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시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