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상의 딸, 피아노로 세상을 울려라
[조선일보 양근만 기자]
2001년 1월 독일로 유학을 떠날 때 이수미(20)씨는 빈털터리였다. 옷가지 몇 벌과 지갑에 든 30만원 가량의 외화가 전부였다. 가족의 ‘따뜻한 작별인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미쳤느냐” “말도 안 된다”는 주변의 수군거림이 계속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때 이씨의 아버지 이연식(48)씨는 감옥에 있었다. 회사가 부도나면서 빚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점상을 하며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 하영숙(46)씨도 딸을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큰딸의 ‘집념’을 알기에 속만 태웠다. 마음 한편에서는 “사정이 조금 나으면 지원을 해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컸지만 현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수미씨는 “모든 사람의 반대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당시 저는 어두운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열다섯에 맨몸 유학, 혼자힘으로 공부…
집에서는 국제전화료 못대 전화 끊겨… "내년 파리 콩쿠르 우승해 돌아갈게요
실제로 피아노는 그녀의 삶의 모든 것이었다. 네 살 때 처음 두드린 건반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역 및 전국 단위 대학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영남대에 출강했던 장신옥 교수는 그녀의 재능을 높이 사 2년간 무료 레슨을 해줄 정도였다.
독일에 도착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처음 한 달 동안 잘 곳이 없어 한인(韓人) 성당에서 보냈다. 아는 한국인 집에 머물 때는 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를린의 예술학교 바흐 김나지움 기숙사 한편에 겨우 방을 얻으면서 잠자리는 해결됐지만 생활은 쪼들리기만 했다.
부모가 노점상을 하며 약간의 돈을 보내줬지만 기숙사비를 치르기에도 벅찼다. 연주가 필요한 곳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주거나 레슨을 하며 겨우 용돈을 벌어 쓰는 생활이 계속됐다. “부모로부터 풍족하게 돈을 받고 매일 밖에서 밥을 사먹는 유학생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고 한편으로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수미씨는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피아노에 더 매달렸다. “하루 5시간 이하로 연습한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작년 5월의 어느 날 새벽. 경상북도 경산 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덜컥 겁부터 났던 어머니 하씨에게 들려온 목소리는 딸의 음성. “엄마, 나 우승했어”라는 한마디였다.
독일 연방 청소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부부는 그때 한참을 울었다. 독일 연방 청소년 콩쿠르는 피아노 부문 참가자만 수백명에 이르고 반년 가량 지역 경연을 거쳐야 하는 유명한 대회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자가 결정된 건 40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뒤 은인도 나타났다. 의학박사 출신의 60대 노부부가 그녀의 연주를 들은 후 양부모를 자처한 것. 최근엔 폴란드 출신의 인사가 “어떻게 피아노도 없는 피아니스트가 있느냐”며 수미씨에게 2000여만원 상당의 피아노를 사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최근 그녀는 독일 데트몰트(Det mold) 음악대학에 최종 합격했다. 엄선된 30명이 겨뤄 이 중 3명에게만 입학이 허가됐다. 하노버 음대로부터도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심사위원을 맡았던 한 교수의 제안으로 데트몰트대를 택했다.
부모는 요즘도 대구와 경산을 돌며 양말 노점상을 한다. 아침 7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양말을 판다. 딸과의 국제전화로 나온 전화비를 내지 못해 전화가 끊긴 지도 오래다. 하지만 부부는 “수미 때문에 힘든 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부모를 자주 만나 힘을 주고 싶지만 그는 비행기 값이 없어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머나먼 이국에서 그녀가 전할 수 있는 말은 “2007년 파리 콩쿠르에서 우승해서 꼭 찾아 뵐게요”라는 한마디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