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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실업대책
게시물ID : panic_893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15
조회수 : 158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7/18 13: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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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새벽 두 시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정글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직장을 잃은 뒤 햇빛 아래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했지만, 갈비를 먹어본지 얼마나 되었나 더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잘 나가던 시절의 추억들을 되씹어 볼 때도 있었다. 한 해 두 해 말없이 지내다 보니, 일을 했던 기억들은 파편이 되어 이제 누가 물어도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이제 철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묻는 사람은 없다. 직장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말을 걸 만한 사람들 모두 일자리가 없는 연금 생활자들이었다.

철수도 엘리트중 한 명이었다. 새로운 연구를 기획해서 예산을 따고, 기자들 접대에 바쁠 때가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는 매우 씁쓸하긴 했지만 말이다. 같은 일도 철수가 하면 0.1그램이나마 더 무겁게 느껴졌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외모도 준수했고, 덧붙여 적을 만들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들었다. 철수가 직장을 잃은 건 실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나라엔 삼십대가 되면 만 명 당 하나의 일자리만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학 졸업후 10년간은 완전 고용이 된다. 철수처럼 멋진 자리는 아니지만 떳떳하게 월급을 받아갈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다 30대 중반이 되면 직장이 없어진다.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만 명 당 한 개의 일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0.001%만이 떳떳하게 인생을 꾸려 나갈 수 있다. 거의 모두가 실직자가 된다. 그들이 실직을 버티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매월 20만원 들어오는 연금이었고, 두번째는 10년간 실직 기간을 버티면 아주 드문 취업의 기회가 온다는 뜬소문이었다. 가느다란 빛줄기만 보고 10년을 버티는 것이다.


철수는 국가전력센터의 나노입자분해 연구원이었다. 나노입자분해는 중요한 일이었다. 한정된 자원을 재활용하고 재활용하고 다시 재활용하다 남은 찌꺼기가 있다. 여기에 방사선을 쪼여 연료로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철수의 일이었다. 철수는 직장을 잃을 생각이 없었다. 

입사 3년 만에 감마선 치환 방식에 대한 논문을 새로 발표하고, 경쟁자를 한 명 더 제꼈다. 철수의 방법으로 감마선 치환을 하면 그전에는 연료 수율이 10% 남짓하던 것이 30%까지 치솟았다. 마른 걸레를 짜내어 물탱크를 가득 채운 것과 다름 없었다.

잘리지나 않을까 초조하던 입사 10년 차에 획기적인 공법을 개발했다. 수율을 18%더 올릴 수 있는 촉매를 개발해냈다. 새로운 유전을 발견한 것과 다름없었고, 인류는 향후 100년간의 에너지원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 일로 철수는 만명 중 하나만이 가질 수 있는 재직권을 획득했다. 

상황은 그가 만든 공법이 실무에 적용되며 반전되었다. 촉매가 슬러지를 분해하며 나오는 것은 48%의 연료와 51.6%의 독성 가스였다. 그 전에 나온 어지간한 화학 무기보다 치사율이 높았다. 안전 설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공단 두 곳이 초토화되었고, 수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설계대로 설비를 갖추지 않은 재활용 시설측의 문제였지만, 재활용부서나 경제부서나 건설부서의 끈끈한 관계에 의해 설계자 철수가 모든 것을 덮어 쓰고 퇴직당했다. 


철수는 무덤같이 좁은 임대방으로 돌아 간다. 벽에는 끄거나 볼륨 조절을 할 수 없는 TV가 붙어 있다. 그게 임대의 조건이다. 방안에 있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TV를 볼 수 밖에 없다. TV에서는 선남선녀들이 연애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연금 생활자들은 TV를 본다. TV에서는 직장을 가진 이들이 데이트하고, 자녀를 키우며, 헬쓰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고민이 생기면 친구들과 한 잔 하는 장면으로 씬이 옮겨 간다. 
연금생활자는  친구들은 만나지 않고, 연락하지도 않는다. 거리를 배회할 돈도 없다. 낮시간에는 집에서 조용히 TV만 보며 일찍 잠이 든다. 직장생활하며 입금한 연금은 매달 20만원이 나온다.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다. 연금이 나오는 것도 퇴직후 10년간이다. 

