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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큐멘터리(Mockumentary)는 소설 속의 인물이나 단체, 소설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마치 허구의 상황이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장르이다.
201X년 8월 6일 오후 1시. 밝혀지지 않은 문제로 고장을 일으킨 ㅇㅇㅇ 발전소의 원자로 지붕이 힘없이 폭발했다. 사건 직후에 정부는 반경 5km에 대피령을 내렸지만, 이미 그 때는 지붕이 사라지며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대기로 퍼져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있던 때였다. 말 뿐이었던 대피반경을 훌쩍 뛰어넘는 일은 방사능에게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는 온갖 방법을 시도하며 화재를 진압하려는 시도를 하느라 시간을 끌게 되었다.
결국 사고 발생 2시간이 지나서야 반경 20km 내에 대피령이 내려졌고, 곧이어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소방방재청에서 내부의 오류로 인한 착오로 정정한다며 대피반경을 30km로 수정했다.
이에 그 다음 날인 7일, IAEA는 원전 주변 40km 이내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1]
UN산하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이 사고로 체르노빌, 후쿠시마와 맞먹는다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이 공기 중으로 흩뿌려졌다. 무색무취의 아무도 느낄 수 없는 방사능 물질이 동해에 뿌려졌고 온 등지의 땅을 오염시켰다.
언제나 대형 참사에서 그렇게 대처해 왔듯이 정부의 반응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처리되고 있다며 늑장을 부리다가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부랴부랴 대피를 시켰지만 그 대피마저도 완벽한 실패 그 자체였다. 여러 사립 연구소에서, 소수 시민들이 전에 구매했던 먼지 쌓인 방사능 계량기에서 불어온 바람에 인해 대피했던 장소까지도 오염이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었다고 경고를 하자 더 덮고만 있을 수 없어 또 사람들을 옮기고, 옮기고 하는 유랑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와중에 또 질서 부재, 지시 혼란 등으로 2차적인 사상자마저 상상을 넘은 수치를 보였다.
그 한참 후를 또 약간 언급하자면, 정부의 헛점 투성이었던 발전소 관리와 사후 대처에 관해 수많은 시위가 일어났지만 여론의 첫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본보기로 몇 명이 사퇴하고 경질되었지만 그것으로 그쳤다.
오히려 이것이 정치적 문제로까지 이어져 보상 문제와 피해 구역 제재에 관해 양쪽 다 피해자도 아닌 여당, 야당의 싸움이 전보다 배로 늘어났고,
결국 정부가 그저 가만히 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고 후 1년쯤 지난 후에는 더 이상 시위도 일어나지 않기 시작하며 오히려 여론마저 등을 돌려 사고를 빨리 잊자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강제 이주당한 곳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피해자들이 천단위를 넘어가고 있던 상태였다.
그 중 자살 사건만 해도 20여건이 넘어가던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잊었다.
극한 상황에 치달은 국가 상태에 적응하자마자 국민들 모두가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경제가 급격히 나락으로 추락하고 그토록 두려워하던 제 2의 IMF 사태보다 더 찬 바람이 불자 국민들은 그렇게 힘들게 이룩한 경제 발전은 말 그대로 과거의 영광으로 남음을 깨닫고 통증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정부 측에서도 불경기 때 늘상 해왔던 희망적인 예측은 없었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한 번 찬 바람에 무감각해진 국민들은 발전소 내부와 발전소에 관련된 정부 기관의 비리들이 급격히 쏟아져 나와도 미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다들 옷깃을 여미고 말을 아꼈다.
심지어 피해자들 자신들까지 잊기 시작했다. 보상과 시위에 대한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여러 갈래로 나뉜 피해자들은 결국 다시 연합하지 못했다.
흩어지면 죽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인류 자체는 멸망하지 않았지만, 핵 겨울은 우리에게 찾아오고야 말았다.
현재는 원래 원전이 위치하고 있던 부산광역시부터 울산, 온산 등지의 원전 반경 20km가 금지구역이다.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 계속된 유래없던 전력난은 끝나지 않았고, 자살률도 원래 OECD 국가 1위를 다투곤 하던 수치에서 더 높이 올라가 앞으로 아주 오랜 기간동안 계속1위를 차지할 전망이다.
