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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 당신이 위험할 수 있었어.
27
확실히 탄천에서의 만남이 지영과 그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에는 그로 추정하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부드러운 어투로 편지에 적혀있었다.
나는 그녀와 그가 갈등이 일어난 적은 없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편지묶음을 들고 훑어보며 손가락으로 한 장씩 넘기는 도중에 벌어진 묶음 틈새로 편지지 한 장이 떨어졌다.
허공에서 팔랑이며 부유하는 편지지는 읽어보라며 손짓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홀린 듯이 집어들은 편지지 내용에는 우연히도 찾으려 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전에, 그들의 훈김이 떠도는 사이와는 다르게 갈등이 일어나는 형세가 눈에 띄었다.
「 어머니 안녕하세요? 또 오랜 만에 편지 보내네요. 저는 오늘 기분이 많이 좋지 않네요. 예전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요?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가 크게 다투었네요. 그런데 조금 뭐랄까. 느낌이 이상했어요. 잘못이 누군가에게 있다기보다……. 잘 모르겠어. 어머니 걱정 마세요. 몸 건강히 지내세요. 다음에 또 편지 쓸게요.
- 딸 지영 올림」
어느 새 나는 노트북 전원을 누른 상태였다. 이 편지 내용에 얽힌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
“아저씨, 여기가 맞아요?”
두 시간 째, 저희는 버스 정류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람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주변은 백화점과 영화관이 위치해 있고 그 사이와 옆으로는 빌딩들이 줄지어 있어서 사람들이 항상 북적이는 곳이었지요.
그는 이 주변에 당사자가 근무하는 직장이 있다며 저를 이곳으로 끌고 와 무작정 기다리게 했지요.
그러나 제가 무어라 탓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단서 이외로 얻을 수 있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는 상담자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묻고 싶어도 상담자가 그걸 꺼려했던 지라 단순한 정보만을 제공받는 경우가 허다했지요. 그러나 이 당사자와 같이 자신의 직장까지 말해주는 경우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어요.
탄천 대교 이후로는 당사자와의 만남이 부족한 정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어요. 저희가 떠난 장소가 사건 당사자가 생을 마감한 곳인 경우도 있었고 전혀 다른 곳에서 추적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처음 한 시간 동안은 꼭 사람을 구해내고 말리라는 의지에 집중력이 배가되었지만, 그런 행동을 두 시간을 이어하니까 피로감에 휩싸여 생기지 않는 쌍꺼풀이 두껍게 그어졌지요.
그에게 핀잔하는 어투로 말을 건넸으나, 그는 여전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을 주시할 뿐이었어요. 그런 행동에 저는 민망한 기침만 내뱉었습니다.
오랜 침묵 속에 그가 말을 내뱉었어요.
“10분.”
“네!?”
“10분 남았어요. 때가 다가왔어요.”
저는 급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다는 듯 사거리의 전경은 태연함을 유지했습니다. 되레 걱정 말라는 듯 북적였던 사람들은 어느새 흩어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8분 남았어요!”
시간은 임박해왔으나, 여전히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저희는 잘못 짚었다고 생각했어요. 살며시 그를 쳐다보았어요. 그러나 그는 확신한 듯 사거리 이곳저곳을 향해 바쁘게 고개를 움직였어요. 그때 휴대 전화에서 여섯 시 정각을 알리는 효과음이 울렸습니다.
‘오후 여섯 시입니다.’
바쁘게 움직였던 그의 고개가 멈췄습니다.
빌딩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방금 전에는 휑한 사거리의 모습에 낙담을 했다면, 금세 사거리를 가득 메우는 사람들의 행렬에 저희의 기세는 맥없이 꺾이고 말았습니다.
“5분 남았어요!”
“여기서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인파 속에서 분명 당사자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사거리에 각기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심상치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려 애를 썼지요.
그는 외마디 신음을 내뱉으며 벌떡 일어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저도 그를 따라 일어나 가까운 곳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훑어보았습니다. 가장 먼 반대편 보행 신호가 켜졌습니다.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양쪽의 사람들이 일제히 줄지어 나아갔습니다. 양쪽의 선두 사람이 만나고 곧이어 행렬은 방향이 겹치며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바쁘게 그들의 몸짓과 표정을 훑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관심에도 무심하게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생각에만 골몰한 듯이 보였습니다. 혹자 어느 무리는 반대편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기도 했고 다른 무리는 지하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첫 번째의 신호에는 이상 징후가 보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바로 두 번째 신호가 켜졌습니다. 신호체계는 저희가 있는 위치가 남쪽이라면, 동쪽, 북쪽, 남쪽, 서쪽의 순서로 켜졌습니다.
