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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12.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게시물ID : history_122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7
조회수 : 58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0/25 18:51:48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일전에 노자.한비자열전때에도 그랬는데 또 학자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사마천은 학자들을 존중하여 자꾸 그들의 이야기를 썼는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이 중니제자열전 을 마치면 나중에 맹자.순자 이야기가 또 나올것이니 이제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사마천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전번에 노자.한비자열전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구름속에 가리운 달빛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대학자들의 자취를 소개하는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또한 의미없는 일은 아닐것이기때문에
이에 중니제자열전을 서술하여 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중니제자열전은 그나마 노자.한비자 때보다는 훨씬 학문적인 부분이 적다.
그저 공자의 제자들을 소개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했고 그중 몇명 유명한 제자들의 일화를 소개하는것이   대부분이니  그나마 필자에게는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렇지만 이 중니제자열전에는 공자보다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이들을 이끄는 공자의 이야기는 의외로 조금밖에 소개가 되지 않고 있다.
 
공자처럼 훌륭한 학자가 어찌 열전에도 이름을 못올렸는가?
그 이유는 공자를 정말 지극한 성인(至聖)으로 여긴 사마천이 그를 일반인들이 나오는 열전따위에 올릴수 없다 생각하여 그를 따로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기술한 때문이다.
 
필자가 나중에 이 사기열전을 모두 마친이후에 사기의 세가(世家)편을 다룰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적어도 2~3년 이후의 일일것이요 지금으로서는 기약도 할수 없는 일일테니
공자를 소개할수있는 기회를 얻기엔 너무도 긴시간이 걸릴듯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이번에 제자열전을 하는김에 제자들과 더불어 공자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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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문여빈승사여제(出門如賓承事如祭)
 
춘추시대의 대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들을 다룬 이야기가 중니제자열전 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의 키는 9척6촌(2m 10cm)이나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숙량흘 이고 어머니는 안징재 라고 하였다.
아버지 숙량흘은 노나라의 무서운 장수이고 어머니는 무당이거나 시체에 화장을 해주는 집안의 딸이었다(도올선생 추정)
 
숙량흘과 안씨녀는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이구산에서 기도하여 공자를 낳았기때문에 이름을 구 라고 지었으며 나중에 중니 라는 자 를 지은것도 그때문이다.
또한 머리 중앙이 쑥 들어가고 주위가 불쑥 솟아있어 구(丘)라는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필자가 공자를 보고 자꾸 공짱구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서부터 항상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고 놀았는데 그것이 예에 벗어나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자는 가난했고 신분도 천했다.
그는 젊을때 창고관리인으로 일했는데 그의 말(斗)질은 매우 공평했다.
또 목축관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가 기르는 육축들은 매우 잘 번식했다고한다.
공자는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각나라의 군주들과 정치에대해 이야기 했지만 등용되지는 않았다.그것은 그의 뜻이 너무 컸기때문이다.
그는 제나라에 가서 제나라경공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때 제경공이 그에게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제나라 정승 안영이 반대하였다.
"유자들은 말뿐이며 그것을 법으로 삼을수가 없습니다.또 오만불손 하기때문에 신하로 쓸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장례식에 대해 너무 까다로와서 파산하면서까지 후하게 지내니 그것을 풍습으로 삼을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각국으로 재물이나 구걸하러 다니는 무리들이니 국정을 맡길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옷차림은 어떻고 상하의 예절은 어떠하며 보행법은 어떠하다는등 번잡하기만 합니다.
그 복잡하기가 몇세대가 흘러도 알수 없고 현실적으로 실천할수도 없으니 그를 등용하려다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하게 될것입니다."
안영이 이리 반대했어도 제경공은 그를 등용하려했다.
그러나 제나라 대부들의 반발이 심해 심지어는 공자를 죽이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결국 제경공은 "나는 늙었소.그대를 등용할수 없겠구려."
라고 하며 그의 등용을 포기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잠시 벼슬을 하였으나 노나라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서로 권력을 다투는것을 보고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학문연구에 몰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열중하였다.
그후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중도라는 곳의 읍재로 삼았다.
1년이 지나자 사방에서 공자를 본받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래서 공자는 사공 으로 영전되고 다시 대사구
(법무장관)까지 올랐다.
공자가 정치를 맡게 되면서 노나라는 평안하고 잘 다스려졌다.
노나라가 강성해지는걸 두려워한 제나라는 노나라를 정치적으로 혼란해지게 하기위해
노나라 군주에게 미녀 80명과 장식한 말 백여마리를 보냈다.
노나라 정공은 그것에 현혹되어 정사를 게을리하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임금이 저지경이니 선생님께서는 사직하셔야 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공자는
"얼마후면 교외에서 교제를 지낼것이니 그날 군주가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눠주기만 한다면 아직 희망은 있는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한편 노나라 군신들은 제나라의 선물에 미혹되어 사흘동안이나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결국 교제 날에도 제사를 지낸후 그 제삿고기역시 대부들에게 나눠주지 않았다.
공자는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시골로 떠나버렸다.
 