방사능 공포 때문에 – 어쩌면 당연하게도 - 수출은 극악의 성과를 보였고, 그에 따른 위에서 언급했듯 경제난도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다.
이때까지 시간이 지나며 더욱 발전할 미래의 ‘정부’가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미래로 떠넘겼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며 정부도 손을 놓았다.
높아진 수치라고는 실업률과 파산률 뿐이다.
오염 지역의 복구 작업은 아직까지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제염작업을 완료한 지역에서도 계속 방사능 수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부산광역시는 인구의 절반이 도시 밖으로 나가버려 공동화 현상만이 지속되고 21세기 들어 새로이 지어진 고층 건물이 즐비한 센텀시티는 절반이 금지구역 안으로 들어가버려 거의 텅 비다시피 한 건물들과 넓은 대로만이 과거의 영광을 보여준다.
오직 사고 후 그 곳을 방문해 본 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대 로마의 폐허같은 느낌만이 남았다.
그러나 더욱 장관인 것은 차마 국가 기반 산업시설을 버릴 수는 없어 계속 돌아가는 온산 등지의 산업단지다.
노동자들은 – 주로 외국인 노동자들이며 대부분이 불법 노동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 마스크 하나를 끼고 그 곳에서 일하고 있다. 방사능 측정은 3달에 한 번씩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 중 아무도 피폭 증상이 일어난 적은 없다고 한다.
이 발표 직후, 정부는 5명의 급성 백혈병으로 인한 사망도 방사능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1] 이 권고는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서문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전국에 흩어진 ㅇㅇㅇ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피해자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터뷰를 하기까지 모든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는 것이다.
다수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피해 지역에서 온 것을 숨기고 싶어했다.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2011년, 후쿠시마 사태를 겪고도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렸던 방사능에 대한 무지함은 그대로 남아 마치 전염병인 것 마냥 설명된 루머가 돌며 공동체, 특히 학생들이 피해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외면하는 등의 불이익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들의 본래 존재했던 공동체에 들어옴에 따라 치안이 나빠지고, 지역 경제가 나빠진다는 등의 제노포빅(외부인 혐오증)적 반발심마저 강해져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난민을 표적으로 한 집단 폭행도 몇 번씩 일어났다. 또 다수의 피해자들은 사고 직후에 이미 언론의 피해자가 되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단박에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많은 수의 기자들이 직후 특종감을 찾으려 혼란을 틈타 부적절한 인터뷰, 부적절한 기사 내용 등으로 피해자들에게 직, 간접적인 피해를 줬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내가 기자가 아님을 밝혀도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 다음 난관은 관계 기관이 아는 순간 부터 나타나는 암묵적인 규제였다. 높고 좋은 의자에 앉아 협박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법 조항이란 조항은 다 듣곤 했다. 허위사실유포죄부터 심지어 내란죄까지 들먹이는 사람도 만났다. 치열한 법정 싸움도 겪어 보았고 (아마 201X년 가을에 어느 정도 진보 성향 언론들에 자주 떴던 것 같으니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와중에 자택 압수수색도 당해 보았으며. 인터뷰를 시작한 순간부터 한국 아이피를 사용한 인터넷을 써 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꼭 외국 이메일 계정을 쓰라는 조언도 받아 보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럼에도 나는 이런 모든 일을 겪고도 이 인터뷰가 이렇게 한국에 나오게 된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터뷰 내에서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는 따로 서술하지 않았다. 3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내부에서 책임 떠넘기기를 계속하고 있는 정부의 공식 입장은 매우 불완전해 딱히 사고의 원인이 누구의 탓이었는지 나로써는 정확히 누구의 잘못이라 정리할 수 없었다. 서로 싸우는 동안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사람들이 정말 사고의 주 원인을 제공하였는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사고가 일어난 지 3년째가 되는 여름이 왔다. 최악의 원자력 사고를 체르노빌, 후쿠시마에 이어 또 다시 목격한 인류는 아직도 똑같은 실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심지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쉽게 깨닫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애써 허투루 지나치며 우량한 발전을 이룩했던 우리에게 그 대가는 당연하게도 너무나 컸다. 게다가 이 ‘대가’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그토록 원했던 편리한 세상은 이미 인류의 발 밑에 펼쳐져 있지만, 나는 그 대가로 이미 우리가 발을 내디딘 미지의 세계가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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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 경기도 광명시 광명3동)
사이렌이나 뉴스보다 인터넷이 더 빨랐습니다. 고층 빌딩이 줄지어 보이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포털 사이트를 켰는데 그런 뉴스를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이질감 있는 일인지 이해하시겠어요? (한숨을 쉬고) 처음 집을 나서며 뉴스를 봤을 때는 사소한 화재가 나서 진화중이라고들 하기에 늘상 있었던 사소한 고장이라고 생각하고 흘려짚었습니다, 최근 다시 찾아보니 그 기사는 삭제되고 없더군요.
