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일하던 도중 전화를 받고는 놀라 전화를 떨어트렸다. 내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가버렸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웃고, 슬픈 일이 있어도 눈물을 머금고는 웃고. 언제나 내게 웃음만을 보여주던 그녀가 가버렸다. 항상 내게 걱정 좀 하지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는데 너무나 미안해서, 또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 죄책감이 들어서, 차마 여자친구 부모님을 찾아가지 못했다. 거의 2주쯤 됐나. 여자친구 부모님에게서 온 전화도 대여섯 통 정도는 받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드려야 위로가 될까, 아니면 내가 어떤 말을 해야 그분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었다. 만약 지금 내가 받은 문자가 아니었으면 정말 연락조차도 못 드렸을 것이다. ‘딸이 너에게 남긴 물건이 있으니 이거라도 가져가라.’ 만약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물건이 아니었으면 가지도 않았었겠지만…… 그 사람의 냄새가 남아있는 물건은 그거 하나뿐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녀의 사랑이 남아있는 물건이 하나라도 더 남아있을 수 있다면, 무조건 가야지. 대충 청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는, 선물 받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손수건에도 우리의 사랑이 남아있구나. 눈물 흘릴 때면 꼭 이걸로 닦아줬었고, 걔도 여기다가 코 여러 번 풀어댔었는데. 주머니 안으로 손수건을 밀어 넣으니 마음 어딘가가 찡하니 아려왔다. 구겨진 손수건 위를 스치는 손 끝이 살짝 떨렸다. ‘더는 만나지 못하겠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다시 그 얼굴을 볼 수 없겠지.’ 더는 내 사랑을 만나지 못한다는 괴로움. 행복했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꽃 주변을 돌아다니던 모기와 파리새끼들.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으면 계속 비슷한 생각이 계속될 것만 같다. 잠금 버튼을 살짝 눌러보니 화면에서 그녀가 웃고있다. 그리고 그 얼굴 위로 떠 있는 시간 10시 40분. 이 웃는 모습처럼 마지막 선물이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다면…. 부모님 얼굴은 뵐 수 있을까. 남긴 유품 받고는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받았던 그 눈길은 뭐였을까. 그 사람을 사랑해도 됐던 걸까. 예전 좋았던 기억들부터 시작해서는, 점점 검은색으로 머릿속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답답하다. 창문을 안 내리고는 못 배길 정도로…… 찬바람이 내 몸을 스치곤 차 안을 가득 채웠지만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나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물수 밖에 없었다. 나는 말보로 한대를 빼서 물고는 담뱃갑을 옆자리로 던졌다. 조수석 시트에 튕긴 하얀 담뱃갑은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사거리에 들어서니 신호가 바뀌었다. 잠깐 차를 세울 짬이 생겼다. 난 안전벨트를 살짝 풀고 떨어진 조수석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사귀던 초기에 이야기가 한번 나왔었지. “오빠. 담배 끊으면 안돼? 진짜 냄새는 잠깐 제껴놓고, 오빠 그러다가 몸 망가진다?” 나는 와이퍼 속도를 조절하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력해볼게. 너도 금연 진짜 힘든 거 알지?” 여자친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담뱃갑을 하나 주워 들며 말했다. “이거 봐 이거. 이거! 오빠 진짜 폐에 구멍 뚫리겠어 이러다가. 세 갑이 뭐야 세 갑이.” 난 창문을 열고는 바깥으로 꽁초를 집어 던졌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클랙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미 신호는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고, 백미러를 보니 뒤차 운전자는 핸들을 부술 듯 두드려대고 있었다. 살짝 백미러를 보니, 내 뒤에 있던 차가 속도를 내선 내 옆쪽으로 오고 있었다. 창문너머로도 화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만화에서 봤다면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겠지. 그 사람은 창문을 내리고는 내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이 등신새끼야! 신호 바뀐 지가 한참인데 왜 안가고 지랄이야!” 그 운전자는 나지막하게 ‘어휴.. 덜떨어진 새끼……’ 라 조용히 읊조리곤 내 차를 추월해 달려나갔다. 남의 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자기들 말만 지껄여대고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는 인간들. 너무나 익숙한 길을 따라 달리니 기억이 더욱 새록새록 떠올랐다. 3학년때 이 호수공원 근처를 거닐면서 서로 많이 이야기 했었는데. 이젠 그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 만약 녹음을 더 해놨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안타깝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지. 난 거의 타 들어간 담배를 바깥으로 던지고는 잠시 차를 세웠다. 오른쪽 창문 너머를 보니 갈색 벤치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벤치 너머에 펼쳐진 에메랄드 빛 호수. 그리고 에메랄드 빛 호수를 가득 메운 붉은 석양. 지금 이 풍경을 찍어서 납골함 옆에 놔두면 하늘나라에서도 좋아하겠지. 그녀의 입에 손을 대고는 살짝 위로 끌어올려 카메라를 켰다. 카메라의 한 귀퉁이. 앨범의 맨 마지막 사진이 보인다. 어두운 배경의 한 가운데가 밝은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난 포커스가 잡힌 카메라 화면의 가운데를 잡고 살짝 화면을 밀어봤다. 기억났다. 사진의 중간에 켜져있는 촛불, 그리고 그 아래에 놓여있는 케잌. 어두운 방안 한 가운데 밝혀진 또다른 촛불 하나. 굳게 다문 입술과 케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 그때를 생각해보니 얘도 많이 놀랐던거로 기억난다.. 애들도 내가 모았고.. 케잌도 내가 사서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생일 축하 노래가 갑작스레 울려퍼지고, 방 불이 꺼진다. 내 뒤쪽의 세탁실에서 희미한 불빛이 걸어 나오고 있다. 케잌 위에 꽂힌 스물 한 개의 촛불들이 어두운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커진 눈과 감출수 없는 미소. 놀랐다고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다. “아 진짜아! 깜빡이좀 켜고 들어와 제발. 놀랬잖아 다들…” 자기를 위해 준비된 자리인걸 알아보곤 테이블쪽에 앉는다. 그래. 계획한대로야. 전부. 행복한걸 보니 정말 마음이 놓인다. “다 너무 고마워. 정말로. 상상도 못했는데 너무 좋다.” 행복함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 정말 다행이다. “야, 우리도 상상도 못했어. 선배.. 아니 오빠가 우리 다 막 불러모으고 그랬어. 니 생일파티 한다고.” 그래. 내가 너를 위해 불러 모았지. 너를 위해서… “아.. 응? 아… 감사합니다 선… 아니 오빠.” “에이 뭘… 과일 생크림 케잌 좋아한다 그랬지? 제일 맛있는거로 사왔다.” 예전 같았으면 저기 먼 벤치에 앉은 내 여자친구가 뒤를 돌아보면서 살짝 웃어줬겠지. 여자친구가 아니더라도 아무나 저 자리에 앉아 나를 향해 돌아봐주면 좋겠지만 그 어떤 누구도 찾을수 없다. 당장이라도 내 사랑이 돌아올거 같기만 한데 저기엔 아무도 없다.
-----------------------------------------------------------------2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