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에 자본주의가 깊게 뿌리 내리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돈’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1년에 얼마를 버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는 물론 그 사람의 가치마저 결정된다. 생땍쥐빼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말마따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묘사하고자 할 때 그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벽돌은 무슨 색으로 되어 있는지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그는 얼마짜리 집에 살고 있다’면 그 뿐. 거기에 설명을 보탠다고 해 봤자 몇 평짜리 집이라고 말해주면 그만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판단을 내렸다면 이는 무능력 앞에 ‘경제적으로’라는 말을 생략한 것일 게다. 이와 같은 요즘의 기준에 의하면 ‘찌질하다’는 말의 개념 또한 결국은 돈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인류의 역사에 화폐가 등장한 이래 돈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비중이 지금만큼 절대적이었던 때는 감히 단언하건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위인은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가장 완벽하게 찌질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제는 제발 솔직하게 말해 다오. 왜 내 그림은 팔리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그림을 팔 수 있을까?돈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 네게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한 만큼의 돈을 가끔이라도 내게 보내달라고 말이다. 여유가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기보다는 내게 보내다오.’
‘그러니 빨리 답장을 보내다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돈을 보내다오.’
‘돈을 다 써버린 건 아니지만,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오늘이 20일인데. 이번 달에는 여느 때보다 생활비 지출이 적었지만, 그 대신 유화도구를 사는 데 돈을 많이 썼다. 물론 이건 한 번 사면 오랫동안 쓸 수 있다. 그래도 너무 비싸다. 네가 이른 시일에 얼마라도 보내줬으면 한다.’
‘시기가 좋지 않을 때 돈 부탁을 하는 게 별로 유쾌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변명하자면, 가장 흔하게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가장 어렵고 돈도 많이 든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편지와 돈 고맙게 받았다.’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말을 해라. 즉시 유화를 그만두고 경비가 덜 드는 데셍을 하마.’
찌질한 위인전의 두 번째 위인,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위의 문장은 모두 빈센트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빈센트는 그가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뛰어든 이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금전적인 부분을 동생 테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았다. '비운의 천재'라는 그의 수식어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실은 그가 살아 생전에 단 한 작품의 유화 만을 팔았다는 것이다(유화 이외에는 몇 작품을 팔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조차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꽤 많은 돈이 든다. 게다가 빈센트는 그림을 그리는 비용뿐 아니라 주거와 음식 등 그 자신의 생계에 필요한 모든 돈을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에 의지하며 살았다.
테오는 처음에는 한 달에 100프랑 가량을 빈센트에게 보냈으며, 3년쯤 후에는 액수를 늘려 매달 150프랑을 지원했다고 한다. 1884년 당시 프랑스의 숙련공이 4인 가족을 부양하는 데 1년 간 지출한 돈이 1,226프랑이었다고 하니 1년에 1,800프랑을 꼬박꼬박 형에게 보낸 테오의 경제적 부담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화상(畵商)으로 비교적 성공한 테오의 벌이가 꽤 괜찮기는 했지만 장남 빈센트 말고도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그에게 가중되는 책임은 더욱 컸을 것이다.
만약 테오가 요즘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었다면 벙커원에 가서 강신주 박사의 <다상담>에 사연을 접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아마도 강신주 선생은 ‘당장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고 벗어나라’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테오가 빈센트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테오는 경제적인 부담감을 갖기는 했을지언정 그로 인해 고통을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렇다고 빈센트가 테오에게서 받은 돈을 오로지 그림 그리는 데에만 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빈센트는 평소에 사창가를 즐겨 찾았다(그 돈의 출처는 굳이 예측까지 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어느 해 겨울, 사창가를 전전하던 병들고 임신한 매춘부를 그의 집에 거두기도 했는데, 시엔이라는 이름의 그 매춘부에게는 이미 어린 딸까지 딸려 있었다.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시엔과 그의 딸을 겨우내 먹여 살린다. 병든 시엔은 출산에도 꽤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보살핌을 지속적으로 받았어야 했는데, 문제는 역시 돈이다.