몇십분쯤 지나서 큰 길로 나오자 사람들의 입에서 한 둘씩 발전소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봤더니 누구도 100% 믿지 못하고 다들 우왕좌왕 하더군요. 당장 집으로 돌아간다며 발걸음을 옮긴 사람이 오히려 눈에 잘 띌 정도로 그만큼 사람들이 믿지를 못했어요. 덕분에 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적어도 또20분은 걸렸습니다. (잠시 침묵)
...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마찬가지로,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집에 도착해서까지도 그닥 실감이 나진 않았습니다, 그래요, 이때까지 온갖 참사가 일어났던 우리나라지만 누가 자기 집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매우 안일한 생각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 한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 (잠시 침묵)
.... 아마 아직도 대피구역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사실 처음에는 대피 반경이 20KM 라고 하길래 딱히 필요는 없지만 (대피 반경이 아니었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간 시간을 두고 대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 그새 정부의 말이 바뀌었어요,
30KM로 대피반경이 넒어지자 사고가 예상했던 규모를 넘겼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상황 파악이 어느정도 된 후에도 애초에 사람들이 몰릴 테니 대중교통을 이용한 피신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어느정도 예상을 했습니다만 혹시나 해서 있을까 하며 코레일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트래픽 때문에 아예 열리지조차 않더군요.
TV에서도 이미 대로는 몰려나온 대피차량으로 엄청난 정체가 일어나고 있다는 정보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터져나오길래 일단은 창문과 문을 닫고 숨 죽여 기다렸습니다. 인터넷으로 줄지어 뜨고 있는 방사능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면서 말이죠.
다행히 두 세시간 쯤 후에 시청 앞에 버스들이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때가 아마 사고 발생 4-5시간쯤 후였을 겁니다.
학교는 센텀시티보다 발전소에 더 가까운 교외에 있으니 당연히 당분간 수업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서둘러 가방에 간단하게 짐을 싸 시청 앞으로 갔습니다. [2]시청에 도착하니 시청 안에서도 직원들이 분주하게 서류를 옮기니 기재를 옮기니 하느라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시청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구름떼를 이뤘는데 그 모습도 참 장관이었습니다, 급하게 나온 듯 손가방만 들고 있는 사람들, 트렁크도 모자라 손에 급하게 싼 듯한 보따리까지 들고 온 사람들. 휠체어를 탄 사람. 간이 침대에 실려 온 사람. 기숙사에서 왔던지 교복을 입고 서로 껴안고 울던 여학생들...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군인과 경찰이 길을 지키고 서 있어 더운 날씨에 지쳐 대부분 길거리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전쟁에 쫓긴 피난민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장엄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침묵) 장송곡이 딱 어울릴 듯한 장면이었습니다.
같은 과 카톡방이 있었는데 카톡을 확인하려니 아예 앱이 열리질 않더라구요, 마침 같은 과 선배를 만나 모든 수업이 무기간 휴강되었다는 소식을 다시금 확인받았습니다. 사실 약간 불안해서 선배와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버스에 오르는 동안 혼란 때문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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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 (7세)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4동 ->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2동)
할머니 방 창문에서 우리가 전에 살던 집이 보여요, 티끌만하게 작지만 낮에는 잘 보여요, 밤이면 전기가 없는 [3] 저쪽이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아침마다 저 집에 인사를 해요.
