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춥다... 졸리다...
다른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를 않는다.
오로지 본능적인 욕구만 들 뿐이다.
수면욕!
수면욕은 성욕이나 식욕보다도 앞선다. 추우면 잠이 안 와야 정상인데 너무 춥다보니 오히려 잠이 쏟아진다. 이대로 드러눕고 싶다.
너무 춥다. 발을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쓰러지고 싶은 생각뿐이다.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길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따라 기계적으로 발을 놀릴 뿐...
당연히 속도도 무척 느리다.
춥기 때문일까.
이 쌓인 눈 때문일까.
등에 업고 있는 성호 때문일까.
무엇 때문이든 춥고, 더디고, 나는 쓰러져서 자 버리고 싶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
아, 더 이상은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겠어.
그 때, 앞서 가고 있던 준호가 외쳤다.
'저, 저기! 대피소가 보인다! 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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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1월 17일.
P군과 승현, 성호, 준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이다. 10년 동안 친하게 지냈고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이제 각자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기 직전인 나이. 앞으로는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여행을 계획한다.
그냥 여행이 아니라 추억을 듬뿍 만들 수 있게, 조금은 힘든 여행을 하려고 한다.
바로 한겨울의 지리산 등반!
마지막 겨울방학, 이 추운 날씨조차 몇 년 뒤 그들에게는 포근한 휴가로 기억될 것이다.
기상예보가 좋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행을 강행한다.
이런 계획은 승현이가 잘 짠다. 비상식량, 침낭, 랜턴 등 각자에게 필수품을 일일이 적어서 준비시켰고, 동선까지도 세밀하게 짜왔다.
출정! 출정이다.
예보대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준호의 벤츠 C클래스 안은 따뜻했다.
우선 지리산 중턱의 대피소까지는 차로 이동한 뒤, 다음 날부터 등반을 한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P군은 뒷자리에 앉아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이젠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들이 좋아하는 부활의 노래다.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중요치 않다. 어차피 이 친구들, 10년 동안 노래방 다니면서 항상 비슷한 노래들만 불러왔는데 뭘.
지리산을 달리기 시작한 무렵, 눈보라가 거세졌다.
매우 거세다.
와이퍼를 최대한 빠르게 돌려도 앞 유리에 눈이 쌓인다.
운전을 하던 준호가 말한다.
'야, 이거 좀 심한데, 이거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 아니냐? 이러다가 딱 떨어져서 죽고 뭐 그런가?'
불길한 소리! 그러나 그들은 그저 웃는다. 위험을 받아들이기에는 20대 후반의 정열이 너무 넘친다. 그들의 정열은 위험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야, 잠깐. 나 생명보험 좀 가입할게.'
P군은 휴대전화를 꺼내며 농담을 한다.
어라? 통화권 이탈. 악천후는 악천후인가 보다.
길은 더 굽이치기 시작한다.
준호의 운전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길도, 날씨도 좋지 않으니 쉽지가 않다. 게다가 네비게이션도 어느 샌가 먹통이다.
길이야 외길이니 길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가시거리가 10m 조금 넘는 폭설 속에서 네비게이션은 길 찾기 기능보다 앞 도로가 어디로 얼마나 휘었는지 가늠해 보는데 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육안으로 길을 파악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 앞에 조심해! 급좌회전이야!'
조수석에 탄 승현이도 불안해졌는지 운전에 신경 쓰기 시작한다. 긴장한 준호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다. 잘 꺾는다. 눈길에서도 미끄러짐 없이. 순간.
반짝!
마주오던 차량의 헤드라이트로 추정되는 빛이 그들의 시야에 잡힌다. 순간적인 경직! 그리고 준호의 급격한 핸들링!
끼이이이익! 콰아아아앙!
.
.
.
으으... 이게 뭐지.
아, 큰일 났다.
P군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다. 친구들도 정신을 잃지는 않았는지 모두 깨어있다.