공자는 위나라로 가서 위령공의 신하로 벼슬을 하였는데 얼마안가서 위나라의 신하들이 공자를 참소하여 결국 10개월만에 위나라를 떠났다.
 
공자가 여기저기 떠돌다가 정나라에 들어갔을때 공자는 본의아니게  제자들과 떨어져서 홀로 성곽밑에 우두커니 서있게 되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여기저기 찾아 수소문 하는데 한 행인이 일러주었다.
"그가 당신의 스승인지는 모르지만 동쪽 성문앞에서 괴상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어찌 생겼습니까?"
"이마는 요임금을 닮았고,목덜미는 순임금때의 현인 고요 를 닮았으며,어깨는 정나라 명재상 자산 을 닮았더군요.
키는 우임금보다 세치정도가 모자랐는데 그나저나 그 처량한신세가 꼭 상갓집 개와 같습디다."
자공은 그가 틀림없이 자기의 스승인 공자일것을 짐작하고 동문으로 가서 스승을 찾았다.
나중에 공자를 만나 행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공자는 크게 웃고 말하였다.
"용모와 자태에 관한것은 잘 모르겠으나 상갓집 개와 같더라는 말은 맞는듯 하구나." 
그리하여 자공을 비롯한 모든 제자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여 춘추'라는 책을 짓고 각종 시와 음악을 정리하였다.
그러다가 노나라 애공 14년에 사냥터에 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기린 이었다.
공자는 그것을 "성인의 세상에서나 나타나는 어진 짐승이다" 라고 하였는데 숙손씨의 무리들이 그것을 때려 죽였다.
그것을 본 공자는 
"나의 도는 끝장이란 말인가!" 라고 하며 크게 절망하여 저술하고 있던 춘추를 절필 하였다.
 
공자는 73세의 나이로 노나라 애공 16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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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는 약 삼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그중에서 육예(시詩.서書.역易.예禮.악樂.춘추春秋)에
능통한자가 70여명인데 모두가 재능에 특출한 선비들이었다.
공자가 말했다.
"덕행에는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 이 있고
정사에는 염유.계로 가 있고
변론에는 재아.자공 이 있고
문학에는 자유.자하가 있다.
 
자장은 편벽되고.증삼은 둔하고.시 는 우직하고.자로는 거칠고 안회는 쌀뒤주가 자주 비었다.
자공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재산을 축적했으나 그의 판단은 자주 도리에 적중했다."
 
안회 는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는 안회를 이렇게 비평했다.
"한그릇의 밥과 한쪽박의 물(일단사일표음 [一簞食一瓢飮] ) 로 주림을 참으면서 누추한 뒷골목에 살고있지만 그는 그 근심을 이겨낸다.
다른사람이라면 참아낼수 없을것이다."
또 이렇게도 평하였다.
"회는 등용되면 소신껏 도를 실천할것이고 등용되지 않으면 숨어서 홀로 도를 즐길것이니 그렇게 할수있는 사람은 아마도 회 밖에 없을것이다."
 
그러나 안회는 29세에 머리가 하얗게 희어지더니 죽고 말았다.
공자는 매우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민손의 자 는 자건이라 했다.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효성이 지극한 자건이여 너의 효성을 아무리 칭찬해도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것이다."
민자건은 권력있는 대부들이 벼슬을 주려했어도 모두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염경의 자는 백우 이다.
공자는 항상 그의 덕행을 칭찬했다.
백우는 불행이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
공자는 "이것이 천명인가? 이토록 아까운 인물이 이런병에 걸리다니!" 라고 하며 통탄해 마지않았다.
 
