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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군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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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tetraisol
추천 : 6
조회수 : 169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10/23 11:46:39
고려의 군사 제도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화 체제를 보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조선은 고려의 군사 조직을 담습했습니다, 다른것을 찾자면 무신 정권 시대를 거치며 사병에 말하자면 너그러워진 고려와 다르게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며 엄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 정도가 다르겠지요.

이 글에서는 고려 초기 경군은 사실 태조 왕건을 따르던 군에서 유래한 군반 씨족으로 신분과 토지를 세습하며 복무하던 전문군인 들이었다 같은 이론의 대립은 간략하게 넘기고 고려의 군사제도에 관해 정리해보려 합니다.

사실 고려사라는게 상당히 제한되는 부분이 많아 그 내역을 살펴보기가 어렵기도 하고 논란거리도 있을텐데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지적은 환영합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즉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 나뉩니다, 이 2군의 창설계기는 현종 5년 재정을 회복시킨다는 명분 아래에 무리하게 영업전을 압류하자 이에 격분한 다수의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훈을 중심으로 봉기한 것을 계기로 설립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이 들의 임무는 궁궐을 수비하고, 왕실을 호종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둘이 같은가 하면 그 것은 아닙니다, 응양군의 경우 가장 규모가 작아 고작 1영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1영이란 군사 단위로 고려사 병지에 따르자면 1천명의 병력과 6백명의 예비병 내지 비 전투 병력을 의미합니다.) 반면 용호군은 2개의 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만 그 직위가 응양군에 비해서는 좀 낮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2군 6위 다른 말로 8위라고도 하는 이 들의 지휘관인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기관인 중방重房의 의장직은 응양군의 상장군에게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2군의 상장군이 다른 6위와는 다르게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대장군은 근장대장군 같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는 하지만 이 들 내부에서도 엄격하게 직위는 갈리고 있던것입니다.

6위의 창설시기는 역시 정확하게는 알수 없지만 목종 1년의 전시과 지급 명단에서 이미 그 이름이 보이는 것을 봐서는 그 이전 대략 성종 14년 경에는 만들어지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이 들은 고려 성립 초기 호족들에게 분산되어 있던 병권을 규합하여 중앙군으로 창설하는 그러니까 지방 호족들의 사병들을 해체하여 흡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성종이 중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보아 이 6위도 당의 모병제를 담습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번상입역番上立役 즉 농민층을 주요한 인적 자원으로 삼아 교대로 번상하여 근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6위 가운데 주력은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셋으로 이 들 부대에는 다른 셋과 다르게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이라는 보병과 기병을 뜻하는 병종이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지방군인 주현군州縣軍의 그 것과 동일한 것으로 말 그대로 순수한 의미의 번상병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들이 고려의 주력 부대로서 수도의 경비나 출정등을 맡았으며 군인에게는 당연한 말이지만 노동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만큼 숫자도 가장 많았습니다, 육위의 전체 병력 42령 약 4만 2천명중 32령 3만 2천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내역은 좌우위에 보승 10령 정용 3령이 신호위에는 보승 5령 정용 2령이 흥위위에는 보승 7령 정용 5령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3위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는 일종의 좋게 말하자면 특수 부대 였습니다, 금오위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번상군인 정용 6령과 감옥에서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역령役領 1령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천우위는 의장대로 상령(常領) 1령과 해령(海領) 1령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해상에서도 의장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감문위는 일종의 방위 그러니까 공익근무 요원과 같은 이 들입니다, 궁성 내외의 문들을 수비하는 임무를 담당했는데 집안 사정이나 노쇠, 질병 등의 사유로 소속되는 이 들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규모는 1령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이 셋의 임무에서 볼수 있듯이 역령, 상령, 해령, 감문위는 상번이 불가능한 군입니다, 따라서 이 들은 상비군으로 조직되었으며 전시과의 지급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지방군입니다, 고려의 지방군은 크게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으로 나뉩니다, 고려사를 본다면 본디 고려의 군제는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모방한 것으로 주와 현에 있는 군도 모두 6위에 속하며 따로 군이 있는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주현군의 설립 계기를 보자면 광군光軍과 진수군鎭守軍의 임무가 서로 겹치므로 통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광군이란 정종 2년에 후진後晋에 유학하던 최광윤이 우연찮게 거란에 포로로 사로잡힌 이후 정세를 보니 필히 고려를 노릴것이 분명하여 이를 알릴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 때문에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을 규합하여 창설한 것이 광군인데 숫자야 최대 30만도 가능하다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예비군입니다, 따로 징병을 하는게 아니라 필요시에 그 지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충원하는 것을 요체로 하며 구성원은 그냥 집에서 일하다 나오신 분들이지요, 성종 2년 이후에야 관리를 내려보낸 것으로 볼때 지휘를 담당한 것은 호족이 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후에 지방제도 개편을 거치면서 주현군으로 개편되며 지휘 기관인 광군사光軍司가 성립되었지만 이 기관의 운영 역시 여전히 실권자인 호족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추측됩니다, 사실 달리 할 사람도 없고 말이지요(....)