다만 성호. 일행 중 운동신경이 가장 나쁜 성호는 다리가 꺾여있다. 부자연스럽게.
골절, 골절이다. 그것도 뼈가 피부 밖으로 튀어나왔다.
평상시라면 큰 문제없는 부상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아니다. 큰일이다. 이 부상만으로도 생사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손을 쓸 도리가 없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아까 살펴본 바로는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일단 짐 챙겨서 나가자.'
사태 파악은 역시 승현이가 가장 빠르다. 지금처럼 시동도 걸리지 않는 차에 있다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지만 차에서 빠져나와 짐을 챙긴다. 짐이 두 개 더 늘었다.
성호의 짐 그리고 성호.
성호의 짐은 승현이 들었다. 성호는 준호와 P군이 번갈아 업고 가기로 한다.
성호는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하체를 잡지 못하니 업히는 사람이나 업는 사람이나 여간 곤욕이 아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전부 군필한 청년들이다. 철없는 애들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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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은 급커브길에서 핸들 급조작으로 20m 아래 산비탈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완만한 비탈이라 다행이다. 절벽이었으면 몰살당했을 수도 있다.
일단 짐부터 챙겨서 비탈 위로 옮기고 성호를 셋이 같이 잡고 올라간다.
70kg에 달하는 성호는 무거웠지만 그래도 장정 셋이 달라붙으니 큰 무리 없이 비탈 위로 옮길 수 있었다.
'햐, 저거였냐? 좆같네.'
준호가 볼록거울을 발로 걷어찬다. 앞 차의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커브길에 주의하라고 달아 둔 거울이었다. 눈보라도 치고 긴장도 많이 하다 보니 순간 착각해서 핸들을 꺾어버린게 실책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대피소로 가 몸을 녹이고 기상이 좋아지면 119와 보험사에 연락을 해야 한다.
그들은 추억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후륜구동의 벤츠가 아니라 4륜 구동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걷는다.
승현이 준비한 지도를 보니 이대로 2km만 가면 된다.
지금은 오후 4시. 산 속의 밤은 빠르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살 수 있다.
그래서 걷는다. 묵묵히...
30분, 1시간, 2시간...
걷는다. 눈이 정강이까지 묻힌다.
짐과 사람을 업고 가기에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3시간, 4시간...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저 걷는다. 기계적으로.
2km라는 수치는 잊은 지 오래다. 눈 오는 산길의 2km는 평지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5시간, 6시간...
P군은 이제 탈진이다. 더는 못 걷는다. 죽을 것 같다. 졸리다.
그 때...
'저, 저기! 대피소가 보인다! 살았다고!'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P군의 근육에 힘이 생긴다. 관절에 윤활유가 뿌려진다. 뻐근한 다리가 다시 움직여진다...
그들은 그렇게 대피소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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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나무로 지어진 대피소는 그런대로 구색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만 난방이 되지 않기에 내부도 만만치 않게 추웠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오후 5시 30분이다. 체감 상 5시간 이상은 걸린 것 같았는데...
일단 대피소 안을 살펴본다. 안에 사람은 우리들뿐이다. 하긴, 이 날씨에 지리산에 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후회는 언제 해도 이미 늦은 법. 지금부터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뒤진다. 뒤져야 한다. 구석구석...
낡은 침낭이 여러 개 있다. 석유등도 하나 있지만 석유가 없다. 대피소 주변지도, 모포 몇 장, 화장실과 조리기구. 다만 수도관이 얼어서 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결정적으로 전기가 없다. 발전기가 있지만 기름이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그 외에도 응급처지용품이 있었다.
일행은 한 명만 남기고 핸드폰의 전원을 모두 껐다. 켜둔 핸드폰 역시 전력소비를 최소한으로 하도록 세팅했다. 유일한 통신기구인 만큼 아껴야 한다. 배터리는 생명 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각자의 짐들을 꺼내 모은다.
