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이십대 중반을 넘어간 사내자식들끼리 한잔 하다 보면 늦든 빠르든 언젠간 군대썰을 안주로 삼기 마련이다.
대학교 동기인 P와의 술자리에서도 그랬다.
우리는 누구의 군생활이 더 괴로웠는가에 대해 경쟁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간부들은 죄다 도둑놈들이라는 의견에 적극 공감했다. 자못 진지하게 국군의 미래와 발전방향에 대해 토론하기도했다.
즉 시시껄렁한 두 녀석이 노가리나 까고 있었다, 그 말이다.
화제는 군대에서 있었던 무서운 이야기들로 흘러, 난 주변 사람들에게서나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몇가지 괴담들, 이른바 '수류탄 할머니' '자살한 탈영병' 같은 것들을 마치 내가 보고 겪은 마냥 들려주었다.
P는 그다지 믿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곰곰히 듣고만 있었다.
어쩐지 진지한 얼굴로 잠자코 생각에 빠져있던 P가 입을 연 건 시간도 자정을 한참 지나 술집에 우리와 다른 한테이블만 남았을때였다.
니가 말한 것처럼 군대에 그런 썰이 이상할 정도로 많잖아. 진짜 뭔가 있기는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근데 난 군생활하면서 한번도 그런 걸, 나 말고 내 주변에서도 겪었다는 걸 들은 적이 없어.
너네 부대가 터가 좋은 자리에 있었었나보지. 뒤에 강이 흐르고 앞에 산이 있고... 아 반대던가?
아냐 그런건. 좋은 자리는 개뿔. 우리 부대에서도 사고가 여러번 있긴 있었어. 한번은 존나 미스터리한 그런 일도..
.... 근데 그게 귀신이나 그런 건 절대 아닌 것 같아. 그런 게 나오는 이야기가 아냐.
무슨 말인데.
그러니까 그게 말하자면 긴데,
P는 그렇게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P의 부대는 경기도 철원에 위치한 보병대대였다. 그 대대는 일정 주기로 근처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시설에 1개 중대를 따로 파견해 경계근무를 돕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른바 독립중대라는 것으로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해 겨울은 P의 중대의 차례였고 중대원 백여명은 대대에서 나와 독립중대 시설에서 따로 숙식하며 근무를 서게 되었다.
당연히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고 그 흔한 PX조차 없다. 그런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역시 100명의 중대원이 얼어죽지 않기 위한 난방을 제공하는 (철원의 겨울은 정말로 춥다고 P는 몇번이나 강조했다) 보일러 시설이다.
중대원의 목숨이 달려있는 보일러이니만큼 그걸 관리하는 관리병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컸다. 낮에 3번, 밤에 1번 보일러 시설을 점검하고 구동하는 대가로 모든 점호, 작업 및 일과에서 제외되었으며 나머지 시간은 전부 쓰고 싶은 대로 써도 좋으니 말이다.
소위 말하는 꿀보직이란 것이다. 이미 독립중대로 가기 전부터 보일러병 자리에 대한 경쟁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그 행운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모두 관심을 가졌다.
P의 부대에서 보일러병이 된 사람은 J병장이라는 인물이다. P는 이 J에 대해 약 이십분 가량 무시무시한 악담을 늘어놓았는데, 일일이 옮겨적지는 않겠다.
대강 요약하면 J는 후임을 괴롭히는 기본적인 미덕(?)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지위에 따른 행운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데에도 능했다.
...어느 부대에나 한 명쯤은 있는 흔한 개자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P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J가 언젠가 한번 거하게 엿을 먹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한다.
보일러병으로서의 J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쾌적했을 것이다. 그런J의 일과 중 유일하게 번거로운 것이라면, 딱 한번 00시에서 1시 사이 보일러실 물탱크에 가득찬 폐수를 배수하기 위해 펌프를 돌리러 가는 것이었다. 보일러실은 따뜻하고 시간을 보낼 잡지나 cd플레이어, 라면 따위의 것들도 충실히 구비되어 있었지만 어쨌든 자다 일어나는 건 짜증나는 일이다.