염옹 의 자는 중궁 이다.
중궁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집을 나서서 남을 대할때는 소중한 귀빈을 만난것처럼 대하고
백성을 부리는 위치에 서거든 마치 중요한 제사를 드릴때처럼 신중하게 하라"
*출문여빈 승사여제(出門如賓 承事如祭)
)
공자는 중궁의 덕행을 매우 아꼈다.
 
중유의 자는 자로 이다.
자로는 성격이 거칠고 용맹했으며 고집이 세었다.
심지어 공자에게도 행패를 부릴정도로 포악했다.
그러나 공자는 예의를 다해 그를 조금씩조금씩 이끌었으므로 결국 그는 예물을 바치며 공자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자로는 하나를 배우면 그것을 실천하기전에는 다른것을 말하기를 꺼려했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벼슬을 했는데 어느날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위나라의 출공이 노나라로 달아나게 되었다.
자로는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억지로 성문을 열고 들어가서 새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괴외에게 소리를 질렀다.
"역적 공회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그 역적을 죽이겠습니다."
그러나 공회의 덕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괴외는 오히려 자로를 꾸짖었고
이에 대로한 자로는 괴외와 공회가 있는 대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괴외의 부하들이 달려들어 한바탕 칼싸움이 벌어졌는데
자로가 혼자 여럿을 상대하려니 중과부적이었다.
그때 상대의 칼끝에 자로의 갓끈이 끊어졌다.
"잠깐 기다려라.군자는 죽을때도 갓을 벗지 않는다"
자로는 갓끈을 고쳐매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자로가 죽을것을 예상했다.
그것은 자로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때문이었다.
공자는 자로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자로가 내 문하에 들어온후 나를 비방하는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증삼 의 자는 자여 이다 공자는 그가 효에 통달할수 있는 제자라고 생각하고 그를 더욱 지도하여
효경(孝經)을 저술하게 하였다.
 
유약은 공자보다 13세 연하 였다.
공자가 죽은뒤에 제작들이 공자를 몹시 그리워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서로 의논해서 공자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은 유약을 내세워 스승으로 섬겼다.
조화와 절제를 강조하고 신의(信義)를 가르쳤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유약이 공자만 훨씬 못하다는것을 알게 됐다.
제자들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에대해 유약에게 물었지만 유약은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유자여 어서 물러나시오.그곳은 당신이 앉아있을 자리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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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명의 유명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본문에 나온 인물을 다 소개하지는 못했다.
이들과 함께 이름과 나이가 알려진 제자들이 도합 35명인데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것과 문답을 나눈것이 기록에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42명은 나이도 분명치 않고 기록에서 찾아볼수도 없어서
사마천이 이름만 기록해둔것이 있다.
사기열전 본문에는 그들의 이름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냥 두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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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이 열전의 끝머리에 이렇게 평하였다.
 
"세상의 학자들이 흔히 공문(孔門)의 70여제자들을 칭찬하는 가운데 실제 이상으로 기리는쪽도 있고 역시 실제 이하로 비방하기도 한다.
양쪽 모두 그들의 참모습은 보지 못한것 같다.
제자들의 명부는 공씨의 벽 가운데서 나온 고문(고대체의 문자)에 의한것이니 거의 틀림 없을것이다.
나는 공자 제자들의 이름과 대화를 모두 논어에 실린 제자와의 문답에서 뽑아 차례로 엮었으며 의심나는것은 여기에 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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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거론한 제자들중에 필자가 빼놓은 한명의 제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자공인데 이 열전에 나온 제자들의 이야기중에 가장 길어서 오히려
자공의 열전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열전의 주인공이 자공이라 생각하고
이제 공자의 제자중에서 가장 유명한 자공 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단목사 의 자 는 자공 이다.
그는 위나라 사람이었다.
자공은 변설이 교묘했다 그래서 공자는 항상 그의 말재주를 꾸짖었다.
어느날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어찌 안회와 비교하겠습니까?"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밖에 모릅니다."
 
어느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는 어떤 인간입니까?"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종묘의 큰 제사에 사용하는 최상품의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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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에서는 대부 전상 이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제나라 대부들인 4성(고.국.포.안)의 사람들이 이를 꺼려했다.
 