버너, 가스, 물, 통조림 몇 개, 라면 몇 개, 햇반 몇 개.
대동소이하다. 승현의 짐에는 파이어스틱과 맥가이버칼, 나침반 정도가 더 들어있을 뿐.
원래 2박 3일을 계획했으니 딱 그 정도의 물품들이다.
우선 대피소 안의 난로를 살펴본다.
안에는 타다 남은 약간의 땔감이 있다. 하지만 여분의 땔감은 없다. 그렇다고 집을 해체해서 태울 수는 없으니 일단 타다 남은 땔감에 불을 붙여본다.
화르르르
바싹 말라붙은 장작은 순식간에 열과 빛을 뿜어내며 타오른다. 주위가 환해지며 열기가 생성된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는 네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래도 한 숨 돌린다. 아, 이제야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
젖은 양말을 난로 근처에 둔다. 성호에게 지지대와 압박붕대로 응급처치를 한다. 그리고 난로 위에 냄비를 놓고 라면을 끓인다.
보글보글...
하아, 후루룩! 후르르르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신없이 먹는다. 인생 최고의 라면이다. 뽀글이와도 비교조차 안 된다.
한 순간 추위를 잊었다. 가져온 참치 통조림까지 넣어서 햇반과 같이 국물을 마시니 이제 살 것 같다. 국물까지 싹 비운다. 거의 설거지가 필요 없는 수준이다. 이제 제법 여행을 온 느낌도 난다. 물론 다리 부러진 성호 빼고. 성호에게는 진통제를 먹였으니 곧 통증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식사를 마친 P군이 말한다.
...
일순간의 침묵. 이 날씨에 나갈 수도 없고 전화도 안 되니 통신이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안이 제법 춥지만 침낭도 있고 바람은 막아주니 며칠 견디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식량이 충분치는 않지만 며칠이야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물? 물은 사방 천지에 널려있다. 눈을 녹이면 그게 물이 아닌가. 설마 눈보라가 1주일 이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니까.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성호 자리에 뉘이고 우리도 얼른 자자.’
승현이 상황을 지휘한다. 아무 말 없이 따른다. 다들 그게 최선인 줄 안다.
침낭을 턱까지 올려 쓰고 덜덜 떨면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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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빠?’
P군은 무척 당황했다. 갑자기 P군의 아버지가 P군을 찾아 대피소에 온 것이 아닌가?‘자, 가자.’
P군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P군의 손을 잡고 대피소를 나선다. 친구들도 말리지도 않는다. 그것도 P군만 데리고 나간다. 가타부타 질문도 없다.
‘아빠, 친구들, 친구들도 같이 가야해요.’
P군이 난색을 표하며 말을 한다. 그러나 P군의 아버지는 P군의 손을 꽉 잡은 채 대피소 출구로 향할 뿐이다.
순간
‘P군아!’
P군의 등 뒤에서 급히 P군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P군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본다.
그곳에는...
그곳에는 놀랍게도 P군의 아버지가 서있다. 그렇다면 지금 손을 잡고 대피소를 나서는 사람은 누구인가.
P군은 당황하여 자신의 손을 잡은 사람을 쳐다본다. 아버지가 맞다. 분명 둘 다 P군의 아버지다.
그런데... 그런데 맞잡은 손이 차다. 매우 차갑다. 섬뜩한 감촉. 팔뚝에 소름이 싸아 돋는다.
P군의 동공이 커진다. 입 안의 침이 마른다. 심박이 빨라진다. 다시 한 번 손을 잡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P군의 아버지. 웃고 계신다. 그런데 입이 너무 크다. 웃는 입 꼬리가 볼까지 걸려있다. 아니, 귀 밑까지. 아니, 지금도 점점 커진다. 입이 얼굴을 벗어난 범위까지 커진다.
‘으악!!’
P군은 깜짝 놀라 자지러진다. 그대로 기어서 뒤에 있던 아버지에게로 간다. 그 순간 P군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 떠오른다. 왜 이걸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는다.