그날 J를 깨우는 막중한 중책을 가진 불침번은 P(당시 일병)였다. 유난히 평소보다 더욱 짜증을 내던 J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한다. 결국 연신 하품을 하며 터덜터덜 막사를 나서던 J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그제서야 P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바람이 몇번이나 막사 외벽에 부딫히며 살벌한 소리를 자아낸다. 영하 10도에 가까운 날씨라 막사 안에 있어도 따뜻하게 껴입지 않으면 춥다. 막사 안에서 추위와, 졸음과 싸우며 교대시간을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P는 문득 평소와 달리 J가 늦게 돌아온다는 생각을 한다. 대개 늦어도 불침번 교대시간 이전에는 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J가 누구의 간섭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고 싶을 때 오겠거니 생각한다.
P! P! 2소대장님 깨워!
P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K상병에게 업혀 돌아온 J는 거의 시체나 다름없었다.
입술은 죄 터지고 한쪽 손은 손가락 몇개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있었으며, 무엇보다 거의 하얗다 못해 표백된 듯한 얼굴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난로 앞에서 졸던 당직사관 2소대장도 놀라 일어났다.
K는 S이병과 탄약고 근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중 얼음 빙판에 넘어져 덜덜 떨던 J를 발견했다고 한다. 자세한 도면을 첨부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나도 P의 말을 듣고 옮기는 거니 구체적인 걸 알리가 없으니. 대강 막사에서 나와 보일러실로 가는 30m 정도의 뒷길이 있고, J는 매일같이 이길을 지났기 때문에 캄캄히 어두워도 개의치않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영하의 날씨의 탓으로 빙판이 길 중간에 얼어있었고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너무도 고통스러우면 소리칠 기력조차 사라진다. 그저 신음할뿐. 이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J는 그 때 넘어져 오른쪽 손가락 세개, 오른쪽 쇄골이 부러졌다. 움직이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 그 상황에서 한시간 반 동안 추위 속에서 떤 것이다.
... 만약 근무를 끝나고 복귀하던 K와 S가 불현듯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막사 뒤쪽을 확인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미스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빙판이 어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 정확히 그 지점에, P가 매일 같이 지나는 그 길에 언 것일까? 첨언하자면 그날 막사 주변에 얼음이 언 것은 오직 그 곳뿐이었다.
이것은 중대 간부들도 이상하게 생각한 듯하며, 직접적으로 말은 안꺼냈지만 그날 근무를 섰던 불침번 및 탄약고 근무자들을 한 명 한 명 불러 면담을 한 모양이다.
허나 P는 물론 K와 S도 다른 근무자들도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들이며 모두들 막사 밖을 거니는 수상한 배회자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고는 그렇게 미궁으로 빠지는가 싶었지만... 그 주변에 이전부터 간혹 하수도에서 누수가 일어나 물이 흘러나오는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여럿 있었고, 이는 간부들도 몇 번 확인한 일이었다.
따라서 혹한기 누수에 의한 비전투손실 사례의 한 경우로 그렇게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중대의 병사들은 대체로 쌤통이다 이자식아, 같은 분위기였다. 역시 다들 한편으로 이상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 중 부대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처음 나와 꽤 지지를 받는 으스스한 가설이 있다.
이전부터 오만불손한 인물이었던 J가 상병일 적 소대원과 독립중대 근처 야산에 작업을 나온 적이 있다. 진지를 보수하는 작업이었는데, 작업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그날따라 안개비가 종일 내리고 무엇보다 이름없는 무덤 한 개가 작업현장을 굽어보는 듯 중턱 위에 자리잡아 분위기가 참으로 심란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딱히 오컬트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알게 모르게 조심하는 태도가 된다. 그러나 J는 그 분위기 자체를 우습게 여긴 모양으로, ...
이 시점에서 나는 P의 말을 끊고 태클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잠깐만 , 니가 니입으로 귀신이니 그런 건 나오지 않는다 그러지 않았냐. 어째 흐름이 묘하게.. 무슨 전설의 고향처럼 된다?
그래 임마. 그냥 이건 그 때 우리 부대에서 부대원들 사이에서 이런 괴이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워낙 이상한 일이니까 무덤이니 뭐니 하면서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