이때 제나라의 남쪽에 오나라가 있어 그즈음 급격히 국력이 신장하여 제나라를 위협하였다.
오나라는 서쪽의 초나라를 무찌르고 다시 노나라와 힘을 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제나라에 많은 예물을 받고 귀국하였다.
오나라와 노나라에게 공격을 받은 제나라는 그 후에 원한을 풀기 위하여 오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때에 공자는 "노나라는 우리 조상의 무덤이 있는 나라이니 이대로 둘수 없다" 하여 제자들중에 언변이 뛰어난 사람을 제나라로 보내 제나라 대부 전상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때에 발탁된것이 제자 자공 이었다.
 
자공은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뛰어난 언변과 인맥등으로 천하에 이름이 높았다.
자공은 제나라로 가서 대부 전상을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그대가 노나라를 치려는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노나라는 치기에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노나라는 성벽이 낮으며 주변의 연못은 좁고 얕으며 임금은 우매하고 대신들은 무능하며 백성들은 전쟁을 두려워 합니다. 이런 나라는 싸울 상대가 못됩니다.
그러니 차라리 싸우려면 오나라와 싸우십시오
오나라는 성이 높고 두터우며 연못은 깊고 넓으며 갑옷은 견고하고 무기는 예리하며 정예병은 강하고 신하들은 현명하니 이것이 훨씬 치기 쉽습니다."
전상은 그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쉽다는것은 어려운것이고 어렵다는것은 쉬운것이니 그대는 지금 제정신인가?"
전상이 화를 내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근심이 국내에 있을때는 강한 적을 치고 근심이 국외에 있을때는 약한 적을 치는법입니다.
대부의 근심은 지금 국내에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전상은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자공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가 노나라를 쳐서 쉽게 이기면 노나라는 간단히 무너지겠지만 그대는 다른 대부들의 견제를 받게 될것이니 그대의 국내에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강한 오나라를 쳐서 전쟁에 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원망을 돌려 다른 대부들의 힘을 약화 시키고 임금을 고립시켜 당신의 권세를 크게 높일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위한 만전지책이 될것입니다."
 
전상이 그 말을 알아듣고 다시 묻는다.
"그러나 이미 우리군사가 노나라를 치러 떠났으니 한번 떠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방향을 바꾸게 하면
다른 대부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대부께서는 오나라가 쳐들어 온다는 말을 퍼뜨리고 군대를 한동안만 붙잡아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사이 제가 오나라로 가서 오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자연스럽게 오나라와 싸우면 됩니다."
 
그리하여 전상은 오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노나라를 치러 가던 군대를 그자리에 머물러 대기하게 하였다.
 
한편 서둘러 오나라로 떠난 자공은 오왕을 만나 이렇게 설득하였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두 나라가 합세하여 오나라로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오나라에 큰 걱정이 될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제나라를 치고 노나라를 구해서 노나라가 오나라의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왕은 제나라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오나라의 속국인 월나라가 쳐들어올것이 두려워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자공은 다시 설득한다.
"왕께서 혹시 월나라가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월나라로 가서 그들이 감히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할것이며 또한 월나라의 군사까지 빌어 오겠습니다.
그러면 군사가 부족한 월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지 못할것이며 만약 군사를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때에 
월나라를 치면 될것입니다."
오왕은 크게 기뻐하며 자공을 월나라로 전송하였다.
 
자공이 월나라에 도착하자 월왕은 도로를 청소하고 교외까지 나와서 몸소 자기의 마차에 자공을 태워 궁으로 영접했다.
 
월왕과 함께 궁으로 들어간 자공은 월왕에게 설명했다.
"지금 제가 오왕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치도록 하였더니 오왕은 "월나라가 걱정되어 그럴수 없으니 우선 먼저 월나라부터 쳐서 패망 시킨후에 제나라를 치겠다" 고 합니다.
깜짝 놀란 월왕은 자공에게 계책을 묻는다.
이에 자공이 월왕에게 설명 했다.
"자고로 남을 공격할 뜻이 없는데도 남에게 의심받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또 설령 남을 공격할 뜻이 있더라도 그 일을 성공하기 전에 이쪽의 계락이 새나가는것 역시 매우 서투른 짓입니다.
그러니 지금 오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할것이라면 차라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오왕을 돕겠다고 말하고 의심을 벗는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만약 오나라가 제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월왕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일것이며
혹시 오나라가 이기더라도 오왕은 그 여세를 몰아 진(晉)나라로 또 공격해 들어갈 것이니 오나라는 더욱 피폐해 질것입니다.
바로 이순간이 왕께서 오나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것입니다."
이에 월왕은 크게 기뻐하고 자공에게 큰 예물을 주었으나 자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자공은 다시 오왕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보고했다.
"월나라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군대의 선봉에서서 적군의 화살과 돌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에 오왕은 크게 감격하여 월왕의 청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공이 말리며 간하기를
"남의 나라군대를 불러쓰면서 그나라 군주까지 종군케 하는것은 의가 아니니 대왕께서는 월나라의 군대와 선물만 받으시고 월왕의 종군은 사양하십시오."
라고 하여 오왕이 자공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오왕을 설득한 자공은 다시 오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향했다.
진왕을 만난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려하는데 만일 오나라가 진다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칠것이지만
만약 오나라가 이긴다면 오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로 쳐들어올 계획입니다."
진왕은 두려워 하며 자공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병력을 정비하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공은 진나라 왕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고 노나라로 돌아가 스승인 공자에게 기나긴 순방의 내용을 보고하였다.
 