매춘부 시엔을 모델로 한 고흐의 작품. 「슬픔」
빈센트가 시엔을 재우고, 먹이고, 병원에 입원시키고 하는 등에 필요했던 모든 돈. 그 돈은 ‘당연하게도’ 동생 테오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빈센트의 인간미 어린 행동에 필요한 모든 댓가는 온전히 테오에게 전가되었던 것이다.그리고는 해산한 시엔을 아내로 맞겠다고까지 선언하는 형 빈센트.
그뿐 아니다. 이후 빈센트는 당대의 화가였던 폴 고갱과의 공동 작업을 강하게 열망했는데, 여기에도 테오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갱이 빈센트와 함께 기거하며 작업을 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테오가 책임지기로 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능력했던 빈센트의 찌질함은, 따지고 보면 지극히 요즘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 본 것이기에 한계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찌됐든 당시의 테오는 형 빈센트에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는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금전 자체에 대한 압박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돈 자체에 대한 것일 뿐, 동생 테오는 그것으로 인하여 형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모든 정황을 모두 살핀다 하더라도, 그런 모습의 빈센트는 충분히 찌질하다.
또다른 반 고흐, 테오
테오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보다 네 살 연하인 동생 테오 반 고흐는 고흐 형제의 숙부들이 일하고 있던 구필 화랑에 취직하여 어린 나이부터 그 능력을 인정 받았다. 생전에 빈센트는 테오에게 무려 668통의 서신을 보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 편지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당시 심리 상태와 그가 남긴 작품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에 있어 훌륭한 사료가 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빈센트의 편지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빈센트는 경제적인 면에서 테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테오는 빈센트에게 있어 단순한 경제적 지원자 이상이었다. 빈센트의 괴팍한 성격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평생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잠시나마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얼마 있지 않아 견디지 못하고 빈센트를 떠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그의 부모와 친지들에게 조차도 빈센트는 늘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빈센트의 곁을 평생 동안 유일하게 떠나지 않았던 것이 동생 테오였다.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빈센트가 미망인이 된 사촌 누이 케이 보스와 교제하겠다고 소란을 피워 집안을 풍파 속에 몰아 넣을 때에도 테오 만은 빈센트와 그의 가족들 사이에서 이를 중제하고 이해시키고자 노력했다. 빈센트는 평생에 걸쳐 테오에게 자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며,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 또한 테오와 곧잘 나누었다.
만약 빈센트 반 고흐의 생사 여탈권을 다른 누군가가 가질 수 있었다면, 그건 당연하게도 테오였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빈센트에게 있어 유일한 치유이자 삶의 이유였기에 만약 테오가 경제적 지원을 끊어 빈센트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면 빈센트는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 지원은 유지하더라도 테오가 정신적으로 빈센트의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빈센트의 삶은 그것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평생을 고독했던 빈센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상대가 테오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오는 예술적으로도 당시 빈센트의 그림을 제대로 평가하고 가능성을 인정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을 두루 살폈을 때, 후대의 사람들은 빈센트 반 고흐의 위대한 예술적 업적은 테오를 분리해놓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닌 말로 만약 테오의 이러한 진심 어린 헌신이 없었다면, 요즘 세상의 기준에서 빈센트는 '동생 등골 빼 먹는 무능한 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한 편으로, 빈센트에게 있어 테오가 무조건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테오 또한 형 빈센트에게 정서적으로 상당 부분 의지했으며, 예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매우 존경했다. 이는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테오는 그와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이름을 '빈센트'로 짓고 형에게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던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생전에 팔린 유일한 유화 작품. 「붉은 포도밭」
테오는 진심으로 빈센트가 반드시 '생전에' 화가로서 성공하길 바랐다. 그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와 같은 바람은 잘 드러나있다. 테오 자신이 매우 능력있는 화상이었음에도 빈센트의 그림이 고작 한 점 밖에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가지 이유는 테오가 잘 나가는 화상이긴 했지만 빈센트와 친형제 사이라는 것 또한 워낙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사람들이 오히려 테오의 추천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당연하게도, 당시 빈센트의 그림 자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일게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후자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테오조차도 편지에서 빈센트에게 '형의 그림은 색채가 너무 어두워서 요즘 인상주의 그림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세상 누구도 빈센트를, 그리고 그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았다. '비운의 천재'라 불리는 그에게 적어도 '비운'만은 적절한 비유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빈센트가 '비운'하지만은 않았던 것은 아니, 오히려 그가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을 가장 완전하게 이해했던 테오의 존재 때문이다.
