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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집(奇談集) _ 1-5(완)
게시물ID : panic_892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월야
추천 : 37
조회수 : 1760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6/07/15 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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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대학교 교양 수업은 정말 짜증나지요. 특히 발표라면 더더욱. 새내기 시절 저는 현대의 문학사를 통틀어 가르치는 수업을 수강했고, 그 수업은 각 조가 지정된 문학가 한명을 발표하는 수업이었습니다.

다행인건, 그 당시에는 각자 집에 흩어져서 자료를 취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같이 한군데에 모여서 조별과제를 무찌르는(??) 방식이 유행이었어요. 저희 조는 그날 조원 중 한명의 과방에 모여 열심히 과제를 무찌르고 있었지요.

말이 모여서 과제지...  한 2시간은 술 먹으면서 노가리를 까다가, 11가 되어서야 슬렁슬렁 과제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품을 하며, 천천히 교제를 펴서 발표할 문학가의 개요를 살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학가의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저는 독서를 하는게 아니라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왁!!"

제 비명에 놀란 조원들은 형 왜 그래, 오빠 취했어? 같은 말을 하며 제게 몰려왔지만 저는 그런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손짓으로 괜찮다고 한 후 소파에 앉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지요.

물론 그 문학가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본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진으로, 고해상도로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누굴 닮았습니다.
예, 그래요. 그 옛날의 왕할아버지를 너무 닮았습니다.

에이 설마, 에이 설마! 미친 소리야 라고 생각했지만 입을 꾹 다문 그 남자의 모습과, 공기놀이에 집중하던 왕할아버지의 눈매가, 입 모양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저 사람이 늙으면 꼭 왕할아버지처럼 되겠다, 싶을정도로요. 온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었습니다.

물론 연대를 생각하면, 그 문학가가 왕할아버지라면, 너무 늙었는데? 너무 나이가 많은데?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소리야.
왕할아버지가 왜 왕할아버지였는데.
그 얼굴의 주름, 다 죽은 얼굴색. 기억 안나?

수많은 자문자답을 하다. 저는 결국 생각을 포기하고 과제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왕할아버지가 이 사람과 같은 사람일 리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차차 그 충격을 잊어갔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께 여쭤본적도 있습니다.

"아빠, 할아버지집 2층에 살던 할아버지 기억 나지?"
"어? 너 그 할아버지 봤었냐?"
"어어... 그 할아버지 누구야?"
"나도 몰라."
"에이, 뻥!"
"야 아빠 진짜 몰라. 누군지도 몰라. 그냥 아빠...아니 네 할아버지랑 친분이 있던 분인데 워낙 세상사에 관련 되기 싫어하시는 분이라, 식객 같은 걸로 할아버지가 머물게 하셨지."
"아..좀 특이한 분이구나."

"내가 알기로는 휘문고로 얽히고 뭐 그런걸로 아는데."

"휘문고? 서울에 휘문고?"
"응."
"할아버지 북한에서 대학까지 나오셨잖아?"
"아 몰랐냐? 너희 할아버지 전쟁 끝나고 나 낳기 전인지 나 태어나고 나서까지인지 휘문고에서 교사했었어. 그때는 워낙에 선생 수가 부족해서...자세한 건 아빠도 모르고."
"... .... ..."
"아마 휘문고 동문회 그런거로 얽힌걸거야. 그 할아버지는 거기 선생은 아니었고...뭐 엄마도 아는거 보니 북에서 잠깐 봤거나 그런 사이려나?"

왕할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이것과,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간간히 해주시던 이야기가 다 입니다. 그 분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이제.

다만 나는 그 왕할아버지가...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 문학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택도 없는 소리지요. 남들이 들으면 다 낄낄대고 비웃을 겁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마, 소설 쓰냐? 같은 소리를 하겠죠.

네, 그래서 저는 여태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남에게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대나무 숲에 소리를 지르듯, 이 게시판에 몰래 적어놓습니다. 그냥 저의 추측일 뿐이니까요.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세상사가 싫어진 식객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도 뭐가 됐던 이상해요.
왕할아버지가 그 문학가가 아니어도, 도대체 뭣땜에 그 큰집에서 혼자 숨죽여서 말년을 보낸건지. 할아버지는 왜 왕할아버지에게 그 큰 공간을 내준건지...

할머니의 치매가 엄청나게 심해졌을 무렵, 제가 마지막으로 백일장에서 상을 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잠깐 기억이 돌아오셔서, 자기는 문학소녀였다 같은 얘기를 되풀이 하시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셨어요.

"내가 비록 생이 기구해서 작가는 못됐지만 너같은 손자둔거, 그리고 '선생님 모신거'로 충분하다."

할머니...
참고로 제가 사진을 보고 기겁한 그 문학가는.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沃川) 하계리(下桂里)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瑞光)≫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에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고, 휘문고보 출신의 문우회에서 발간한 ≪휘문(徽文)≫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던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그해에 ≪신민≫, ≪어린이≫, ≪문예시대≫ 등에 ‘다알리아(Dahlia)’, ‘홍춘(紅椿)’, ‘산에서 온 새’ 등의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박용철(朴龍喆), 김영랑(金永郞), 이하윤(異河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김기림(金起林)ㆍ이효석(李孝石)ㆍ이종명(李鐘鳴)ㆍ김유영(金幽影)ㆍ유치진(柳致眞)ㆍ조용만(趙容萬)ㆍ이태준(李泰俊)ㆍ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9인회를 결성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그해에 새로 창간된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그곳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소개하여 그를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이한직(李漢稷), 박남수(朴南秀) 등을 등단시켰다. 이 시기에는 시뿐 아니라 평론과 기행문 등의 산문도 활발히 발표했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로 인해 사회 상황이 악화되면서 일제에 협력하는 내용의 시인 <이토>를  ≪국민문학≫ 4호에 발표하였지만, 이후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 은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京鄕新聞)≫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文學讀本)≫을 출간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散文)≫을 출간했으며, 6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와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는 1993년 4월에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지용
鄭芝溶

흘러가는 얘기입니다.
말 그대로 그냥 기담이에요... 신빙성도 없고 의구심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이야기. 다만 제가 경험한 내용들은 모두 가감없는 실화입니다. 이런 일들이 많았네요. 천천히 하나씩 풀어가겠습니다. 

길고 보기 힘든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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