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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신돈 - 요승이라 불렸던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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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하염
추천 : 10
조회수 : 138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4/08 01:48:29
+배경음은 드라마 '신돈'OST 이안 - 신돈

 

“신돈은 득도하여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임명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일개 무명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 신우)

 

 

옥천사 여종의 아들로 태어난 신돈

혁명가와 요승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인 신돈(辛旽, ? ∼ 1371). 그를 이해하려면 출생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현재의 창녕) 화왕산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편모슬하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돈의 본관이 영산(靈山)이고 묘가 영산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부친은 영산의 유력자일 가능성이 있다.

 

아비 없이 사찰에서 일하는 여종의 자식이었던 탓에 신돈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중이 되었다. 당시 법명은 신돈이 아니라 편조(遍照)였다. 신돈은 훗날 공민왕을 만난 뒤에 만든 속명이다. 사찰 여종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중들 틈에도 끼지 못하고, 그저 산방으로 겉도는 신세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승려이긴 했으나,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결합한 불교세력에 반감을 품은 것도 이 시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개경에 온 것이 언제인지, 또한 어떤 경위로 왕실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돈이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1358년(공민왕 7년)이었다. 이때는 노국공주가 죽기 전인데다가 집권층의 경계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귀족 집권층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새로운 인물을 통해 제2의 개혁정치를 펼치려던 중이었다. 공민왕의 새로운 계획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신돈이었다.

 

 

공민왕이 꾼 꿈속의 인물

공민왕이 신돈을 전격적으로 발탁한 것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공민왕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한 스님이 달려와 자신을 구해주었다. 공민왕이 꿈을 꾸고 난 후 얼마 후 김원명이 신돈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다. 김원명은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신하였을 때 호위한 인물이었다. 김원명의 소개로 만난 신돈은 바로 공민왕이 꿈에서 본 그 승려였다. 이후로 공민왕은 신돈을 자주 불렀고 노국공주가 죽은 뒤의 외로움을 그를 통해 위로받았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호를 하사받고 왕의 사부(師傅)로서 국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1365년(공민왕 14년)이었다. 신돈의 등장은 그 해 2월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공민왕은 14년 동안 끊임없이 반원정책을 펴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안팎으로 거센 반발과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홍건적을 격퇴하고 부원세력들을 제거하여 한때 정치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때마침 신승처럼 보이는 신돈이 나타나자 공민왕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며 그에게 국정을 맡겼다.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백성을 위한 개혁을 펼치다

국정을 담당하게 된 신돈은 귀족들에게는 요승이었으나, 백성에게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신돈의 정치는 민생정치였다. 기득권 세력을 개혁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해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원종과 충렬왕 때에도 잠깐씩 설치된 일이 있으나 번번이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말았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혁신했다. 이때 신돈은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한을 주고 그동안 권세가와 호족들이 불법으로 탈취했던 전민(田民)을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또한 양민이 되기를 호소하는 천민이나 노예는 모두 그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백성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권문세가는 신돈의 처사에 대해 격분했으나,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된 자들은 신돈을 ‘성인’이라고까지 찬양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권문세족에 대항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느낀 공민왕과 신돈은 기존의 세력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신진관료를 양성하였다. 과거시험 제도를 개혁하여 실력 있는 젊은 정치가들을 발탁하였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공민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돈은 “다른 사람의 참소를 믿지 않아야 세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라며 절대적인 신임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공민왕은 “스승이 나를 구하고 내가 스승을 구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니 오늘의 이 맹세는 불천이 증명하리라.”라는 서약을 하며 신뢰했다. 그러나 이 같은 굳은 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음문고 권 7, 한쪽으로서 이덕형의 8대조 집(集)이 신돈에게 포살될 뻔한 사실과 피무사(被誣事)를 밝힌 글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1_004_002_0062)>

 

 

권문세족들의 반격이 시작되어

[고려사]는 신돈을 요승으로 평가했다. 당시 항간에 ‘진사(辰巳)에 성인이 나온다.’라는 참설이 돌고 있었는데, 신돈은 자기가 개경에 다시 나타난 1364년이 갑진년이요, 이듬해인 1365년이 을사년이니 ‘참설에서 말하는 성인이란 것이 내가 아니면 또 누구겠느냐?’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성인인 척하면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양가의 부녀자들을 갖은 구실로 유인하여 음행을 하는 인물로 보았다. 주지육림 속에 지내다가도 공민왕을 만나면 갑자기 돌변하여 좋은 말만 하고 채소나 과일만 먹으며 술 대신 차를 마시는 이중인격자로 묘사했다.