과연 오나라는 애릉땅에서 제나라군대와 만나 크게 이겼다.
오왕은 제나라의 일곱 장군을 사로잡고도 회군하지 않고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는 자공의 계책을 받아들여 튼튼하게 준비하고 있었기때문에 황지땅에서 오나라 군사를 만나
어렵지 않게 오군을 대파해 버렸다.
 
월나라왕은 이 소식을 듣고 양자강을 건너 오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오나라 수도 70리 밖에 진을 쳤다.
 
오왕은 크게 놀라 급히 진나라를 버려두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나 오호 가에서 월나라와 크게 세번 싸웠으나 모두 지고 결국 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월왕은 오왕 부차를 죽이고 재상 백비의 목도 베어버렸다.
월나라는 3년만에 동방의 패자가 되었다.
 
자공은 한번 나서서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어지럽혔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월나라를 동방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자공이 한번 뛰어다니더니천하의 형세에 균열을 일으켜 10년사이에 다섯 나라(노魯.제齊.진晉.오吳.월越)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자공은 장사에도 매우 뛰어나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하여 공자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는 공자학단의 실질적인 스폰서였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공자대학의 이사장격이라 할수 있겠다.
자공은 남의 장점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으나 결점을 보면 단호하게 지적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었으며 집안에는 천금의 재산을 쌓아두었다.
그는 제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상 공자의 제자들을 소개한 글을 살펴 보았다.
사기열전 본문에 이름이 오르고 그 일화가 소개 되었으면서도 필자의 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몇몇 제자가 있다.
그러나 대충 우리가 익히 들어본 이름들은 모두 기술하였다.
공자는 이처럼 뛰어난 제자들을 거느리고 학문을 연구하였으나 세상에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놀지 않는다" 는 말과 같이 혼탁한 세상이 그의 큰 이상을 현실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까닭인듯 하다.
그러나 공자는 이처럼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해내고 또 그중에서 아주 유능하고 걸출한 제자를 키워 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그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덕을 10여대에 전하고 학자들은 공자를 종주로 받들고 있다.
천자 제후는 물론 중국의 육례를 논하는이는 모두 공자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지성(至聖)이라 할만하다.
공자는 사후에 먼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봉해졌고
그리하여 일개 서생이 열전이 아닌 왕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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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거늘 필자는 왜 저리도 이름높은 대성 공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우선은 그가 주창한 학문은 거의 인의와 예절에 관한것이 대부분이다.
인(仁)이라 하는것이 깊이 파고들면 여러 뜻이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어질다' 하는 뜻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사대주의와 봉건사상의 바탕에 깊이 자리한 고루한 사상에 다름 아니다.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다고 따져야 할것이지 어찌 그저 어진 웃음만 허허 웃으며
참고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근래의 독재시대에 위정자들이 지고지선의 덕목으로 가르쳐온 복종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으니
권력이 폭거를 일삼더라도 나랏님 하시는 일에 가타부타 떠들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높은 양반들을 이해해줘야하는 덕목으로 머릿속에 박혀서 드디어는 국민 스스로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거대권력에는 항거하는것이 아니고 굴종해야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놓고 말았다.
거기에 예(禮)가 달라붙으니 이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윗사람의 말에 따라야 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으로 자리하고 말았다.
물론 어른을 존경하는것이 아름다운 일이며 앞으로도 이어져야할 미풍양속인것은 분명하다.
그러하나 세상의 모든일이 어른들의 뜻대로만 이어지는것은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아직 미숙한 신세대를 착취해먹는 한 방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수 없다.
또한 자원이 부족하고 가진것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권력과 재산을 한쪽으로 집중하기 위하여
여성을 차별하고 어린사람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것이 유학이라고 생각한다.
저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소수 양반세력과 왕족및 귀족들이 독점하고 누려온 특권이 유교에 뿌리한 선민사상이며
그 나머지 대다수의 민초는 되지도 않는 유학사상때문에 핍박받고 짓눌려도 항거한번 하지 못하고 숨죽여지내야 했으니 이것이 과연 동양의 자랑스런 사상이요 철학이란 말인가?
저 공구의 잘못된 입놀림에 이천여년간 억압된 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피는 누가 보상할것인가?
하기야 모든 군주론이나 정치사상이란것이 기득권층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재단하고 수정하여 온것이니 굳이 공구만 나무랄 일은 아니기는 하나 그래도 지금 우리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이 바로 이 공구의 사상이니 이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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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 다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장강후랑 추전랑.일대신인 환구인長江後浪推前浪, 一代新人換舊人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 새로 나타난 사람은 머뭇거리던 예전 사람을 쫓아낸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고사를 뒤로 물리고 나타난 사람이 있으니 이는 바로 유신의 딸이 유신의 막내에게 나랏일을 맡기는 참으로 상상도 할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거리의 시위 현장에는 일당을 받으려는 것인지 구국의 일념으로 나온것인지 모를 추레한 노인들이 득실거린다.
새 세대는 그저 그들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신세로 파괴되고 말아야 하는가?
이제 슬슬 젊은 시절을 보내고 구세대의 길로 접어들고있는 필자는 한참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잠을 이룰수가 없다.
구시대의 낡고 썪은 사상은 접어두고 뒷물결이 앞의 썪은 물을 밀어내 주기만을 바란다면
이또한 뒷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것은 아닌지....
 