...
P군의 아버지는 벌써 3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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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1월 18일
‘으악!!’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
꿈이었다. 아주 지독한 악몽.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호흡이 아직도 거칠다.
‘왜 그래?’
친구들이 다급히 묻는다. 다들 예민하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갑작스런 비명이 들리니 잠을 잘 수가 없다. 모두들 잠이 싹 달아난다.
‘악... 악몽을 꿨어. 별거 아니니 걱정들 마.’
당황한 친구들을 진정시키고 시계를 본다. 새벽 5시 30분. 아직 어둡다. 일어나기엔 이른 시각이지만 이미 다들 잠을 깼다.
승현이 창문을 열어보더니 말한다.
‘아직 눈보라가 너무 심해. 폰도 안 터지고.’
다리가 부러진 성호를 일으켜 세우고 둘러앉는다. 계속 기다릴 수밖에.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끓인다. 그게 전부. 딱히 더 할 일은 없다.
그 때, 승현이 갑자기 바닥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더니 대피소 중앙에서 쿵쿵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야,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다리를 다친 성호를 제외하고 승현에게 간다. 승현은 바닥을 다시 유심히 살피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칼을 꺼낸다. 손바닥만 한 맥가이버칼. 그걸 펴서 바닥 틈새에 쑤신다.
끼리릭
괴이한 소리를 내며 바닥이 들린다.
빛이 스며든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에 스며든 빛은 들고 있는 손전등 뿐. 비추어 본다.
계단? 계단이다. 지하실이 있는 것 같다. 하긴 이런 오지에 저장창고가 없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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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계단으로부터 알싸한 냄새가 올라와 피부를 거칠게 핥는다. 죽음의 여신이 팔을 애무하듯 오싹하게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석실 같다. 목소리가 울린다.
저벅저벅...
승현이 손전등을 들고 발밑을 주시하며 내려간다. P군과 준호도 뒤따라 내려간다. 석유나 땔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 둘은 필수다. 아니면 위급 알림 통신시설이라도 있을지도 모른다.
시야는 매우 좁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을 제외하면 칠흑과 다름없다. 소름끼치는 적막만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날카로운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밖이나 1층도 충분히 추웠다. 오히려 지하실이니 기온 자체는 더 높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석실 특유의 한기에 오싹할 만큼 춥다.
앞장서 가던 승현이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춘다. 바닥만 살피며 가던 P군도 같이 멈춰서 묻는다.
‘야, 왜 그래?’
승현은 말이 없이 굳어있다. 손전등을 든 손이 덜덜 떨린다. 이미 대뇌의 사고기능이 정지한 듯 하다.
‘뭔데? 왜 그래?’
맨 뒤에서 오던 준호도 승현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손전등을 켠다.
...
...
...
지옥
지옥!
흔히들 힘든 상황을 지옥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곳은 문자 그대로 지옥, 그 자체.
셋은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졌다. 도망칠 생각도 할 수 없다. 이미 생각이 멈춰버렸으니까.
...
그곳에는...
그곳에는 선반이 놓여 있다.
그 선반 위에는... 시체가 토막 난 채 놓여 있었다. 차가운 지하실의 석벽에는 시신의 다리로 보이는 고기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놓인 빨간 바스켓 안에는 선반 위의 시신에서 뺀 듯 한 내장이 담겨져 있었다.
시체들은 추운 날씨 탓인지 파랗게 굳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정면의 석벽에는 한 남성이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 혀가 빠져 턱밑까지 내려온 게 참으로 규환지옥을 연상시켰다.
바닥에는 핏물이 말라붙어 살짝 얼어 있었는데, 손전등 불빛에 비쳐 루비처럼 검붉은 빛을 반사해 낸다.
쿵!!
심장이 약한 준호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그 소리에 P군과 승현은 그로기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래도 모두 군필자 아닌가. 매우 놀랐을지언정 소리를 지르거나 미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승현이 말한다.