근데 엄마는 내가 창문에 얼굴을 대고 보면 싫어해요. 왜냐면 창문에 가까이 있으면 방사능 때문에 아플수도 있대요. 엄만 여기 온 뒤로는 창문도 못 열게 하고 자주 나가서 놀지도 못하게 해요. 전에 살던 동네랑은 너무 달라요. 물론 같은 ㅇㅇ반에 다니던 애들처럼 아프지는 않으니까 괜찮지만 별로 기쁘지가 않아요.. (침묵)
아프지는 않지만 같이 음, 게임 할 애들도 없고, 유치원도 안 가고 계속 집에 있으니까... 유치원 선생님도 보고 싶고 ㅇㅇ반 애들도 보고 싶어요....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는 유치원에 갔었는데 애들이 아무도 안 놀아줬어요. 엄마가 ‘네가 먼저 친하게 지내려고 다가가 보라’ 고 했는데, 말을 거니까 나를 밀치면서 자기네 엄마가 나랑 놀지 말랬다고, 우리 동네로 다시 가라고 했어요. 다른 애들도 똑같은 말을 자꾸 하니까 눈물이 나와서 내가 엄마한테 이르니까 엄마가 유치원에 찾아 와서 나를 데리고 갔어요. 그 다음부턴 유치원에 안 가요.
이사했던 날에는 엄마가 엄청 화를 냈어요. 원래는 집에 들렀다가 찬영이네 집에 가서 놀려고 했는데 엄마가 못 나가게 하고 엄청 큰 마스크를 내 얼굴에 씌우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어요. 티비 채널도, 그 날 ㅇㅇㅇ(어린이 프로) 했는데 엄마가 보던 뉴스에서 채널 돌리니까 화 내면서 가만히 두라고 하고..
결국 간식도 못 먹고 옷도 못 갈아입고 엄마 차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갔어요. 엄마가 차를 여기저기로 돌리고 엄청 빠르게 운전하고 도로로 안 가고 막 골목길로 가고 밭으로 가고 해서 좀 무서웠어요.
할머니 집에 오니까 할머니가 내 유치원 옷을 다 벗기고 샤워를 시켜줬어요. 그 날 아침에 엄마가 씻겨줬는데 또 씻었어요.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엄마는 집에 짐을 챙기러 다시 가고 없었어요.
할머니가 발전소에 큰 일이 나서 괴물이 나왔는데. 그 괴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엄청 조심해야 된다고 했어요. 할머니 집에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해서 바닥에 누워서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더니 사이렌이 달린 차가 네 대나 지나갔어요.
깜빡 잠이 들어서 잤다가 일어나니 바깥은 어둡고 엄마가 다시 와 있었어요. 엄마랑 할머니는 얘기를 하면서 내가 아플까봐 걱정하는 거 같았어요. 난 아픈 데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다시 화를 낼까봐 말을 안 했어요. 그 후로 한 번도 집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다 밤 9시가 되니까 갑자기 전기가 나갔어요. [4] 엄마가 내가 안 자서 불을 껐다고 했는데... 이거 비밀인데 엄마가 거짓말 한 거에요. 할머니랑 엄마도 다시 불을 못 켜서 양초를 가지고 왔다갔다 했거든요.
엄만 아직도 전기가 9시 되면 나갈때마다 거짓말을 해요. 전기가 맨날맨날 나갈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일 주일에 몇 번씩만 그래요.
저번 주에 서울에 사는 아빠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었어요. 근데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서 안 갔어요.
엄마가, 고집부리지 말라고 엉덩이까지 때렸어요. (훌쩍임) 엄마는 아빠랑 같이 안 사니까 같이 못 간다고, 서울 가면 유치원도 다시 가고. 바깥에서 놀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난 아직도 그냥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좋으니까, (훌쩍임)
내가 안 가니까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가 많이 울었어요. 아빠는 다음에 엄마랑 나랑 같이 서울 가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혼자 서울로 갔어요.
엄마가 여기 온 후에 샀던 노란색 박스 같은 게 있는데. 켜고 잠깐 있으면 숫자로 여기가 방사능이 있는 곳인지 없는 곳인지 알려주는 거래요. [5]
할머니 집 화단, 베란다에서는 너무 시끄럽게 삑삑거리는데 할머니 집 방 안에서 하면 그래도 그렇게 시끄럽게 울리진 않아요.
