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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공간 다녀왔습니다.
게시물ID : freeboard_13161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문우
추천 : 4
조회수 : 23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5/19 22:36:13
 
워마드에서 기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착잡해져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꽃 한 송이 두고 싶은 마음에 아는 동생과 함께 추모공간을 찾았습니다.
 
보통 꽃집에서 국화를 파실지 어떨지 몰라 혹시 흰 꽃이 있느냐고 여쭤 보니 지금은 백합만 남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두 송이 사들고 사람 인파를 헤쳐 가며 10번 출구로 향하는데, 갑자기 겁도 나고 무섭기도 하고.
포장된 백합 송이들을 보고 거기 가나보다, 남성혐오자인가? 메갈인가? 할까봐 움츠러들기도 했고
추모하는 사람들 중 여성을 노려 범행을 하겠다는 일베 글 스샷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마스크를 나눠준다고 해도 쓰진 않겠다고 나름 단단히 각오를 했는데도 대로변을 걸어가는 그 짧은 시간이 왜 이렇게 길던지.
 
사람이 정말 많더라고요. 방송 삼사 카메라는 다 모인 것 같았고 (물론 확인은 제대로 안 해봤어요)
개인적으로도 카메라를 들고 와 찍는 분, 포스트잇에 뭔가 적어 붙이고 계신 분, 헌화를 하시는 분, 근처에 서서 글들을 읽고 계신 분.
10번 입구에서 바로 나와 보이는 곳이 가장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많이 붙어있었고, 근조 화환을 설치한 쪽에 가서는 좀 뜸했어요.
거기서는 뭔가 서명을 받고 있었는데... 기획한 곳에서 서명도 받는 듯 해서 일부러 넘겼고.
 
포스트잇에 뭐라고 쓸지 참 고민되더라고요.
"살女주세요, 너는 살아男았잖아", "남자라서 죽였다", "또 한남이 죽였다" ... 눈에 띄는 글들 때문에 더 읽고 싶지가 않아 그만뒀어요.
그렇게나 포스트잇이 많이 붙여져 있는데... 정말로 피해자를 위로하는 말은 얼마나 있을까 싶고.
 
어떻게 말 한마디 나오지도 않고,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더라고요.
딱 저랑 동갑이었거든요. 그렇게 간 사람이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구를 내건 워마드의 기획에 동참하는 것 같아 꺼내기 어려운 말이지만,
처음 기사를 들을 때부터 그 생각이 떠나지 않더라구요. 그 때 내가 그 곳에 있었으면 그날 쓰러진 건 나였겠구나.
CCTV영상에 찍힌 충격을 받은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보고선 더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내 친구가 그렇게 갈 수도 있었구나. 나는 손 쓸수도 없이 그저 소식을 전해받을 수도 있었구나 하고. 그게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 그 사건만큼이나 충격적인 건, 이 모든 분위기예요.
그 앞에서 각도 맞춰가며 셀카 찍고 있더라고요. 지나가던 어떤 어르신은 여자가 새벽 한 시에 돌아다니니 그렇지, 하고 내뱉었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큰 소리가 몇번 오갔어요. 소란이 나니까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근처에 있었는데도 다가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에 허우적대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그 난리통을 지켜보는데.
 
이 사건을 여성혐오 사건이 아니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성혐오범죄가 맞고, 약자에 대한 범죄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남자가 죽였다는 포스트잇이 붙여지고, 그 위에 메갈들 뒤지라는 포스트잇으로 또 덮이고,
남성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니 남성은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추모하는 여성을 골라 스토킹하거나 범행을 계획하겠다는 글이 올라오고.
그 앞에서 제 감성을 자랑하는 양, 인증 사진인 양 사진 찍는 데 열 올리는 사람들이 있고.
 
영화 <동주>에서요. 그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 시를 쓰고 시인이 되기를 바란 것이 부끄럽다"고요.
딱 그런 기분이더라고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오롯한 추모조차 건넬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다고 두 발을 붙이고 사는게, 그 모든 것들에 화를 낼 수 없는게, 바로잡을 용기 같은 건 없는게 더 없이 죄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가 않고.
 
 
그저 착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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