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시절 그저 우울했다. 지금도 우울하지만 당시엔 사춘기스럽게 우울했다.
학교에 있는 것도 우울해서 매일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 날도 세상을 원망하고 인생을 한탄하며 점심시간에 학교를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
발 끝만 쳐다보며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마침 옆을 지나던 학교 건물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까까머리~~!!"
세상에 까까머리가 나 하나는 아니겠지만 왠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한 여학생이 3층 창가에서 나를 보고 웃으며 쌍뻐큐를 날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지만 얼굴에 뿌듯함이 완연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뭔가 적개심을 드러내야 될 것 같아, 눈에 힘을 주어 쏘아보았다.
그렇게 몇 초간 마주보다 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이 처음이었고 그것이 마지막이다.
여자가 나를 소리높여 불러 준 것도. 여자가 나를 보고 웃어 준 것도. 여자가 나에게 자기 몸을 내밀어 보여 준 것도.
거의 20년이 지났는데, 좁은 방에 처박혀 매일 술 담배에 찌들어 살다 보니 자꾸 생각이 난다. 그 때의 풍경.
이른 오후의 햇살과 멀리서 땅을 보고 걸어가는 불쌍한 인생을 불러 세우는 맑은 목소리,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한 미소.
그리고 생기가 넘치는 가운뎃손가락.
괜히 째려보지 말고 손이라도 흔들어 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