엄마는 그게 시끄럽게 삑삑거리는 곳은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래요. 그래서 나는 베란다에는 못 나가요. 할머니만 가끔 들어가요.
집을 떠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할머니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갔어요. 주사 맞는 줄 알고 겁먹었는데 찬영이가 거기 있어서 병문안 간다고 그랬어요.
찬영이는 나랑 ㅇㅇ반에서 제일 친한 친구에요. 버스를 타고 한참 동안 가니까 논밭 한복판에 있는 병원에 갔어요. 할머니가 그냥 병원이 아니라 요양 병원이랬어요. 바깥에는 여름에 보이던 소독차들도 많이 있고 이상한 옷 입은 사람들도 많이 다녔어요.
우리도 들어가려는 데 군인 아저씨가 애들은 못 들어간다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사 주고 찬영이는 불러 오겠다고 하고 혼자 안으로 들어가서 나는 바깥 벤치에 앉아 기다렸어요.
할머니가 언제나 올까 찬영이는 언제 나올까 하고 문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환자처럼 하얀 옷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안 나왔어요.
간호사 누나 몇 명이 토하면서 뛰쳐나오고 엉엉 우는 건 봤어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라면서 엉엉 우는데 무서워서 할머니가 빨리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간호사 누나들도 아프면 분명 병원 안에는 아픈 사람이 더 많을 거니까요.
할머니는 금방 나왔는데 찬영이는 같이 못 나왔어요. 너무 아파서 침대에서 못 일어난대요. 근데 그렇게 말 하는 할머니 눈에도 눈물이 이만큼 고여 있었어요.
나도 찬영이가 걱정돼서 버스 안에서 조금 울었어요. 엄마가 나중에 그랬는데 찬영이는 우리보다 늦게 집을 떠나서 결국 방사능이란 병에 걸린 거래요.
그래도 찬영이는 우리가 갔던 그 다음 날, 먼 곳에 갔다니 참 다행이죠? 엄마가 어디 갔는지는 말 안해줬는데 먼 데라면 아마 더 좋은 병원에 갔을거니까 금방 나을 거에요.
첫 설날을 지내고 나니까 전에 다니던 친구들 소식이 점점 왔어요. 몇 명은 찬영이처럼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고. 몇 명은 외국으로 나갔고, 몇 명은 강원도나 서울 같은 먼 데서 살고 있대요.
그래도 아직 성민이. 진홍이. 진기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몰라요.
ㅇㅇ반 김유정 선생님도 어디 가셨는지 모르구요. 엄마는 아는 것 같은 데 결국 나한테 말 안 해 줬어요.
엄마는 아직도 전에 살던 동네랑 너무 가까이 있다고 항상 이사 가고 싶어 해요, 아빠도 엄마랑 나랑 서울로 올라와서 살게 할 거라고 했구요.
엄마랑 아빠가 여기보다 더 멀리, 전에 살던 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사가면 전에처럼 친구들이랑 바깥에서 놀고 아플 걱정이 덜 한댔어요. 하긴 밖에 나갈 때마다 모자도 쓰고, 마스크도 쓰고, 긴 바지 긴 팔 옷을 입어야 되고. 아파트 입구에서 엄마 차로 바로 뛰어들어가야 되는 건 좀 불편하긴 해요.
그런데 아빠가 도와줘도 아직 엄마가 일을 못 하니까 이사 갈 돈이 없대요.
이사온 지 얼마 안됐을 땐데, 엄마랑 전의 동네 이모들 몇몇이 허락을 받고 전에 살던 동네에 다녀왔어요.[6]근데 애들은 못 데려 간다고 해서 나는 남고 엄마만 혼자 갔어요.
저녁때 엄마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집에 왔어요. 비닐봉지 안에는 엄마랑 나랑 찍은 사진 앨범이랑 엄마가 화장대에 둬서 미처 못 챙겼던 걸 늘 아쉬워 했던 결혼반지만 있었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뽀로로 인형이랑 컴퓨터도 하나도 안 들고 와서 서운했는데
엄마는 할머니한테 “집은 벌써 누가 털어갔고. 계수기를 대니까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옷가지는커녕 물컵 하나 오염되지 않은 게 없다.” 고 하며 울었어요.
