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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5.18과 아버지 [펌]
게시물ID : lovestory_123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시지프스
추천 : 10
조회수 : 37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04/05/18 09:24:18
우선 제가 쓰는 글의 내용은 전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인간관계를 벗어난 고차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나 사유 없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 서술함을 알려드립니다.  더불어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개인사적인 문제도 있으니 순수한 5.18에 관한 정보만을 바라는 햏들께는 원하시는 글이 아님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니 얼마나 많은 걸 목격하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겠습니까.  다만 일신방직사택 앞에서 조그마한 음식점을 하시던 부모님께서 요 며칠 손님이 없다며 걱정하시던 게 다르다면 달랐을까...

각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저는 그저 학교를 안간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몰랐으니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한다는 건 더더욱 무리였겠지요.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부모님의 걱정이 달라지셨답니다.  손님 없어진 가게가 아닌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하시더군요.  아울러 저희 4남매(저는 막내)를 불러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고 꼭 나가고 싶거든 집근처를 벗어나지 말 것이며 당신들 눈에 띄는 곳에 있을 것.  그리고 들어오라고 하면 퍼뜩 들어올 것.  평소에 아버지를 무척이나 무서워했었으니 칼같이 따르는 건 당연한 거였지요.(참고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돌아가시던 순간을 제외하고 언제나 무섭다라는 형용사가 뒤따르던 분이셨습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지나고 나서 정황상 21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집앞으로 6~7구의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실은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트럭 위에선 머리띠를 동여매고 소총을 든 어떤 형들이 울면서 손을 번쩍 들고 목이 터져라 무엇인가를 외쳐댔습니다.  도청앞 분수대로부터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있던 저희 동네에서도 그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 수근수근 거리는 게 들렸고 하나같이 꼬맹이 자식들을 집으로 들여보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저 호기심에 집에 들어가는 척하다가 연년생인 작은형과 몰래 숨어 계속 지켜봤습니다.  

트럭이 지나간 후에 이어서 가두방송으로 울부짖는 어떤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찢어죽이자 전두환'과 '김대중 석방하라'고 락카칠이 된 두 대의 버스가 들어왔습니다.  글귀를 보면서 근래에 본 아홉시 뉴스의 기사가 생각나더군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그리고 전두환을 뭐라뭐라 옹호하는....  

그날 저녁 아버지께 여쭤보았죠. '아빠, 누가 나쁜사람이대요?' 
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김대중이 나쁜 사람이란다' 하시더군요.  덧붙여 당시 저희 집은 1층 한옥에 몇 가구가 같이 살고 있었고 옆건물은 1층 양옥이었는데 종종 그곳에 올라가서 노는 걸 아시는지라 '절대 옥상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같은 말을 또 어떤 형들로부터도 듣게 되었답니다.  저는 김대중이 나쁜 사람이라는 아버지의 그 말씀을 몇 년 후까지 사실대로 믿고 살게 되었죠. 동네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 하다가도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김대중이 나쁜 사람이대...' 이런 식으로 말을 하곤 했죠.

아무튼 아버지한테서 그런 말씀을 들은 후 또 밤만 되면 총소리가 며칠동안인가 들렸었고...  어느날 길 건너 사택 앞에 총을 든 군인들이 보이더군요.(지금 기억으로는 예비군이 아니었나 합니다.) 저는 호기심에 아저씨한테로 달려가 들고 있는 총도 만져보고, 진짜로 총알이 나가는지도 물어보고 사람도 죽여봤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지요.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다시 나가보니 그 예비군 아저씨가 부동자세로 서있고 앞에는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는 군인아저씨가 막 호통을 치시더군요.  아무리 봐도 군인 아저씨가 나이가 훨씬 어린데...  들어보니 비상시에 전투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다고 그러는 것이었고 예비군 아저씨는 없어서 그랬다고 한번만 봐달라고 빌더군요.  결국 군인아저씨는 예비군 아저씨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몇마디 쌍욕을 남긴 뒤 어디론가 가더군요.  어린 나이였지만 예비군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 민망할 것 같아 그냥 집에 들어왔습니다.

또 며칠이 지난 후 주인집 골방에서 자취하던 전남대 다니던 형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얼굴 몇 번 마주친 적밖에 없기 때문에 그 형의 죽음은 아픔이라기 보다는 저에겐 학교 다시 가게 되면 우리 동네에도 죽은 사람이 있다는 식의 동무들에게 떠들 수 있는 이야기꺼리에 불과한 철부지 어린 소년의 무용담밖엔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제가 경험한 있는 그대로의 기억입니다.  제가 입은 직접적인 피해나 아픔은 없었습니다. 그런 것 자체를 생각할만한 어떤 껀덕지 자체가 없었죠.