공구의 유학사상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수만은 없다.
단지 그것을 이용하는 위정자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것만을 강조하고 왜곡한데서 벌어진 참사일뿐.
이제 서릿발처럼 매서운 눈을 가진 새 학자가 나타나서 위정자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한 공구의 학문을
새로이 밝혀줄 날을 기다려본다.
자공은 제나라로 가서 대부 전상을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그대가 노나라를 치려는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노나라는 치기에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노나라는 성벽이 낮으며 주변의 연못은 좁고 얕으며 임금은 우매하고 대신들은 무능하며 백성들은 전쟁을 두려워 합니다. 이런 나라는 싸울 상대가 못됩니다.
그러니 차라리 싸우려면 오나라와 싸우십시오
오나라는 성이 높고 두터우며 연못은 깊고 넓으며 갑옷은 견고하고 무기는 예리하며 정예병은 강하고 신하들은 현명하니 이것이 훨씬 치기 쉽습니다."
전상은 그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하였다.
"당신이 말하는 쉽다는것은 어려운것이고 어렵다는것은 쉬운것이니 그대는 지금 제정신인가?"
전상이 화를 내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근심이 국내에 있을때는 강한 적을 치고 근심이 국외에 있을때는 약한 적을 치는법입니다.
대부의 근심은 지금 국내에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전상은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자공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가 노나라를 쳐서 쉽게 이기면 노나라는 간단히 무너지겠지만 그대는 다른 대부들의 견제를 받게 될것이니 그대의 국내에서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강한 오나라를 쳐서 전쟁에 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원망을 돌려 다른 대부들의 힘을 약화 시키고 임금을 고립시켜 당신의 권세를 크게 높일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위한 만전지책이 될것입니다."
 
전상이 그 말을 알아듣고 다시 묻는다.
"그러나 이미 우리군사가 노나라를 치러 떠났으니 한번 떠난 군대를 돌려 오나라로 방향을 바꾸게 하면
다른 대부들이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대부께서는 오나라가 쳐들어 온다는 말을 퍼뜨리고 군대를 한동안만 붙잡아 놓으십시오. 그러면 그사이 제가 오나라로 가서 오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자연스럽게 오나라와 싸우면 됩니다."
 
그리하여 전상은 오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노나라를 치러 가던 군대를 그자리에 머물러 대기하게 하였다.
 