‘일단 저 쪽에 석유통과 땔감이 있으니까 들고 올라가고 여기는 봉인하자.’
역시 승현은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필수품부터 챙긴다. 놓여있던 수첩도 하나 찾아서 챙긴다. 그 때까지도 P군과 준호는 덜덜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너무 무섭다.
내가 꿈을 구고 있는 것인가. 평소에 잔인한 장면을 못 봐서 수술영상도 못 보는 내가... 이런 참혹한 지옥에 오게 되다니.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고작 무섭다 뿐이다. 몸도 말을 듣지 않는다. 다리가 부러진 듯 휘청거린다.
비틀거리며 넘어질 때, 짐을 다 챙긴 승현이 석유통과 땔감을 들고 P군을 부축한다.
‘정신 차려! 일단 올라가자. 준호야 너도 일어나!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승현의 고함.
정신이 조금 든다. 안 움직이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서 기듯이 1층으로 올라간다. 올라가자마자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를 닫는다.
‘왜? 무슨 일인데?’
1층에 누워있던 성호가 묻는다. 그러나 셋은 말이 없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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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타닥...
가져온 땔감으로 승현이 난로에 불을 지핀다. 석유도 꽤 있다. 석유램프를 켠다. 다만 이게 가솔린은 아닌 것 같다. 발전기를 돌릴 수 는 없을 듯하다.
어느 정도 생기를 찾은 승현이 말한다.
‘복장을 보아하니 우리처럼 조난객 같고, 시신의 상태로 보아 죽은 지 얼마 된 것도 아니야. 한 번 수첩을 살펴보자. 기록된 게 있을 것 같으니.’
시체라는 말에 성호가 소스라치게 놀라 묻는다.
‘뭐, 뭐? 시체? 여기 시체가 있다고?’
그러나 승현은 아무 말 없이 수첩을 본다.
- 1월 3일. 벌써 여기 고립 된지 한 달이 지났다. 식량은 보름 전에 떨어졌다. 눈보라가 그칠 생각을 안 한다. 통신도 쭉 먹통이다. 이제 남은 배터리도 없어서 폰을 켜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날씨가 나쁘다보니 등산객도 없다. 살아남은 우리 셋이 의지해서 버텨내고 있지만 희망이 점점 흐려진다. 누가 빨리 구해다오!
- 1월 4일. 나는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글을 적을 기운도 없다. 눈을 퍼먹으며 보름을 버텼지만 이제는 한계다. 마지막 수단도 고려해야 한다.
- 1월 5일. 정민의 고기를 먹었다. 죽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하실의 냉기가 부패를 막아준 것 같다. 내장을 꺼내고 살을 조금 떼어내 구웠다. 역겹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날은 여전히 눈보라가 거세다. 내가 정민이의 배를 가르는 것을 본 지원이는 그대로 대피소를 뛰어나가서 여태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도 죽었을 게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원혁이에게도 고기를 건넸으나 먹지를 않는다. 결국 내가 다 먹었다. 하늘이시어! 저를 용서치 마소서!
- 1월 6일. 오늘도 정민이를 조금 먹었다. 다행히 땔감은 충분하다. 땔감이라도 없었다면 진작 얼어 죽었을 것이다. 속이 메스껍고 역겹지만 억지로 다 삼켰다. 역시나 원혁이는 인육을 거절한다. 이제 물어도 대답도 못할 만큼 약해진 녀석... 저 녀석...
- 1월 7일. 이곳은 연옥이다. 현세와 지옥의 중간. 나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었고 현세의 문은 아직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벌써 5주째 통신이 두절될 만큼의 눈보라가 계속된다. 그래. 여기는 연옥일 테지. 나는 오늘도 정민이를 잘라낸다.
