종일 쉬지도 못하고 승강장에 서 있어야만 했다.
막차 시간, 승강장에 있는데 막차에서 젊은 남성 4명이 내렸다.
그중 둘은 서로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나에게 둘이 싸울 것 같으니 좀 말려달라고 하고 내버려두고 가버렸다.
한참 멱살잡이를 벌이다 둘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쓰러트리곤 발로 밟았다.
둘 사이에서 계속 말렸지만, 발길질을 대여섯 번 더 갈기고서야 그쳤다.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일단 하나를 역 밖으로 올려보내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머지 하나를 올려보냈다.
둘의 상태로 봐서는 밖으로 나가서도 싸울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역 안에서 싸우는 건 막아야 하지만 역 밖에서는 싸우건 말건 우리 소관이 아니다.
교육받은 대로 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