한편 서둘러 오나라로 떠난 자공은 오왕을 만나 이렇게 설득하였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두 나라가 합세하여 오나라로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오나라에 큰 걱정이 될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제나라를 치고 노나라를 구해서 노나라가 오나라의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왕은 제나라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오나라의 속국인 월나라가 쳐들어올것이 두려워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자공은 다시 설득한다.
"왕께서 혹시 월나라가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월나라로 가서 그들이 감히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할것이며 또한 월나라의 군사까지 빌어 오겠습니다.
그러면 군사가 부족한 월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지 못할것이며 만약 군사를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때에 
월나라를 치면 될것입니다."
오왕은 크게 기뻐하며 자공을 월나라로 전송하였다.
 
자공이 월나라에 도착하자 월왕은 도로를 청소하고 교외까지 나와서 몸소 자기의 마차에 자공을 태워 궁으로 영접했다.
 
월왕과 함께 궁으로 들어간 자공은 월왕에게 설명했다.
"지금 제가 오왕을 설득하여 제나라를 치도록 하였더니 오왕은 "월나라가 걱정되어 그럴수 없으니 우선 먼저 월나라부터 쳐서 패망 시킨후에 제나라를 치겠다" 고 합니다.
깜짝 놀란 월왕은 자공에게 계책을 묻는다.
이에 자공이 월왕에게 설명 했다.
"자고로 남을 공격할 뜻이 없는데도 남에게 의심받는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또 설령 남을 공격할 뜻이 있더라도 그 일을 성공하기 전에 이쪽의 계락이 새나가는것 역시 매우 서투른 짓입니다.
그러니 지금 오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할것이라면 차라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오왕을 돕겠다고 말하고 의심을 벗는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만약 오나라가 제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월왕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일것이며
혹시 오나라가 이기더라도 오왕은 그 여세를 몰아 진(晉)나라로 또 공격해 들어갈 것이니 오나라는 더욱 피폐해 질것입니다.
바로 이순간이 왕께서 오나라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것입니다."
이에 월왕은 크게 기뻐하고 자공에게 큰 예물을 주었으나 자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자공은 다시 오왕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보고했다.
"월나라왕은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군대의 선봉에서서 적군의 화살과 돌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에 오왕은 크게 감격하여 월왕의 청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공이 말리며 간하기를
"남의 나라군대를 불러쓰면서 그나라 군주까지 종군케 하는것은 의가 아니니 대왕께서는 월나라의 군대와 선물만 받으시고 월왕의 종군은 사양하십시오."
라고 하여 오왕이 자공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오왕을 설득한 자공은 다시 오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향했다.
진왕을 만난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오나라가 제나라를 치려하는데 만일 오나라가 진다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칠것이지만
만약 오나라가 이긴다면 오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로 쳐들어올 계획입니다."
진왕은 두려워 하며 자공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병력을 정비하고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공은 진나라 왕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고 노나라로 돌아가 스승인 공자에게 기나긴 순방의 내용을 보고하였다.
 
과연 오나라는 애릉땅에서 제나라군대와 만나 크게 이겼다.
오왕은 제나라의 일곱 장군을 사로잡고도 회군하지 않고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는 자공의 계책을 받아들여 튼튼하게 준비하고 있었기때문에 황지땅에서 오나라 군사를 만나
어렵지 않게 오군을 대파해 버렸다.
 
월나라왕은 이 소식을 듣고 양자강을 건너 오나라를 쳤다.
그리하여 오나라 수도 70리 밖에 진을 쳤다.
 
오왕은 크게 놀라 급히 진나라를 버려두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나 오호 가에서 월나라와 크게 세번 싸웠으나 모두 지고 결국 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월왕은 오왕 부차를 죽이고 재상 백비의 목도 베어버렸다.
월나라는 3년만에 동방의 패자가 되었다.
 