- 1월 8일. 갑자기 정민의 육신이 부패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녹여서 자르느라 따뜻하게 불을 피워서 그런 것 같다. 아직 덜 썩은 다리만 하나 잘라놓고 시체는 밖에 벼랑으로 던졌다. 더 놀라운 점은 대피소 문고리를 잡고 죽은 시체가 하나 있었다. 지원이였다. 뛰어나가더니 고작 여기서 죽어있을 줄은 몰랐다. 추운 날씨여서인지 보관상태가 양호하다. 정민 대신 지원이를 들고 와 지하실에 뉘였다.
- 1월 9일. 원호가 결국 죽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헛소리를 하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가보니 이미 심장이 멎어있었다. 이제 정말 나 혼자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오늘은 지원의 배를 갈라 손질했다.
- 1월 10일. 아직도 눈보라가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원호의 시신은 보관을 위해 대피소 밖 눈 속에 묻었다. 오늘도 고무처럼 질긴 얼어붙은 시신을 잘라 녹인다. 이제는 역겹지도 않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 1월 11일. 문득 삶이 부질없어진다. 이 눈보라는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내가 죽으면 그칠 것 같다. 나는 죽으면 지옥에 가겠지.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 1월 12일. 지원이를 먹으며 생각해 봤다. 왜 이런 기상 이상이 발생한 것일까. 첫 날 죽어서 대피소에 오지도 못한 철민이가 부럽다. 그 친구는 고생은 안 하고 죽었네.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이 연옥이 끔찍하다. 나는...
- 1월 13일. 몸에서 열이 난다. 아무래도 식중독 같다. 응급약을 먹어보지만 이게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조금 더 익혀서 먹어야겠다.
- 1월 14일. 설사가 심하다 아무래도 고기가 상한 것 같아서 새로 원호로 교체했다. 추워서 오래 버틸 줄 알았는데 금방 상하는 것 같다. 원호를 새로 손질했다. 이제 이게 마지막 식량이다.
- 1월 15일. 고열, 구토, 설사가 심하다. 나도 죽어간다. 원호의 시신은 동상이 심해 썩어 들어가 있어 먹을 수도 없었다.
- 1월 16일. 힘들다. 지옥? 무섭지 않다. 여기보다 힘들까?
- 1월 17일. 힘든 하루였다. 이것으로 김인철의 일생을 마친다. 2016.01.17 05:30
...
수첩은 그렇게 끝났다. 1월 17일... 승현은 소름이 끼친다. 우리가 도착한 바로 그 날이다.
P군과 준호, 성호도 말없이 수첩을 정독한다.
그리고 오랜 침묵...
...
이 수첩은 그들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식량, 식량을 아껴야 한다. 최대한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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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주가 지났다. 얼마 안 되는 식량은 아낄만큼 아꼈지만 결국 동이 났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성호는 다리의 치료를 받지 못해 감염이 되었는지 사경을 헤매고 있다.
모두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한다. 고민한다. 이대로 성호가 죽으면 먹어야 하는가... 성호의 상태로 보아 내일 모레를 넘기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역시나 눈보라는 그칠 생각을 안 한다.
승현이 무겁게 말한다.
‘우리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몰라.’
난데없는 말. 그러나 P군과 준호는 그 뜻을 이해한다. 식량이 없다. 눈보라는 언제 그칠지 모른다. 그래도 지난 조난객보다는 낫다. 벌써 2월이지 않은가. 눈보라가 아무리 오래가도 3월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눈도 녹을 것이고.... 다만 최대 한 달을 버티는게 쉽지 않다. P군이 말한다.
‘나는 차라리 죽으면 죽지 못 먹어.’
원래부터 비위가 약한 P군이다. 그리고 이건 비위의 문제도 아니다. 선택은 본인의 몫.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다.
승현과 준호는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꽉 쥔다. 결심을 한 게다. 저기, 이제 거의 다 죽은 그들의 친구. 성호.
분위기 탓일까. 그 뒤로도 성호는 5일을 더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지옥으로 갔을까 천국으로 갔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승현과 준호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들 역시 지옥문을 열었으니까...