하지만 5.18에 관한 기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날의 기억에 새로운 기억이 추가된 일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한문 선생님이 새로 오시면서부터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또 살았던 그 당시의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막연한 제 기억과 다른 내용의 말씀을 하시는 분을 처음 만났습니다.  덕분에 당시에 아버지가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알았구요.  물론 잘못된 기억을 심어주신 아버지에게 따질 엄두는 나질 않았습니다.  여전히 무서운 아버지셨으니까요.  같은 밥상머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무서운... 조그만 잘못에도 언제나 손부터 나오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한문선생님 덕분에 역시나 어린 나이였지만 터미날 앞에서 나눠주는 관련 책자나 사진집들을 가서 구경하고 유인물들 읽으면서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1학년 때 전교조 문제가 불거지면서 제가 중학교 때 좋아하던 선생님 여덟분이 해고되셨더군요.  물론 한문선생님도 포함되었구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전교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었지요.  교장실에도 끌려가고 1학년이 진학실에 가서 뒈지게 맞기도 하고...  이러면서 결국 아버지에게도 연락이 가고 각서를 쓰시기 위해 학교를 오셨습니다.  사고 한번 친 적 없고 선생님으로부터도 맞아본 적이 없을정도로 모범적이었던 저 때문에 아버지가 학교에 나오시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 의식은 이미 사망사태였지요.  벌벌 떨면서 아버지를 맞이하고 역시 벌벌 떨면서도 아무 말씀 안하시고 그냥 가시는 아버지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보내드렸지요.  '이제 집에 가면 죽었구나...'  그런데 그 날 아무 말씀도 않으시더군요.

이 사건은 그냥 이대로 묻혀지는 것 같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3학년 형들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더 많은 활동들을 하게 되었고.  2학년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518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형들을 만나 자료와 자문을 구하고 소위 '학습'이라는 걸 받으면서 나름대로 무장을 하였지요.  당시만해도 광주에서조차, 그것도 선생님들조차도 518에 대해 사실을 말씀하시길 꺼려하던 분위기에서 우리들은 기습 가두진출과 도청앞까지의 행진을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학생들의 호응은 대단했습니다.  2학년을 통틀어 집회에 불참한 친구들이 열손가락으로 꼽을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모두가 의미를 가지고 참여한 건 아니라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활동하던 다른 써클의 일로 집회 전전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허락은 받은 터라 서울에 갔다가 월요일에 학교에 등교하니 난리가 아니더군요.  등교하자마자 불려가 갖가지 욕과 저주를 하시더니 학교차원에서도 문제삼지 않을테니 다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더군요.  작년의 일이 떠오르며 '나는 이제 정말 죽었구나' 싶더군요.

아버지를 비롯한 주동자의 부모님이 오시고 그 분들을 앉혀놓고 학생과장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학생과장의 '떼강도처럼...'이라는 발언에 아버지가 흥분하시어 학생과장의 멱살까지 잡는 사태가 되었답니다.  평소 많이 못배우신 것에 대해 항상 한탄하시고 그래서 더더욱 가열차게 자식들을 몰아붙이셨던 분인지라 걱정은 했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반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부끄러웠지요.  아마 평소에도 아버지가 못배우신 부분에 대해 열등의식이나 피해의식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주변의 만류에 겨우 화를 푸시고 아버지는 집으로 가셨습니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빨리 가는 시계만 원망하며 교문을 나서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갔습니다.  물론 겁에 잔뜩 질려있었지요.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방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부르시더군요.  '이제 난 죽었구나....'
언제나 그랬듯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앉으니 아버지께서 편하게 앉으라고 하시더군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딱 한말씀 하시더군요.

'OO야...  인생 망칠정도로만 하지 말아라.  부탁이다....'  하시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고 아버지는 방을 나가셨습니다.

한동안 말을 잃은 저는 한참 후에야 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쉬이 들지 않더군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생각이 518당시의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에까지 미치더군요.

'김대중이 나쁜놈이란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꼬박 10년이 걸렸더군요.  언제나 무서웠던 아버지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접어두고 이 땅 이 광주에 살았던 어떤 아버지의 답답함과 응어리를 그때서야 조금이나마 알겠더군요.  518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마나 경험했는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그 때서야 알겠더군요.  남은 자의 슬픔과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과 수없이 죽고도 여태 여기까지밖에 못왔다는 죽은 자에 대한 송구함을 이제서야 알겠더군요...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날의 기억 이후로도 언제나 너무하실 정도로 무서운 모습밖에 보여주시진 않았지만 518기념일을 하루 앞둔 오늘...  아버지 생각이 나 몇 자 끄적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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