자공은 한번 나서서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어지럽혔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월나라를 동방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자공이 한번 뛰어다니더니천하의 형세에 균열을 일으켜 10년사이에 다섯 나라(노魯.제齊.진晉.오吳.월越)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자공은 장사에도 매우 뛰어나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리하여 공자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그는 공자학단의 실질적인 스폰서였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공자대학의 이사장격이라 할수 있겠다.
자공은 남의 장점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으나 결점을 보면 단호하게 지적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었으며 집안에는 천금의 재산을 쌓아두었다.
그는 제나라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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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공자의 제자들을 소개한 글을 살펴 보았다.
사기열전 본문에 이름이 오르고 그 일화가 소개 되었으면서도 필자의 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몇몇 제자가 있다.
그러나 대충 우리가 익히 들어본 이름들은 모두 기술하였다.
공자는 이처럼 뛰어난 제자들을 거느리고 학문을 연구하였으나 세상에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물이 너무 깨끗하면 고기가 놀지 않는다" 는 말과 같이 혼탁한 세상이 그의 큰 이상을 현실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까닭인듯 하다.
그러나 공자는 이처럼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해내고 또 그중에서 아주 유능하고 걸출한 제자를 키워 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그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덕을 10여대에 전하고 학자들은 공자를 종주로 받들고 있다.
천자 제후는 물론 중국의 육례를 논하는이는 모두 공자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지성(至聖)이라 할만하다.
공자는 사후에 먼 후세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봉해졌고
그리하여 일개 서생이 열전이 아닌 왕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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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거늘 필자는 왜 저리도 이름높은 대성 공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우선은 그가 주창한 학문은 거의 인의와 예절에 관한것이 대부분이다.
인(仁)이라 하는것이 깊이 파고들면 여러 뜻이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어질다' 하는 뜻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사대주의와 봉건사상의 바탕에 깊이 자리한 고루한 사상에 다름 아니다.
잘못되었으면 잘못되었다고 따져야 할것이지 어찌 그저 어진 웃음만 허허 웃으며
참고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근래의 독재시대에 위정자들이 지고지선의 덕목으로 가르쳐온 복종의 사상의 뿌리가 되었으니
권력이 폭거를 일삼더라도 나랏님 하시는 일에 가타부타 떠들지 말고 넓은 마음으로 높은 양반들을 이해해줘야하는 덕목으로 머릿속에 박혀서 드디어는 국민 스스로 노예근성에 사로잡혀 거대권력에는 항거하는것이 아니고 굴종해야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놓고 말았다.
거기에 예(禮)가 달라붙으니 이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윗사람의 말에 따라야 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으로 자리하고 말았다.
물론 어른을 존경하는것이 아름다운 일이며 앞으로도 이어져야할 미풍양속인것은 분명하다.
그러하나 세상의 모든일이 어른들의 뜻대로만 이어지는것은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아직 미숙한 신세대를 착취해먹는 한 방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수 없다.
또한 자원이 부족하고 가진것이 많지 않은 사회에서 권력과 재산을 한쪽으로 집중하기 위하여
여성을 차별하고 어린사람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것이 유학이라고 생각한다.
저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소수 양반세력과 왕족및 귀족들이 독점하고 누려온 특권이 유교에 뿌리한 선민사상이며
그 나머지 대다수의 민초는 되지도 않는 유학사상때문에 핍박받고 짓눌려도 항거한번 하지 못하고 숨죽여지내야 했으니 이것이 과연 동양의 자랑스런 사상이요 철학이란 말인가?
저 공구의 잘못된 입놀림에 이천여년간 억압된 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피는 누가 보상할것인가?
하기야 모든 군주론이나 정치사상이란것이 기득권층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재단하고 수정하여 온것이니 굳이 공구만 나무랄 일은 아니기는 하나 그래도 지금 우리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이 바로 이 공구의 사상이니 이를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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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 다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장강후랑 추전랑.일대신인 환구인長江後浪推前浪, 一代新人換舊人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내고, 세상에 새로 나타난 사람은 머뭇거리던 예전 사람을 쫓아낸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고사를 뒤로 물리고 나타난 사람이 있으니 이는 바로 유신의 딸이 유신의 막내에게 나랏일을 맡기는 참으로 상상도 할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거리의 시위 현장에는 일당을 받으려는 것인지 구국의 일념으로 나온것인지 모를 추레한 노인들이 득실거린다.
새 세대는 그저 그들의 뒷치닥거리나 하는 신세로 파괴되고 말아야 하는가?
이제 슬슬 젊은 시절을 보내고 구세대의 길로 접어들고있는 필자는 한참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잠을 이룰수가 없다.
구시대의 낡고 썪은 사상은 접어두고 뒷물결이 앞의 썪은 물을 밀어내 주기만을 바란다면
이또한 뒷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것은 아닌지....
 
공구의 유학사상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수만은 없다.
단지 그것을 이용하는 위정자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것만을 강조하고 왜곡한데서 벌어진 참사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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