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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 한번 다녀 오시죠^^
게시물ID : deca_564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체리파파
추천 : 2
조회수 : 2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7/10 21:18:59
바뻐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토요일에 아이들과 세종미술관을 다녀 왔습니다.

티x 몬x터 이용 하시면 

주중권은 대인-15,000원을 11,000원에

주말권은 대인-12,000원에 판매 중 입니다.

7월 10일까지가 아이셋 까지가 무료라서...정말 싸게 잘 다녀 왔어요.


무제라는 제목이 많습니다. 그만큼 보는 관객들에게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고

아이들과 나눌 얘기가 많아요^^






호안 미로(Joan Miro)

 
바르셀로나 출생. 보석상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이후 갈리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1918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의 
작품에는 야수파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이듬해인 1919년 파리로 나와 P.피카소와 
알게 되었으며, 이때의 작품에는 H.루소의 작품을 닮은 정밀하고 엄격한 풍경화와 인물화가 
많고, 1921년부터는 입체주의의 영향이 강한 일련의 정물화를 그렸다. 이 해에 파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이때부터 입체파풍의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이나 역학적 구성 속에 
에스파냐인 특유의 강렬한 꿈과 시정이 감도는 작풍으로 변하였다. 1922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 곳 농원에서 소재를 딴 역작을 발표하였는데,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급속히 초현실주의로 
전환하였다.

1925년 M.에른스트와 협력하여 러시아 발레를 위해 의상과 무대장치를 담당하고 벽화도 
창작하였다. 또 이 해에 개최한 초현실주의 제1회전에도 출품하였다. 이 시기에 P.클레에게 
자극을 받아 더욱더 초현실주의적 환상에 장식성을 가미한, 유머감각이 넘친 곡선과 색채에 
의한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아주 밝은 시정과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에 의하여, 문학적인 회화에 빠지지 않고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준다. 별 ·여자 ·새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건강하고 명쾌한 유머마저 풍긴다. 그러나 1937년 개최된 파리의 만국박람회 
에스파냐관(館)에 그가 그린 대벽화 《수확하는 사람》에는 카탈루냐 농민의 분노를 암시하는 
듯한 격렬함이 엿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부터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작품제작에
 몰두하였으며, 1947년 미국으로 가서 미국의 전위운동(前衛運動)에 기여하였다. 1948년 귀국한 
후는 주로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왕래하면서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여, 마침내 독자성을 충분히 원숙시켜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에서 판화대상을 
받았다. 1956년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아틀리에를 세워 옮기고 1958년 도공(陶工) L.아르티가스와 
공동제작으로 파리의 유네스코본부에 도판벽화(陶板壁畵) 《낮》 《밤》을 완성하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에스파냐 동부의 원시동굴화, 아라비아 문학, 이슬람의 장식, 로코코의 우아한
 단축법(短縮法) 등의 요소가 느껴지는데, 풍부한 공상, 강렬한 형상, 한없이 밝은 너털웃음 등의 
인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감을 준다. 주요작품으로는 《꿈 그림 dream pictures》 《상상 속의 
풍경 imaginary landscape》을 비롯하여 뉴욕 헤밍웨이 부인 소장의 《농장》(1921∼1922), 
뉴욕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네덜란드의 실내》(1928)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후앙 미로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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