 

신돈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이 계속되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어 왔던 권문세족들은 신돈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간관들이 일어나 신돈을 탄핵했고, 엄부흥과 이존오는 신돈을 이상한 인물인 양 소문을 내었다. ‘신돈은 양기를 북돋우기 위해 백마의 신장을 회 쳐 먹는다.’ 혹은 ‘지렁이도 산 채로 먹는다.’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결국에는 ‘늙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했을 것’이라는 말도 흘렸다. 소문에 힘입어 이존오는 죽을 각오로 공민왕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무렵 신돈은 공민왕과 마치 허물없는 친구처럼 행동하였으며 선왕이나 왕후의 능에 배알할 때 백관이 모두 왕을 따라 무릎을 꿇고 절을 해도 신돈만은 홀로 우뚝 서 있을 정도였다. 원로 중신인 이제현이 나서서 “신돈의 골상은 옛날의 흉인과 유사하니 가까이하지 마십시오.”라고 간청까지 할 정도였다. 이 일로 이제현은 간신히 죽음은 모면했으나, 그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화를 당했다. 당시 신돈은 이제현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시험 자체를 아예 폐지해 버렸는데, 이 때문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소지나 축문 한 장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 반역자로 참살 되어

고려왕조에서 대표적인 천도론자는 묘청이었다. 묘청의 난에서 보듯이 역사상 천도론을 주장한 인물들은 기득권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천도론이라는 문제에서 기득권 세력은 항상 승리했다. 묘청에 이어 신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을 배척하려는 구귀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불안감과 불쾌감에 사로잡힌 신돈은 음양설을 내세워 공민왕에게 자주 천도를 권유하였다. 공민왕이 난색을 표하자 개경의 위치가 바다 가까이 있으므로 외적의 침입이 용이하기 때문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로 허물없는 사이였던 공민왕과 신돈도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권력이 한곳에 몰려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부원세력뿐만 아니라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권세가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신돈이 사심관제를 부활시켜 5도 사심관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자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공민왕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신돈은 왕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명분이 찾아졌다. 하지만 이 일은 곧 발각되었고 신돈은 체포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참살당하고 말았다.

 

신돈은 “전에 대왕께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소승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세서까지 써 주신 일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오늘 소승을 닦달하시니 대왕의 맹세가 부끄럽지 않으신지요?”라며 죽기 직전까지도 역모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려사]에 남은 신돈의 모습은 요승 그 자체

신돈이 죽은 뒤 대궐 뒤켠 숲 속에서 꼬리가 아홉 달린 늙은 여우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 때문이었을까? [고려사]는 신돈을 반역 열전에 올리고 다음과 같이 그의 인물됨을 평했다.

 

“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했으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호색 음탕하여 매일 검정 닭과 흰말을 잡아먹고 양기를 돋구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려사]가 조선건국세력에 의해 쓰인 역사서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신돈 열전’에 쓰여진 내용은 어느 정도 각색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 권문세족

    권문세족(權門勢族) 또는 권문세가(權門勢家)라고 부른다. 고려말기 중앙 정부의 권력을 잡고 있었던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왔는데, 무신 정권기를 지나면서 숙청되지 않은 기존의 문벌귀족, 무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중앙 정부에 등장하게 된 가문, 그리고 원과의 특별한 관계(통역 등)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린 가문들을 합쳐서 초기 문벌귀족층과 구별하기 위해 권문세족이라 부른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농장으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서 광대한 농장을 경영했으며, 갖은 특권과 조세 면제의 혜택을 누려 고려말기 국가의 재정 파탄을 야기하였고, 백성의 삶을 궁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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