진수군은 이름 그대로 각 지역의 요충지에 건설된 각 진에 복무하던 태조 왕건때 부터 중앙으로 부터 지방으로 파견을 나간 군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보내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충원하는게 더 경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이득이겠지요.

이 조직의 설립과 구성은 지방 제도 개편? 정비와 함께 합니다, 따라서 완성은 지방 제도 정비가 일단락 된 현종 9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현군은 고려사 병지에 따라 보자면 현령관 이상의 관리가 파견된 지방 행정 구역을 단위로 편성됩니다, 이 들 주현군의 병종은 정용 精勇, 보승 保勝·노대 弩隊 신기 神騎 보반 步班  해군 海軍  공장工匠 일품一品 이품, 삼품 등이 있었는데...그냥 정용과 보승, 일품 등이 있구나 하시면 됩니다, 숫자를 남긴 기록이 이 들 밖에 없거든요.(....)

이 중 주 전력은 사실상 정용과 보승으로 수성과 전투를 담당하는 이 들이었고 때로는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이 들의 지휘는 중앙 정부에서 직접적으로 담당했으나 평시에는 아니 대개는 그냥 그 지역의 행정관의 지휘에 따라 활동했습니다.

일품군은 이전에는 광군이라 불리던 이들로 공역을 위해 편성된 전문적인 노동 부대로 가을을 기점으로 1년을 단위로 교체하여 근무하였기에 추역군秋役軍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정용이나 보승과 다르게 지방의 향리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물론 중앙 정부의 지시 아래 동원되었지만 향리의 지휘 아래에 움직였기에 토착적인 성향이 정용이나 보승보다 강했습니다.

이품과 삼품군은 중앙 정부의 통제와는 무관한 부대로 보통 그 지역의 촌장이나 촌정이 담당했고, 그 촌락에 사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대였는데 특이한 사항으로 70세 이상의 부모를 형제 없이 공양할때 번상병은 감문위 지방군은 이 이품과 삼품군에 배비되었지만 부모가 돌아가시고 상이 끝나면 원래의 역으로 복귀해야 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 들의 임무는 주로 노동과 비 전투 임무를 담당하였으리라 추정됩니다.

주현군의 기록상 남은 정용, 보승, 일품군을 다 합친 숫자가 정확히는 29만여명 정도 됩니다만 그 절반 이상은 양계에 배비되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것이 이 들 북계와 동계는 군사 행정 조직으로 나라의 최전선이었으니 말이지요.

따라서 이 들은 넒게 보자면 주현군이었으나 그 행정조직을 따라 주진군이라 별도로 다루어집니다, 주진은 하나의 독립된 전투 단위를 기초로 한 행정 구역으로 주의 지휘관인 방어사나 진의 지휘관 진장은 해당 구역의 행정 업무까지 담당했던터라 주현과 다르게 별도의 속현을 거느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군인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주현군과 마찬가지로 그 대부분은 집에서 일하다 나오신 농민분들이십니다, 북계와 동계는 그 구성이 조금 달랐는데 초군 抄軍 좌군 左軍 ·우군 右軍 및 보창 保昌 등의 군인 약 4만 명과 신기神騎 보반 步班) 약 2,000명에 백정 白丁 그러니까 농민들 6만 1000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던 북계와는 다르게 동계는 초군, 좌군, 우군과 더불어 영새군 寧塞軍 1만 1500명, 공장 工匠 전장 田匠 ·투화 投化 그러니까 귀화한 여진족 사공 沙工 등의 특수한 임무를 담당하는 이 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병력을 통해볼때 대략 수배의 차이를 가질정도로 북계가 중요시 되었는데, 국제 정세를 살펴볼때 또 지리적 조건을 통해볼때 이는 당연한 일일겁니다.

초군, 좌군, 우군과 보창 및 영새는 똑같은 근간을 이루는 이 들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인 초군, 좌군, 우군은 마대 馬隊 기병과, 노대弩隊 노병이 포함되어 독자적인 작전 수행이 가능했고, 보창 및 영세는 순수한 보병만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불가능했다는 것이 그것으로 정예병과 비 정예병 정도의 차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 들은 모두 주진의 성 내에 주둔하면서 상황에 대비하는 상비군이었습니다, 반면 백정군이나 공장, 전장, 사공 등은 둔전병이거나 공방에서 근무하고 통신이나 수송을 담당했으리라 보이는 등 순수한 의미의 주현군이었지요.

