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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 달 앞두고 쓰는 우리 할머니 이야기
게시물ID : wedlock_21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라굽쇼?
추천 : 18
조회수 : 704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6/06/01 14: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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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형제들이 많고 화목한 전형적인 농가의 가정이었다.
 
8살 어린 훈장님댁 꼬마 신랑과 혼인을 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니와 꼬마신랑과 살았다.
 
수년이 흐르고 징용을 피해 산에 숨었던 신랑이 결국 잡혀 만주로 끌려갔다. 시어머니와 둘만이 남았다.
 
해방이 되고 신랑이 만주에서 돌아왔다. 큰 딸과 아들 셋이 생겼다.
 
전쟁이 났다. 피난을 내려갔다. 그 와중 큰 딸을 제외한 아들 셋을 잃었다. 하나는 굶어서 하나는 병들어서 하나는 난리통에 헤어져 만나지 못했다.
 
친정 부모님도 잃었다. 형제들도 몇을 잃었다. 시어머니와 신랑과 딸과 끌어안고 오열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 가족들과 강원도 산골로 집을 옮겼다. 농사를 짓고 돼지와 닭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아들셋과 딸을 하나 낳았다. 둘째 아들이 많이 아팠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으나 몸이 약해 국민학교를 2년 늦게 갔다.
 
힘든세월을 함께 한 큰 딸이 인천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큰 손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사위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순주 둘과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큰 딸이 낮에는 식당에서 밤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고생했다. 마음이 아프나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첫째 아들은 선생님이 돼서 동해로 갔고 둘째 아들은 공무원이 돼서 인천으로 가고 둘째 딸은 전기공인 사위를 만나 인천으로 가고
 
막내 아들은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처럼 시어머니와 신랑과 셋만이 남았다.
 
농사를 짓고 장을 담가 자식들과 손주들이 오면 들려 보내고 살았다. 집을 떠나는 날은 없었다.
 
어느날 백수를 넘긴 시어머니가 돌연 단식을 시작하셨다. 사흘 째 되는 날에 조용히 돌아가셨다.
 
IMF로 막내 아들이 사업이 망하고 빚을 지고 내려왔다. 전답을 팔고 형제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빚을 갚으려 했으나 파산을 막을 수 없었다.
 
집 한 채와 텃밭만이 남았다.
 
어느 날 밭에 내려가던 도중 넘어졌다. 골절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다.
 
'어서 나가서 호박 따야하는데...'
 
그러나 해가 바뀌고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와도 병원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약이 너무 독했다. 남편도 형제도 자식도 손자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눈이 참 많이도 온다....'
 
뙤얕볕이 내리는 창 밖을 보며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___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에게 어머니께서 필요한 곳에 쓰라며 돈을 주시며 '칼과 도마는 직접 사서 선물해 주고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 칼과 도마냐고 여쭤보니 시집오며 할머니께 칼과 도마를 받았는데 본인도 그렇게 해 주고 싶어서 라고 하시더군요.
 
먼 섬마을에서 시집온 며느리에게 선물을 해 주고 싶은데, 마땅히 가진 돈도 없고, 장에 가기도 힘든 깊은 산골에서 살 수 있었던건 장사꾼이 가져온
 
칼과 도마였다고...
 
그 때 그 이야기와 함께 할머니께서 살아온 삶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속에 할머니는 그저 밭을 엉망으로 만들며 덜 여문 옥수수를 잔뜩 따온 개구쟁이 손주를 잘 했다고 스다듬어 주고, 버섯 키우려고 둔 나무를 불 붙은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리고 혼나도 감싸주시던 다정한 할머니 모습만 남았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는 모르고 있었네요.
 
돌아가신지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할머니가 보고싶어 집니다. 손주 며느리 보여드렸으면 참 좋아하셨을텐데...
출처 제가 약과와 엿을 좋아해서 항상 제가 내려갈 때면 약과와 엿을 잔뜩 만들어 주시던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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