일제히 사람들이 나아가고 각 행렬의 선두가 엇갈렸습니다. 그리고 서로 스쳐가며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내뱉는 저 사람인가. 아니면, 남들보다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는 저 사람인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주름 진 청바지의 밑단 끝이 운동화 굽에 살짝 밟히는 저 사람일까.
“이제 거의 시간이 다 됐어요.”
순간 저희 앞에 있는 신호등이 켜졌습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매정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 저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남자도 충격이 전해져왔는지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저를 응시하더니 난처하다는 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렬에 뒤따랐습니다.
저만 그런 여운을 느꼈는지 옆에 있던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남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길을 건너고 있는 그 남자를 계속 주시했습니다. 신호기의 보행등은 깜빡이기 시작했고 남은 시간은 10초대로 진입했습니다. 중간 쯤 건너가다 그는 멈칫했습니다. 8초. 그러고는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7초. 저도 그를 따라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6초. 멀지 않은 곳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5초.
“10초도 안 남았어요! 어디 있는 거지……. 어!?”
그는 뒤늦게 그 남자를 발견했어요. 일순간 그의 반응이 신호탄이 된 듯이 횡단보도에 서 있는 그 남자를 향해 달려갔어요. 그 남자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걸까요? 저희를 보며 분명 미소를 지었어요.
“안 돼!”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는 중 누군가 제 팔목을 낚아챘어요. 뒤돌아보니 그였어요.
“뭐하는 거야! 이거 놔! 놓으라고!”
저는 괴성을 지르면서 그의 손아귀에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어요. 그러나 힘에서 역부족이었지요.
“살려야 할 거 아니야! 놓으라고!”
- 빠아아-앙!
사거리 전체를 뒤흔드는 거센 경적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일제히 사람들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죠. 곧이어.
- 끼이이-익!
흡사 비명소리처럼 들렸던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고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어요. 트럭과 부딪힌 그는 높게 튀어 올랐습니다. 같이 튀어 오른 그의 물품들은 죽음을 예상한 듯 흩어지고 있었습니다. 부유할 것처럼 튀어 올랐던 그는 힘이 부족했는지 점차 낮아졌습니다. 지면과 점점 가까워졌고 사람들도 하나 둘 소리의 근원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 번 둔탁한 소리가 났고 그는 힘없이 땅으로 고꾸라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에 눈물만 흘러내렸습니다. 살릴 수 있었던 그가 떠올랐습니다. 뒤돌아보며 제게 지었던 난처한 듯 보이는 미소가 머릿속 안을 누비는 것 같았습니다.
뒤늦게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보냈습니다.
등에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손이었습니다. 영문 모를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반응에 저 스스로 놀라 움찔했습니다. 그는 제 반응에 놀랐던지 등에 올린 손을 떼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보고 있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를 보니 불쾌감이 삽시간에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옆에 오지 마요.”
“…….”
제 옆에서 그는 조용히 제 반응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먼저 그가 입을 뗐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말에 제어할 틈이 없이 속에 있는 말이 내뱉어졌습니다.
“그게 할 소리예요? 아저씨, 뭐 하시는 거예요? 생각 있으면 말 좀 해보세요. 우리 여기 왜 왔어요. 사람 살리자고 여기 온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예요?”
“미안해요”
“누가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구하려는 사람을 안구하고 왜 저를 방해한 거예요?”
“……”
“사람이 말 좀 해봐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지 말라고요. 우리 저 사람 구하러 여기 왔잖아요. 근데 왜 그런 건데요. 이 사람 아저씨가 죽인 거예요. 아저씨가 죽인 거라고요. 이 사람 죽을 운명이었다는 거 아저씨는 알고 왔잖아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죽인 거라고! 그 죽음에 대한 이상한 얘기로 사람 현혹시키지 말고 사람을 살리라고! 살려내라고!”
“당신이 위험할 수 있었어. 나도 이게 최선이었어. 불안했어. 다른 사람은 날짜가 보이잖아. 그런데……. 당신은 보이지 않잖아……. 그 사실이 불안하게 만들어. 만약에 저 사람을 구하러 갔다면 당신은 죽을 지도 몰랐을 거야. 그게 아니면 둘 다 죽었을 지도 모르지. 바뀌지 않는 건 당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거야.”
“아저씨…….”
“내 잘못이었어. 당신과 같이 한다는 게……. 내겐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특별했는데. 오히려 그게 좋은 게 아니었어.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쓰여.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그 목적이 당신으로 바뀌는 것 같아. 당신을 살려야 하는 것 같다고. 어쩌면 내가 당신을……”
그는 말을 하다가 멈췄습니다. 큰 충격에 휩싸인 것처럼 멍하니 저를 응시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우린 여기까지 하지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제대로 신경 못 써드려서 죄송했어요.”
그는 서둘러 일어나더니 제가 싫다는 듯이 서둘러 빠져나갔습니다. 차츰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