이러한 고려의 총 병력은 고려사 병지를 비릇해 여러 기록을 취합해 수군을 포함하여 계산해볼때 얼추 37? 만 정도 되는데 이 중 대부분은 북계에 배비되었으나 주진군의 임무는 공세가 아니라 수비였습니다, 사실 지방군이라는 것을 이루는 병력들이 대부분 둔전병이나 농민이었다는 것을 감안함과 동시에 보병 위주의 병력 구성을 갖추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잘못된 선택은 아닙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나라를 생각해볼수 있겠지요, 이 들 역시 보병 위주이었지만 공세적인 전술을 고집했습니다, 정확히는 비 정규군과 민병은 수성을 정규군은 공세를 담당하게 만들었는데..그 결과는 뭐 그렇습니다, 숫자나 질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지만 따로 대 기병 전술이나 장비의 도입, 이민족의 용병 고용 등에는 미진했던 탓인지 전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하는 사족입니다만 숫자만 본다면 조선과 다를게 없습니다. 질적인 문제야 기술의 발전이 있으니 언급할 필요는 없을테지만 조선과 비교하여 이렇다 할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의미없는 VS놀이(...)이기는 하지만 고려의 총 병력 약 37만은 비 전투 병력까지 취합한 결과물로 세조를 기준으로 볼때 조선의 총 병력은 전투병력 27만여명에 비 전투 병력을 더하면 약 85만명에 달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숫자가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전투력이 조선보다는 오히려 낮다고 할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음 수 차례의 전쟁을 통해 볼때 고려는 확실하게 군사 강국이다 라는 의견도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일단 초기에는 호족들이 군사권을 쥐고 있는 즉 중앙 정부의 통제 외의 군대가 각 지방마다 있었습니다, 중앙에서는 태조 왕건의 직속 군부대와 그 출신자 등을 중심으로 중앙군이 편성되어 각지에 있는 진에 파견나가는 정도였지요, 다른 설에 따르자면 지방 호족들의 군대를 차출해 중앙군으로 쓰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 이런 것을 제하고 편제를 개편한 이후에도 말아먹은 횟수는 전쟁의 숫자에 비례합니다. (....)

이미 요나라 즉 거란과의 전쟁에서 주력 부대가 깔끔하게 소멸당한 전적이 있습니다, 경과를 보면 싸우다 진것도 아니고 지휘관은 성 내에 있고 병력은 모두 성 밖에 내보낸 상황에서 일전을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지휘관 없이 싸우다 쓸려나가고 도망치다 성 내부로 들어오는 바람에 혼돈의 도가니가 점점 커지고 결국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쓸려나갔지요.(.....)

농담이 아니라 3차때 소배압이 개경으로 고속도로를 탈 생각을 안했다면 만일 요나라의 국력이 막 태동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몽골과의 전쟁 프리퀼을 찍을뻔했습니다, 네 대등한게 결코 아닙니다. 아닌말로 3차 이후로 요나라가 가성비를 생각안하고 밀고 내려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상상하기도 힘들정도이지요.

그나마도 2차 전쟁이 끝난 뒤에 경제 부흥을 외치며 무신들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바람에 봉기가 발생해 고급 지휘관 10여명이 참살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밑에 있던 이들이 얼마나 쓸려나갔을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요, 그리고 무신 정권인데 이게 사실상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병화로 인하여 전력이 약화됩니다.

그 뿐이면 좋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때 또 주력 부대가 쓸려나갑니다, 무신들의 사병이나 사병화한 군대 즉 남아있던 정예병들은 전부 강화도에서 머무르다 세금과 물자 수탈하러 한번씩 나오는 정도인터라 사실상의 주 전력이 공백인 상황에서 각 지의 주현군, 주진군이 지우개로 지우듯이 지워져 나갑니다, 이러한 지방군에 대한 가혹한 시절이 이 약 40여년간 지속됩니다.

결국 무신 정권이 종결되고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보자면 가혹한 수탈에 따른 경제적 조건 악화와 여몽 연합군을 비릇한 종군의 의무 등의 문제는 둘째치고 지방군의 군제 자체가 붕괴하지 않은게 이상한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당연히 여몽연합군등을 보낼때 도저히 원정을 보낼 여력이 안되었던 것도 그러한 측면에서 나올수 있는 말입니다. 물론 주현군의 병력을 볼때 한 지역에서 병력이나 물자를 차출하기에는 무리한 측면도 있습니다, 제대로 돌아갈때 양계를 제외하고 도를 기준으로 기껏해야 1만명 남짓이 가장 많은 축에 드는 상황에서 따르기는 무리한 것은 마찬가지일것입니다.

두서없이 잡설을 늘였는데 그렇습니다, 군사적으로 결코 모자라거나 과한것은 아닙니다만 조선에 비해 우월한것도 아니고 요나라나 송나라와 일전을 치룰만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요나라와의 전쟁을 치룬 직후에 삼국간에 균형이 생긴것은 군사적으로 우월한게 아니라 지리적으로 요나라와 송나라의 갈등과 대립에 있어 누구 하나 고려를 버릴수 없게 만드는 위치였기 때문으로 이 점에 있어 고려가 외교적으로 우를 범하지 않은 덕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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