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를 웹툰으로서는 처음 접했습니다.
회사에서 엉덩이를 붙이면 뗄 시간도 없이 바빠 오로지 회사와 집을 오가며 잠자기에만 바빴기에
인터넷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지만, 다니던 일을 쉬게 되면서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네이버 웹툰라는 곳을 처음 들어갔습니다.
마침 거기에 초 작가의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잠깐 길렀던 강아지에 대한 추억 보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의 에피소드를 보며 이렇게 간단 명료한 그림만으로도 커다란 감정을 끌어낼 수 있구나..하고 감동받았었죠.
그림을 아주 잘 그려서 대단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상력을 뒷받침해주는 능력이 정말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트리거처럼, 조금 흐릿했던 옛 추억이나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도구.
그래서 단행본도 구매하고..차기작인 용이 산다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네. 얼마전까지만 해도 두 작품은 저에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리고 어느 책에서인가 적혀있듯이, 현대 사회의 창작물은 창작자의 배경과 지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계로 양산하여 찍어내는 기성품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으로서의 자기판단과 감정을 이입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매체.
예술 범주 안에 있는 대부분의 것이 바로 그렇고, 웹툰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트위터도 하지 않고, 페이스북, SNS도 거의 하지 않고 지인과의 카톡만이 전부인 저에게는
초작가님의 배경은 그저 고양이와 개를 좋아하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접한 초 작가님의 언행, 트위터라는 플랫폼을 이해하면서 최대한 감안한 시선으로 본 그 언행은
제가 알고 있던 초 작가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매우, 매우 멀었어요.
....여러가지 많이 쓰고 싶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사실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두 작품을 보고 느끼면서 접한 모든 그림, 글, 에피소드, 그리고 인터렉션을 통해 얻은 경험은
이제 스스로의 혐오로 확장되었습니다. "나는 왜 그 웹툰을 보며 긍정적인 경험을 한거지?" 라고 말입니다.
단행본. 잘 샀습니다. 서점에서 단행본을 구매하고, 개와 고양이가 남겨진 포스트잇도 받았을 떄의 그 경험.
작가에게 인세를 준다, 보탬이 된다라는 개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더욱 큰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지불했던 재화.
이제 단행본은 단순히 그림과 글이 담긴 정보매체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간에서는 책을 찢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제 생각에는 찢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찢을 의미도 사라져버렸죠.
오히려 이 책을 소지함으로서 전혀 다른 경험의 증거로 남게 되었습니다.
단행본은 앞으로 계속 책장에 놓여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