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1일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시정연설을 했습니다. 정부 예산이 우리 경제의 현재 진단과 미래 전망에 기초하여 그 크기와 용처가 정해진다는 점에서 오늘 대통령 시정연설은 윤석열 정부의 현 시국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습니다. 한 마디로 윤석열 정부의 진단과 전망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렇기에 예산 증가율이 명목 GDP 성장률 전망치의 절반에 불과한 긴축 예산, 대-중소기업간, 소득 및 자산 계층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예산, 재정의 경기회복 역할을 실기하고 잠재성장률을 깎아 먹는 예산이 편성된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설은 우리 경제가 처한 대외 여건의 어려움으로 시작합니다. 저 역시 최근 들어 대외 여건이 더욱 힘들어진 상황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만, 윤석열 정부 들어 성장, 수출, 고용, 투자, 물가 등 거시지표로 확인되는 처참한 경제 실적을 모두 대외 여건에 돌릴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현 시점 경기를 ‘상저하고’에 따른 회복세로 진단합니다. 국민들이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경기 회복세를 도대체 어디서 발견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올해 10월 IMF는 한국의 잠재성장률과 실질성장률의 차이가 2022년 소폭 회복되었지만 2023년에 다시 마이너스로 떨어져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고 진단했습니다.
내년에는 더 나빠질 것이라고 합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올해 1년 내내 타령을 한 ‘상저하고’는 재정의 경제 역할을 적극적으로 찾기보다 경기가 알아서 회복해주기를 바라는 재정 보수주의자의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용어일 뿐입니다.
주요국들 모두 똑같이 어려운 대외 여건 하에서 유독 한국의 성장률이 더 크게 감소한 것을 대외 여건만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는 이미 지난해에 일어난 일입니다.
경기선행지수가 2022년 3분기까지 1년 넘게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다가오는 경기동향을 예측하는 경기 선행지수와 현재의 경기상태를 나타내는 동행지수 둘 다 확실한 경기 침체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 관리에 기본이 된 정부라면 이미 이때부터 재정을 통한 경기회복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미 실기했습니다.
사실 올해라도 재정 지출을 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역대급으로 낮은 지출 증가율을 건전재정 노력으로 자랑할 뿐입니다. 현 경제 상황에서 2.8% 지출 증가는 내년 4%대 명목 GDP 성장 전망치는 물론 올해 3%대 물가 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실질 GDP 성장에 대해 ‘안 해도 그만’이라는 수준의 긴축입니다.
대통령의 오늘 연설에서도 국민의 경제적 고통은 나몰라라 하는 재정 건전성 집착증이 어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정부의 총수입과 총지출의 차이는 0.6%에서 1.9%로, 여기서 사회보장성기금을 제외하고 계산한 관리재정수지는 올해 2.6%에서 내년 3.9%로, 국가부채율은 50.4%에서 51%로 악화될 예정입니다.
국유재산을 매각하고, 건전성 지표에 반영되지 않는 단기 채무를 대폭 늘려 지표를 관리하려 해도, 대규모 세입 결손에 따른 지표의 악화를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부터는 윤석열 정부 들어 단행한 대대적인 대기업·부자감세가 현실화됩니다.
2024년 예산서의 건전성 지표 전망치가 추가적으로 악화할 가능성도 큽니다. 윤석열 정부가 부자 감세와 건전 재정 중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제가 건전 재정 ‘집착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부의 건정성 지표 관리가 오히려 경제의 실제 건전성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지표 관리에 집중하면서 재정의 지속 가능성과 경기 대응 기능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국제 비교를 통한 우리나라 재정수지와 국가부채율 수준은 세계적으로 가장 양호한 상태입니다.
국가 부채율 50%는 주요 선진국들 평균의 절반 수준이고, 총채무에서 금융성 자산을 제외하고 산출하는 순채무율은 20% 초반으로 주요국들 평균 80% 초반대의 1/4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건전한 재정 지표를 더 건전하게 만들겠다는 망상적 집착이 아니라 잠재 성장률과 실질 성장률의 차이를 메우는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이란 뜻입니다. 2024년 예산안에서 건전 재정 집착증이 경제를 망치는 가장 중요한 사례는 내년에 16.6% 감액되는 R&D 예산입니다.
대통령은 국가 전략 산업에 대한 R&D 예산은 유지하고, 나머지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절감해 그 절감액을 ‘약자 복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귀에 일선의 연구기관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R&D 예산 삭감은 그 규모도 엄청나지만 내용에서도 산업 전략을 수행하는 정부 역할의 심각한 훼손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은 연구 인력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의 예산 삭감을 받았습니다.
정부의 산업 전략이 국가 경쟁력의 원천으로 부상한 시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산업 전략 역량의 핵심인 R&D 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하고 구조조정이니 약자 복지니 하는 말로 변명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다른 역점 사업 평가도 너무 비상식적이거나 자화자찬에 가깝습니다. 또한 정부 재정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국민연금 개혁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어지러울 정도로 나열한 모수 개혁 시나리오를 국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시나리오에는 현 시점에서 반드시 논의해야 할 연금의 지속 가능성과 보장성 강화를 위한 중장기적인 정부 재정 투입 방안은 빠져있습니다. 오로지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로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보수적인 관점의 숫자놀음일 뿐이며, 구조개혁을 해내겠다는 본인의 공약마저 뒤집은 입장일 뿐입니다.
필수 의료 시스템의 붕괴가 단지 의사 수의 증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대통령은 그것이 큰 성과인 양 자랑합니다. 붕괴한 의료 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양성부터 공공병원의 설립까지 의료 공공성를 대대적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재정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산서 어디에도 의료 시스템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재정의 확대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양대노총이 노조 운영 상황에 대한 회계공시에 동의했다고 자랑합니다.
모든 정부기구를 총동원한 압박을 통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말살하는 항복을 받아내고서 하는 자랑질입니다. 대통령실은 급기야 국제노동기구(ILO) 탈퇴까지 거론했습니다. ILO는 UN 산하기구로 UN 가입과 동시에 자동 가입되는 기구입니다. 차라리 UN 탈퇴를 시도하는 게 더 빠를 것입니다.
윤 대통령의 노동관은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 모든 사달은 대기업·부자들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아낌없는 퍼주기가 근원입니다. 5년 동안 70조원 규모의 부자감세를 하고 나서도 건전 재정을 하려면 긴축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산과 재정의 일방적인 대기업·부자 퍼주기를 감추기 위해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은 소외시킨 채 ‘윤석열식 약자 복지’ 지출을 눈꼽만큼 늘린 것이 2024년 예산입니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제출한 예산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2024년부터 국가경제는 부자감세 의한 세입 감소 – 재정 긴축 – 경제 추가 하락 – 세입 추가 감소라는 악순환의 덫에 본격적으로 빠져들 것이 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