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시간이 흐른 이야기입니다.
사실 공포류의 글은 아니고 제목에 쓴대로 기담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저로서는 아직 답을 내릴 수가 없는 이야기 라고 해야할까 ... 초자연 현상은 아니기에
미스터리 게시판이 아닌 공게에 글을 씁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최고 학벌의 대학교를 졸업하셨고 앞날이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나,
남북의 사상 대립이 격화되자 민주주의 진영을 지지하시던 저희 친할아버지는
신변에 큰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진영 쪽에서는 북에 체류 중인
민주주의 인사들을 숙청하려 했고, 저희 할아버지는 전쟁을 전후로 하여 월남하게 됩니다.
워낙에 총명하시고 사업 수완도 좋으셨던지라, 저희 집안은 전쟁 후에 크게 부흥합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고도 10년 동안은 일가가 어려움 없이 살았으니, 쌓아오신 부가
어느정도였는지는 쉬이 짐작되시리라 봅니다. 불법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굉장히
자랑스럽고 떳떳한 일을 하셨으나, 신상 노출의 우려가 있어 어느 직종인지는 구태여 적지 않겠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도 '할아버지가 잘 사는구나' 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댁은 2층짜리 양옥 단독 주택이었습니다. 굉장히 연식이
돼보이는 양옥집이었지요. 그 일본이나 한국 드라마에 보면 유신 시절 지어졌으니, 근대에 지어졌느니
하는 양옥집들이 있지요? 딱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마당도 있었고, 조악하고 싸구려 같아 보이긴 했지만
분수대 비슷한 것도 작게 있었습니다. 원래는 저희 일가가 살던 집이었는데, 자식들(저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결혼 후 독립하거나 출가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만 남은 거지요.
말씀드린대로 2층 양옥집이었습니다만, 저는 2층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윗집에 세를 놔주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어린 나이에 계단에 올라가서 높은 곳에서 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나 할머니는
'윗집은 세를 줘서 올라가면 안된다' / '신혼부부가 살고 있다'라는 이유로 절대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다고 안 올라갈 꼬마가 아니지요. 할아버지댁에 놀러갈 때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라 2층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안에는 못 들어가고 발코니처럼 되어있는 창을 통해 안을 보는데, 참 이상합니다.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잘 안 보이기는 하지만, 어린 꼬마가 봐도 뭔가 집안의 분위기가 신혼부부가 사는
집의 거실인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요. 휑한 거실, 먼지가 쌓인 느낌의 나무 바닥 ... 보통 신혼부부가 살면
꽃도 있고, 액자도 몇개 있고 해야하는데, 그런 게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하면 믿을 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 사는 사람은 신혼부부가 이니었습니다. 저는 여름즈음에 그곳에 놀러갔다가 알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