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저는 부모님, 외할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할아버지댁에 갔습니다. 그제야 저를 깨운 이유를 알겠더군요. 외할머니까지 집 밖으로 나오니, 집에서 저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저는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못다한 잠을 계속 잤지요.
할아버지 댁에 도착하고, 스산하게 귀뚜라미가 우는 마당을 거쳐가니 부엌에 불이 켜져있습니다. 식탁에는 친할머니가 앉아서 흐느끼고 계시더군요. 평소부터 친할머니와 사이가 돈독하시던 외할머니는 친할머니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고, 아버지 어머니는 저는 거실에서 가까운 빈방에 뉘인 후 거실로 가셨습니다. 어렴풋한 잠을 쫓아내지 못하고 누워있으니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화의 내용은 기억 속에서 각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제가 저 이야기를 들으며 왕할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했다는 겁니다. 아, 왕할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근데 왜 왕할아버지가 할머니 선생님이지? 같은 생각을 하며 저는 천천히 잠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왕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저희 친할아버지도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어린나이라 죽음이란 걸 실감할 나이가 아닌데다, 친혈육이 세상을 떠나니 왕할아버지는 금방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더군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저도 중고생이 되었습니다. 중고생이 된 저는, 글 재주가 좋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백일장과 관련된 운이 참 좋았어요. 교내 백일장이건 전국 백일장이건, 무조건 못해도 입선을 했었지요. 그때마다 친할머니는 입에 귀에 걸리셔서 이런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네가 내 피를 이어받았나보다." "에? 그런가? 왜요?" "할머니가 책을 워낙 좋아하잖니. 할머니 학창시절 별명이 작가였어. 종전 때 방공호에서도 책을 읽었으니...그 덕을 니가 보나보다."
아닌게 아니라 저희 친할머니의 독서량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국내 문학, 일본 원서, 프랑스 문학 전집까지 정말 안 읽는 작품이 없으셨지요. 그 당시에는 그런가보다...했었습니다만 지금 와서는 이것도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복선 중 하나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로 가시길 원하셨지만 전 꿈이 있었기에...다른 과를 전공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교양수업으로 현대문학사 같은 수업을 듣던 와중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