P군은 1층에 쭈그리고 앉아 그냥 울기만 했다.
이해는 간다. 나도 살아남으려면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차라리 이대로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가는 편을 택한 것이다.
...
그렇게 성호는 차디 찬 지하실 선반에 뉘어져 손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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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가 더 지났다. 여전히 눈보라가 거세다. 통신도 먹통이다. 생각할 기운도 없다. 반 쯤 감겨있는 눈에 승현과 준호가 보인다. 그들 역시 앙상하다. 그래도 생활할 기운은 있는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다.
아아, 나는 이제 말은커녕 생각할 기운도 없구나. 이대로 죽는 것인가. 2월 말인데도 눈보라라니... 여기는 정말 연옥이 맞나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직 집에서 애타게 내 귀가를 기다리실 어머니도 생각난다. 동생, 매일 치고 박고 싸우던 동생도 생각난다. 이제 나도 성호처럼 되는 건가. 며칠만 더 버티면 눈보라도 그칠 텐데...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반이다. P군은 남은 힘을 쥐어 짜내 기어본다. 대피소 출구로...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연옥은 벗어나서 죽고 싶다.
덜덜 떨리는 팔다리를 놀려 엉금엉금 출입구로 가 문을 연다.
승현과 준호는 P군을 쳐다보지만 아무 말도 없다. P군의 마음을 이해해서일까... 그저 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땔감을 더 집어넣을 뿐이다.
밖은 매우 추웠다. 안은 그래도 난로가 훈훈히 데워주고 있었는데, 여기는 살을 에는 추위다. 몸이 약해져서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어차피 곧 죽을 몸. 밖은 눈보라와 함께 천둥번개도 심하게 치고 있다.
P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외친다.
‘나는, 나는!! 지켜냈다고!’
그 순간 벼락이 쾅!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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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1 Start!'
‘한 번 더’
‘3, 2, 1 Start!'
여기저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진땀 흘리며 P군의 가슴에 무엇인가를 댄다.
제세동기다. 멈춘 심장에 전기자극을 주어 다시 뛰게 만드는 장치. 그리고 유리창 너머에는 P군의 어머니와 동생이 울며 P군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뒤, P군이 의식을 회복한다.
‘여... 여기는 어디지. 죽은 것인가.’
그러나 옆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이 보인다. 어머니는 P군의 손을 잡고 울고 계시다가 P군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목이 멘 목소리로 입을 여신다.
‘내 새끼, 내 새끼, 살았구나, 살았어. 고마워, 고맙다 얘야.’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P군의 어머니. P군은 아직 뭐가 뭔지 상황 파악이 안 된다. 그런데, 옆에 죽은 성호가 서 있다.
혼란스럽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무 말을 못하는 P군에게 성호가 조심스레 말한다. 성호의 다리에는 깁스가 감겨있다.
‘역시, 너도 같은 곳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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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나고 우리는 사실 곧바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넷 모두 혼수상태. 게다가 성호는 골절까지 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모두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3주 차, 성호가 가장 먼저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P군은 5주 만에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럼 준호, 승현이는?’
다급히 그들의 안위를 묻는다. 그러나 성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걔네들은 내가 깨어나고 하루정도 지나서 다 죽었어...’
...
충격!!
...
우연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들이 성호의 육체를 먹어 지옥문을 여는 순간, 그들은 정말 지옥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그곳은 정말 연옥이었을까. 그 둘은 아직도 대피소에서 이번에는 내 시신을 먹으며 지내고 있을까. 그곳에서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신만이 알 수 있겠지.
옆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적는다.
P군 코마 회복, 05:30.
'대체... 지리산은 왜 3월 말이 되어서도 눈이 오는 거냐...'
승현이 준호에게 말한다. 준호는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잘 구워진 고기를 씹어 삼키고 있다.
김상훈 작가 2015 年 作 (불펌 삼가 바랍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