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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조선에 잠들다.
게시물ID : humorstory_1226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루르뎅뎅
추천 : 2
조회수 : 26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6/08/02 13:51:21
나가거든 이라는 조수미씨 노래 뮤직비디오를 보고

허구가 많고 그렇다길래 그 뮤직비디오 보고 너무 슬퍼서

명성황후에 대해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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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경우보다도 일인들의 잔학성은 왕후를 시해하며 극에 달했다. 시해 현장에 있던 궁녀로부터 전해들은 왕태자의 말을 토대로 해서 앨런이 올니 국무장관에게 보낸 10월 10일자 보고와 4명의 증언을 토대로 주한 영국영사 힐리어가 북경주재 영국공사 오코너에게 보낸 10월 11일자보고 등은 시해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재연해주고 있다.

 

물론 다이, 사바틴, 현흥택 등 시위대 지휘관들도 궁궐내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인들에게 모두 감금당한 상태여서 시해하는 바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현장에서 가장 가깝게 있었다는 현흥택조차도 시해 후 왕후로 보이는 시신을 불태우는 현장만을 본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영사에게 증언한 4명 중에서 2명의 증언은 달랐다. 왕후가 일인들의 칼에 희생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궁녀를 위시해 그들의 칼에 희생된 왕후의 시신을 확인한 늙은 女侍醫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밖에 왕후로 보이는 시신을 목격한 시위대 장교 및 그 시신을 불태우는 장면을 목격한 궁중 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증언한 시해 현장의 참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가서 몇몇은 왕과 왕태자 및 그 측근 인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했다. 이에 궁궐 안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달려와서 위험을 알렸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살해범들이 들이닥치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한 일념에서 엉겁결에 두 팔을 벌려 왕후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무의식적인 보호 행위가 오히려 살해범들에게 그의 등뒤의 여인이 바로 왕후임을 알려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경직은 일인들의 칼에 양팔이 잘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이에 대해 낭인 히라야마는 훈련대 교관으로 일본 수비대 소속인 미야모토 소위가 먼저 권총을 발사해 쓰러뜨린 후 자기가 베어 살해했다고 자백하고 있다. 그리고 순간 왕후는 뜰 아래로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혀 쓰러졌고, 살해범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몇 차례나 거듭 칼로 찔렀다. 그리고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까지 살해했다.

 

그러나 누가 왕후를 직접 칼로 찔러 시해했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나까라고도 하고 어느 장교라고 하기도 한다. 두 명의 순사도 누군가를 살상한 혐의가 있다. 왕후의 얼굴을 모른 상태에서 저질렀기 때문에 누구의 소행인지 가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왕후의 침실까지 난입한 자로는 나카무라, 후지카쓰, 데라자키, 구니도모 등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등 군인이 있었다. 따라서 데라자키가 스즈키에게 보낸 편지에 '어느 친구의 말에 의하면 내가 죽인 자가 바로 왕비였다'고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일단은 데라자키에게 혐의를 둘 수밖에 없다.

(왕후가 시해된 시각은 , 다이에 따르면 5시15분 이후 6시까지 약 35~45분 사이이고, 일본 자료에 따르면 6시 10분에서 7시 직전이다. 왜냐하면 미우라가 공사관을 출발한 것이 6시 5분이고 궁궐에 도착(영미자료는 6시)해 7시에 왕과 대원군을 알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사관에서 왕궁까지의 거리로 보아 약 40분의 시간 여유가 있었으며 그 사이에 왕후가 시해되었을 것이고 이어 미우라의 사건 현장 확인까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왕후가 시해되자 여 시의가 앞으로 다가가서 손수건으로 죽은 왕후의 얼굴을 그렸다. 그러고 나서 시신이 숲 속에서 불태워졌고, 타고 남은 재를 일부는 땅에 묻고 나머지는 바로 옆의 향원지 또는 근처 우물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한편 낭인배들은 궁녀와 왕태자 이척에게 강압해 왕후의 시신을 재확인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이 있기 직전에 술에 취한 이들이 시신을 능욕하는 듯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궁 침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낭인배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한 뒤 기뻐 날뛰며 이 같은 천인공노할 짓서리를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야마베는 한일병합소사/1965)P119에서 '사체를 능룍했다'고 표현했으며, 나카쓰카 아키라도 '사체를 능욕하고 불태워버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최문형《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제 3장 민 왕후의 '인아거일'책과 일본정부의 왕후시해 14.일본인들의 궁궐 난입과 민 왕후 시해의 현장 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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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밑에 있는책.... 황태자비 납치사건...

소설책 보시고 그러지 마십시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서는 연구논문이나 전문서적이 있으므로 그런 것 들을 읽으셔야지 소설을 보고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은... 소설가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싫어해서 말입니다. 쓰레기 같은 역사소설책은 보지 마셨으면 합니다.)

(출처 : '명성황후가 진짜 강간 당했나요?'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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