철수에게 이제 그 10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주 아니, 다음 주면 연금이 끊어져 있을 것이다. 시설에서 아는 이라도 만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배급을 받아오거나, 목요일 마다 기숙사 앞에 놓인 박스를 가져오던 기억들도 그리울 날이 올 것이다. 

TV를 보며 화려했던 20대를 그려본다. 뙤약볕 아래 서핑을 했을 때는 얼마나 짜릿했던가. 하얀 비키니를 입은 여자친구와 프리스비를 던지며 놀던 기억을 해본다. 그해 여름 휴가를 준비하기 위해서 철수가 했던 걱정은 체지방을 줄이는 것 뿐이었다. 여름을 위해 석달 동안 닭가슴살과 양배추만 으적으적 씹어댔었다. 수도사와 같은 고행후 휴가지에서 마셨던 맥주의 맛이, 그 거품이 혀 위에서 터지던 그 느낌이 떠올랐다.

철수는 분노가 치솟았다. 흔한 일이다. 좁은 궤짝같은 방에서 화를 다스릴 수 있는 건 풋샵 뿐이다. 바닥에 땀이 흥건해질 까지 근육을 압박했다. 긴장한 근육을 거울에 비춰보며 언제나처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다양한 죽음의 방식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반사적으로 부모님이 떠오른다. 이제 아련하게 흐려졌지만, 슬플 때는 부모님 생각이 난다. 중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실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정부에서 일자리를 의무적으로 준다고 했다. 화성 개척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노인들로 일자리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여느 부모처럼 나를 기숙사에 넣고, 늙은 부모님들은 화성으로 떠났다. 이후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연락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끊임없는 추락의 말들을 할 수는 없었다.

철수는 낡은 런닝복으로 갈아 입었다. 인이 박힌 땀 냄새는 몇 번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새벽 거리를 달려 나가니, 우중충한 기분은 서서히 가라 앉고, 근육통으로 바뀌어 올라왔다. 종아리에서 생긴 통증이 생기고 허벅지로 옮겨 온다. 숨이 막혀 전봇대에 기대어 헥헥 숨을 몰아 쉬었다. 도시는 죽은 듯 조용했다.

땀에 젖어 기숙사문을 열 때, 몇 년 만에 처음보는 우편물이 보였다. 직장이 정해졌으니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라는 통지다. 만 명 당 한명에게만 오는 기회. 내가 유능한 사람이었던 기억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 나에게 기회를 주면 에너지 효율을 70% 까지는 끌어 올리리라. 다만 이번에는 매년 1%씩 야금야금 끌어올릴 것이다.

철수는 낡은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 직장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 아무리 험난한 일들이 있더라도 꾹 참고, 반드시 살아 남으리라. 다시금 비키니가 잘 어울리는 여자친구와 만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내리라. 

신체검사장에서 철수는 번호표를 받아 들고 기나긴 줄에 합류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얼마만인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만명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하나 얼굴에 희망이 있다. 좌절의 골이 깊숙히 박혀 중늙은이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또래일 것이다.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기쁨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옆에 있는 사람이 경쟁자일지도 모른다는 칼을 가슴에 품고 있다.

샤워실에 옷을 벗고 들어가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았다. 조명 빛 아래 비친 그의 나체는 아직 젊음을 놓치지 않았다는 신호가 새겨져 있었다. 분노가 반복된 회수만큼 풋샵을 했기 때문이다.

물이 잠시후 나온다는 방송이 들렸다. 코가 조금 맵다. 급수 파이프가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른하게 벗은 몸으로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연료 효율을 더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성 물질이 더 많이 분해되지 않을까. 그 독성 물질도 재활용하면 효율이 더 올라갈지 모른다. 

샤워기에서 물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샤워장 문을 두드렸다. 샤워장 문은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덧.
인디 게임을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테트리스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게임입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gametalk&no=318461&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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