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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이 강한 것이 좋은 것일까요?
게시물ID : history_123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울리비
추천 : 6
조회수 : 2274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3/11/01 00:34:18
사극들을 보면 주인공인 임금이 백성을 위한 좋은 정치를 하려고 하는데 자신들만의 특권을 지키려는 신하들에게 가로막히는 전개가 많이 나오죠.
드라마는 주인공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시청자들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편이 재미를 만드는 데 좋으니까, 사극에 그런 전개가 많이 나오는 것 자체에는 불만 없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주인공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좋은 정책을 밀어붙이기를 원하는 마음이, 현실에서도 선한 영웅 한 사람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면 어떨까요?
 
학교 국사 교과에서 보통 왕권이 강화되면서 국가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전성기가 온다고 설명하죠.
하지만 왕권 강화만으로 국가가 발전되는 것일까요?
담합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챙기고 자의적으로 통치를 하던 기존 소수 지배층을 억누른 후, 국가 전체의 이익을 안정되게 보장하는 '체제(시스템)'를 만든 것이 진짜 발전의 원동력 아닐까요? 여러 권력 기관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며 서로 견제하는 권력 체계, 우수한 인재를 좀 더 개방적으로 정치의 장에 받아들일 수 있는 관리 등용 체계 같은 것 말입니다.
 
소수의 인물이 지배하는 귀족정은 그 지배층의 이익만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과두정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인이 지배하는 군주정 역시 군주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참주정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 지배층만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되는 것을 가장 치명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바로 견제받지 않는 자의적인 권력 행사입니다.
이것은 다수 인민이 지배하는 민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정 역시 민주주의의 요체인 인간 존중의 원칙 등을 잊고 다수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 되어, 다수 인민의 지지로 인종 차별 법안이 제정된다든가 하면, 그 역시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제대로 된 정치는 아닐 것입니다.
 
정치의 장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많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정치에서 갈등과 견제는 정치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드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 세력 간에 갈등이 있다면, 한 세력만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은 다른 세력들의 견제 때문에 통과되기 힘들 것이고, 그러면 전체 공동체를 위하는 정책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저는 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가진 시민들이 폭넓게 정책 결정 및 실행 과정에 참여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토론하며 서로의 의견을 조정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요. 민주주의는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 참여의 문이 열려 있기에 견제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이익에 가장 근접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민주주의, 즉 일반 인민이 정치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 역사 전체를 봤을 때 굉장히 최근에 생긴 시각입니다. 보통선거권으로 재산, 성별, 인종 등에 관계 없이 모든 시민이 형식적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서구권에서도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일반화되었죠.
이 민주주의가 생겨나기 전, 정치권력이 소수 권력에게 제한되어 있을 때, 그나마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잘 보장할 수 있는 체제는 어떤 것일까요?
왕권이 강해 왕에 대한 견제가 부족한 체제라면, 좋은 왕이 등장하면 다행이지만 운 나쁘게 나쁜 왕이 등장하고 견제를 받지 않는다면 끔찍하지 않을까요? 1인의 절대권력자가 견제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치체제에서 좋은 왕의 등장이라는 드문 행운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서 그들끼리나마 견제를 하는 체제가 제 눈에는 그나마 안전해 보입니다.
 
조선을 예로 들어보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가능케 하고 그 후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의 안정과 발전을 가능케 한 것은 왕권이 무작정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권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국사시간에도 태종 때는 왕권이 강한 6조 직계제였는데 세종 때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의정부 서사제로 바뀌었다고 배우잖습니까. 세종대왕의 업적은 왕 한 사람이 밀어붙였기 때문이 아니라 신하들과 백성들(세금 제도에 대해 여론조사도 했습니다)의 의견을 들어가며 정책을 철저히 검토해 세웠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죠. 그 후로도 삼사가 왕의 권력을 견제하고, 붕당정치가 신하들 간의 상호견제를 하면서(나중에 환국 등으로 정쟁이 격렬해지면서 엉망이 되었지만) 조선이 안정되게 발전했다는 겁니다.
세조 때 6조 직계제로 돌아가고, 세종 시절의 정책 검토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빠르게 정책을 결정했으며, 쿠데타 때문에 부족한 정통성을 측근들에게 공신칭호를 부여하고 권력을 주면서 메우는 바람에 우리가 아는 부정적인 훈구파의 모습이 생겨났죠. 또 붕당정치의 붕당 간 견제가 무너지고 한 파벌이 득세하면서 견제가 아닌 담합이 이루어진 게 악명 높은 세도정치고요.
 
한 영웅이 홀연히 등장해 귀찮은 견제와 방해를 물리치고 자기 뚝심을 밀고 나가는 것이 좋은 정치라고 생각하는 것, 민주국가의 시민다운 자세도 아니거니와 정확한 역사관도 아니라고 봅니다.
영웅,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사회를 발전시킨 면이 역사에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영웅의 성공은 당시의 여러 조건이 갖춰졌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영웅은 그 성과가 자신의 죽음이나 몰락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시스템화 해서 지속되게 했을 때 더욱 높이 평가받습니다.
역사 속에서 강렬한 영웅들의 활약에 끌리기 쉽지만, 공동체를 발전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더 폭넓게 살펴보는 시각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범한 우리에게도 영웅을 마냥 기다리는 것 이상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국가 및 사회의 운영에 견제나 지지의 목소리를 내고 그로써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에 능동적으로 나설 수 있다면, 역사 공부로 얻을 수 있는 상당히 큰 가치가 아닐까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잠정적인 결론일 뿐이고, 제가 놓치거나 잘못 안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와 다르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다면 함께 이야기 나누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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