나중에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 집은 더 이상 없대요. 방사능이 너무 많아서 거기 가면 내가 금방 아플 거래요. 내가 어른이 되도 돌아갈 수 없대요.
지금 엄마가 집에서 가져온 앨범은 상자에 테이프로 꽁꽁 감긴 채로 베란다에 있어요.
엄마는 집에 다녀온 후 이틀을 꼬박 앓아 누웠어요.
***
회사원 /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2동 -> 경북 경산시 임당동)
발전소에서 일하던 동창이 있었어요. 사건 바로 전 주에 와이프랑 애랑 다들 모여서 한 잔 했었습니다. 그 녀석 지인 중에 갓난애가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서 그런지 우리 애를 참 예뻐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날 오후에, 사고 소식 들리기 직전에 발신번호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왔더군요. 원래는 그런 번호는 스팸으로 생각해서 잘 안 받는데 그날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받았었죠. 무거운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빠르게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나다, 제수씨한테 당장 집에 들어가서 창문 잠그고 편의점 가서 생수 사서 애 씻기라고 해. 너도 당장 집에 들어가라.”
사실 어찌나 빠르게 말하던지 처음에는 그 자식인줄도 알아채기 힘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하다가 뭔가 낌새가 좋지 않은 걸 느꼈습니다, 게다가 그 녀석 일터가 일터다 보니까 영 그냥 하는 소리같지 않아 와이프에게 그렇게 카톡을 보냈죠.
보내자마자 속보가 나왔고, 그 후 대피령이 떨어지자 카카오톡이 아예 열리지가 않더군요, 대피령이 떨어질 때 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동요하지 않던 사무실이 카톡이 되지 않자 드디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함을 느꼈죠. 굳이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니..
집에 도착하자 와이프가 겁먹은 얼굴로 제가 신고 있던 구두를 버리듯 봉지에 넣었습니다. 거실에는 생수통이 널려 있었고 아이는 새 수건에 둘둘 말려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아내가 제 말을 들은 거죠.
뉴스에서는 이미 속보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저희를 걱정한 타지의 친척, 지인들 때문에 전화기에선 쉴새없이 불이 났습니다.
상황이 보통 일 같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저는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일단 저는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피령이 공식적으로 떨어지자 와이프와 애라도 어디 조금이라도 먼 곳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얼른 옷가지만 몇 개 챙겨와 차에 태웠습니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를 나오자마자 이미 온갖 차량으로 도로는 마비상태였습니다. 얼른 고속터미널 방향으로 골목과 골목을 질주해가며 와이프의 친정인 경산으로 가는 버스에 두 명을 태울 수 있었죠. 저도 차를 거기 두고 같이 갈까 생각도 했었습니다만 자리는 커녕 몰려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내의 표도 겨우 구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마지막 차였다고 하더군요.
버스를 쫓아가며 운전하며 본 길거리는 전기가 끊어져 가로등도 켜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마치 평소 도시의 밤을 방불케 하는 불빛을 자랑했습니다. 경찰 버스도 여기 저기 보였고 무거운 헬멧과 방패를 들고 행진하던 경찰도 보였습니다.
마치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 같았습니다. 거리에 나와 걷는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다만 접촉사고 때문에 차 밖으로 나와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습니다. 아무도 적정 거리를 지키지 않았고 어찌나 꽉 막혀 있던지 그야말로 거북이 걸음으로 움직였습니다. 몇몇 패기넘치는 오토바이가 좁은 차 사이를 달리다가 결국 틈새에 막혀 공중을 가로지르며 도로에 처박히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죠.
꼬박 하루가 걸려 아내가 있는 친정에 도착하자 너무 많은 것을 본 탓인지 긴장이 풀려 그대로 쓰러져 자버렸습니다.