빈센트와 그의 예술은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였으나 단 한 사람으로부터만큼은 완전한 사랑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형이 영원한 안식을 취한 것에 감사의 기도를 해야할 때지만 아직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나는 형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 같다. 어쩌면 미소를 지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불가사의가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구나.
내가 죽어가는 형의 침대 옆에서 빨리 회복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했으나 형은 슬픔은 영원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죽기를 원했단다. 나는 형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잠시 숨을 가쁘게 쉬고 고통을 느끼며 그렇게 그는 눈을 감았단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영원한 안식처로 그는 떠났단다.
위의 글은 빈센트가 죽고 난 뒤 테오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의 일부이다. 빈센트의 죽음은, 테오에게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큰 슬픔이었다. 빈센트의 장례식에서도 가장 서럽게 울었던 사람은 테오였다. 원래부터 건강히 좋지 않았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빈센트가 죽은 지 6개월 후에 병(간부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33세. 37세에 세상을 떠난 형 보다도 짧았던 삶이었다. 테오는 사후 23년 만에 빈센트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어, 죽음 후의 삶 또한 그의 형과 함께 한다.
위대한 형제, '두' 고흐의 묘비
빈센트와 테오의 죽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下)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늘 불안정했던 정신 세계,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 중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사실은 그가 정신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수 차례 자해를 시도했다. 사촌 누이인 케이 보스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를 허락하지 않는 케이 보스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손을 불에 지지기도 했다. 빈센트의 사랑을 당사자인 케이 보스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노란 집’에서 함께 살며 작업하던 고갱이 그를 떠났을 때, 빈센트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은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생을 마감하게 된 사건. 빈센트는 스스로 복부에 권총을 쏴 자살하기에 이른다.
금전적으로 무능력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했던 빈센트 반 고흐. 살아 생전 전혀 주목 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인정 받기 시작했다는 비극적 스토리. 그가 유일하게 생전에 팔았던 유화의 값이 400프랑. 그리고 1987년에 팔린 그의 그림 「해바라기」의 낙찰가가 3,990만 달러. 이 액수는 이전 최고 경매가의 세 배 이상이었다고 하며, 1989년 당시의 3,990만 달러를 현재의 물가로 환산하면 최소 1억 달러 이상이 된다.
400프랑과 3,990만 달러 사이의 괴리. 위대한 그의 작품이 400프랑에, 그것도 단 한 점 팔렸다는 사실만큼이나3,990만 달러라는 액수 또한 지금의 우리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가진 위대함을 단순히 돈의 값어치로만 환산하려고 하는 우리의 몰이해 자체를, 빈센트 반 고흐는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빈센트 반 고흐의 찌질함을 그의 경제적 무능함의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 그의 위대함, 그의 예술이 가진 위대함을 3,990만 달러로 이해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이어지는 (下)편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인생 전반에 걸쳐 겪었던 ‘버림 받음’과 ‘상처’,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에 대하여 ‘필자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본격적으로 알아본다.
뱀발
1. 처음부터 모든 연재를 상, 하편으로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들의 생애를 단 한 편의 글로 풀어내기에는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다는 점, 또한 그러기에는 필자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진짜 이유는 후자에 더 가깝다). 매주 한 사람씩 연재를 이어나가기에는 시간적, 물리적 한계가 있기는 개뿔, 이 또한 능력 부족...
2. 지난주 연재에서 필자가 ‘졸필’이라 표현했던 부분을 댓글로 지적해주셨던 분이 있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졸필’이라는 표현 보다는 ‘졸문’이나 ‘졸고’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고마운 지적. 아차 싶어서 사전을 찾아보니 ‘졸필’은 글씨뿐 아니라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필자가 이를 완전히 인지하고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는 없을 것 같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꾸벅 (_ _ )”
국내 굴지의 자동차 기업 H사의 마케팅에 등장한 고흐.
'아트카' 컨셉으로 자동차에 도배된 고흐의 자화상과 그의 작품 「해바라기」
자신의 예술혼이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없었기에 절망했던 '과거'의 고흐와 '현대'의 자동차.
아직까지도 고흐에게 예술이란 이토록 잔인하다.
(下)편에 계속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