사건 직후 몇 개월 간은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바깥 출입을 자제했습니다. 그것은 아내도, 장인도 장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난 구역 근처의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뉴스가 속속 나오고 확실히 해가 진 후에 술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나 길거리 싸움도 많아지는 등,
일상의 무엇인가가 확실히 잘못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아내가 한 것은 바로 기저귀를 몇 봉지씩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분유도 가능한 한 구하려 했지만 이미 마트는 포화상태였기 때문에 불가능했다고 한숨지으며 말했습니다. 사고 이전에 생산된 모든 식품이 마치 파도에 쓸려 나가듯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아내는 밤에도 몇 번씩 깨며 자신보다 아이의 피폭을 걱정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직후 사무실은 피해구역 바깥의 한 컨테이너로 이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을 하며 저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저 같이 이 근처로 피난오면서 실직한 사람이 뉴스에서 보니까 약 20만명이 된다고 하더라구요.
하수상한 세월이 도래한 거죠.
그렇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로 거의 6개월을 보냈습니다. 군식구 때문에 장인 장모님은 한숨만 늘으시고 와이프는 결국 우울증이 왔습니다.
생방송에서 야당 국회의원이 서울도 이미 피폭당했다고 고함지르자 의회가 개판이 되면서 싸움이 일어났던 때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국무총리가 피난민 중 한 명한테 테러당하는 등.. 아무리 아무 일 없었던 듯 침착한 언론도 이렇게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고름은 막을 수 없겠죠.
결국은 저번 달에 티비를 없앴습니다.
사고 후 첫 눈이 내렸을 때를 기억합니다. 하루 종일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고 심지어 제설차마저 오지 않아 그저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가던 그 때를... 창 밖으로 보이던 그 하얗디 하얀, 아무도 밟지 않아 발자국 하나 없는 그 길을 보며 저희가 떠나온 집 앞 길을 상상했죠. 저런 상태로 앞으로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보내겠구나.
며칠 전에는 경찰이 집에 한 번 다녀갔습니다, 저에게 미리 귀띔해줬던 그 동창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곤 가버렸죠. 말 하는 투를 보아 그 친구가 제게 미리 알려준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동창은 사고 후 찾으려고 해 봤지만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 부모님도 아들 행방을 아직까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가정주부/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2동
그 날 아침에 동네 주부들 사이에서 카톡이 돌았어요. 위험하니까 빨래도 안으로 들여놓고 애들도 내보내지 말라고. 마치 세상이 멸망하는 것 마냥 다들 겁을 먹고 행동했었죠. 그 날 유난히 경찰차도 많이 지나가고 심지어는 생전 보지 못하던 군인들도 봤으니 저도 겁을 먹긴 했는데 그렇게 유난을 떨 일인가 싶기도 하고... 여튼 그랬죠 (웃음)
그래도 지구 멸망은 아니더라구요. 어떻게던 삶은 이어지고 있어요.
그, 국무총리가 사고 몇 달 후에 피해지역에는 수십 년 간 사람이 살 수 없다고 대국민 사과하고 나오는 길에 누가 총리 얼굴에 칼질했잖아요 … 그거 생방송 중에 일어나서 한동안 엄청 크게 보도되고..
사고 후에 피해자들이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밤낮으로 시위해도 안하더니 결국 그렇게 피 보고 사퇴할 건 뭐였는지..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고 있는지 몰라요, 사고 후에 금지구역 아닌 곳에서 알려진 것만도 20곳이 넘는 곳이 엄청난 방사능 수치가 나온다고 난리가 났었잖아요. 그만큼 공식 발표도 이젠 전혀 못 믿고, 그렇다고 시민단체들이 과장한 수치라고 정부에서 반격을 하니… 하지만 우리 같은 서민 입장에서 굳이 누굴 믿는다면 시민단체겠죠.
주변 엄마들 사이에서 자기 집 근처 화단이랑 마당이랑 땅 흙을 어느 정도 파내는 것도 유행했어요. 근처 몇몇 학교에서 방사능이 묻은 흙이라고 파내니까.. 근데 어떤 집은 그걸 애기 아빠가 하다가 오히려 애기 아빠가 병원을 가보니 피폭 당했더라는 소문이 퍼지고 난 다음부턴 다들 안하게 되더라구요.
음식요? 강원도에서 따던 찻잎에서 방사능이 나왔다는데 믿을 음식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안 죽으니 먹는 거죠.
(오랜 침묵 후)
이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동서는 사건이 일어난 후 낙태를 했어요.
그 때가 마침 3개월째라서.. 아는 산부인과 의사 동창이 말하는데 지금 산부인과에서 출산률은 망해가는데 낙태가 성행이라고. 6개월이나 됐는데 엉엉 울면서 오는 아줌마도 있다면서, 그런데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산모들 모유에서 그게(방사능) 나온다는데 자기도 그 기분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니까 몰래 몰래 하긴 하는데 참 기분 뭣같다고 하더라구요.
애들이 하도 떼를 써서 그런지 여름만 되면 저도 덩달아 사고 전에 애들 방학 때 다들 놀러가던 생각이 나요. 작년도 그렇고 이번 여름도 그렇고.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애들이랑 새로 나온 조카랑 계곡도 가고, 바다도 가고, 산도 갔을 텐데...
지금 동서 뱃속은 텅 비었고, 가고 싶었던 곳 중 어디도 방사능 없는 곳이 없잖아요..
***
초등학교 교사/ 양산시 양주동
아이들도 어른들도 달라졌다는 걸 알아채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양산도 그렇고 피해 지역 근처의 각 학교의 방사선량은 시간당 3.8마이크로시버트인데 이걸 초과해서 학생들은 모래나 흙을 만지지 못하게 하고 옥외 활동은 하루에 한 시간만 허용하라고 공문이 내려왔었어요.
그, 피해대책위원회에서.. 이름은 기억 못하겠는데 방사선 안전학의 전문가분이.. 회의하다가 뒤엎고 나가시면서 사임하셨잖아요.... 그 분이랑 피해지역 주변 학부모님들이 주장하는게 다 똑같았는데. 애들이라도 대피 범위를 넓혀주던지 조취를 취해달란 거였는데 정부가 청개구리처럼 일본이랑 똑같이 초등학생과 유치원의 연간 방사능 피폭 한도를 연간 20mSv로 정했잖아요.
근데 문제는 원자력 산업 관련자들조차 연간 20mSv나 되는 방사능에 노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대요. 정상적인 부모라면 당연히 미칠 노릇이죠. 거기서 누가 애를 키우고 싶겠어요?
그런데 그 분은 사임하신 다음에 원래 강의하시던 대학에서도 퇴직당하셨어요.
사고 직후에 교육청에서 중,고등학교는 창문을 닫고 수업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는데. 그게 얼마나 어폐가 있는 소리냐면 벌써 애들은 아침이랑 오후에 학교에 오면서 방사능 먼지를 다 들이마시는데 그 창문 하나 닫는다고 방사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나중에 조사해 본 결과 창문 닫아도 별 소용 없다고 한 다음부터는 그것도 아무도 안 지켜요 (한숨) 그냥 자포자기 수준인 거죠.
몇 달 후에 각 학교의 양호 선생님들, 몇몇 소아과 의사 선생님들이 모여서 애들 소변 채취를 해서 검사해달라고 서울까지.. 보건복지부 건물까지 가서 내밀었어요.
저도 그 때 따라갔었는데 나오시는 분이 미쳤냐고 더럽다고 치우라고 하면서 손으로 밀어서 다 바닥에 쏟아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우린 뭐 좋아서 오줌을 거기까지 갖고 갔겠냐구요.
워낙 충격적인 일들이 많아서 그런지 사고 이전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어요, 그런데 3년 전에 마지막으로 갔던 수영장 현장학습은 기억에 되게 남아요.
물에 방사능이 가장 오래 남는다니까 이제 어지간해서 필요하지 않은 이상은 물에 노출되는 걸 개인적으로 꺼리게 되더라구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시원한 물에 발 한 번 담근 게 아마 그 현장학습 때였을 거에요.
이제 여기 근처 수영장은 다 닫았거든요. 사고 전에 채웠던 물도 못 빼고 거기 그대로 썩고 있어요. 방사능 섞인 물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니까.. 저기 옆 동네 실내 수영장이 있는데 거기도 요즘은 다들 안 가죠.
솔직히 이젠 아이들의 미래가 안 보여요. 원전 폐쇄하는 것만도 비용이 20조가 든대요.
그게 지금 어디서 나오겠어요? 우리 세대로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출처 보완 |
글쓴이님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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