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잘린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가서 취재하면 그만이다. 기사를 취재할 실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되었건 여성이고 회사에서 잘린 보편성을 지닌 사회적 약자이다. jtbc는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보도했기 때문에 세월호 사고때도 그 이후에도 그들의 편에 서 보도를 하고있다. 고소를 당한 반대자들 엄연히 얼굴도 보이지않고 실체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일일히 댓글 달며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가 있을까? 그것도 감정적으로 쓴 혐오와 조롱의 글에 그 시궁창속에 뛰어들어간 기자가 이성도 없고 감정이 난무하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글을 썼는지 여쭤보고 인터뷰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편파보도를 정정하고 싶으면 누군가는 얼굴을 내밀고 당당히 티비에 나가 인터뷰 해야한다. 프로파간다식 여론몰이, 선동 이딴 것들을 정의라 부르짓으며 게시판 뒤편에서 자아도취에 빠져 똥오줌 못가리지 말자는 말이다.
이십여년 전 친누나가 이대 다닐때도 그랬고 졸업하고 나서도 속칭 사람들이 말하는 꼴페미 였다. 누나와 나는 페미니즘에 관해 단 한번도 설전을 벌인 적이 없다.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시험문제나 맞추면 되는 책을 직접 찾아 100페이를 넘겨보는데 네시간 반이나 걸리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좋아했고, 그의 마누라 시몬 느 보봐르의 책, 제 2의 성 이란 책이 책장에 꼿혀 있는 걸 본 누나는 내게 페미니즘의 페 자도 꺼내질 않았다. 페미니즘, 그런 작가라고하는 명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고, 그저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에 의거 그리고 이전 작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충격적인 문장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도 좋아해서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책을 사 문장들을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은 누나가 자기가 배고파서 끓여 먹은 라면, 손에 물을 묻히기 싫으니 설겆이 좀 해달라고 내게 와 빌었다. 마지못해 그게 그렇게 하기 싫은거냐라며 해주었지만 그런 모습이 흡사 사촌 여동생에게도 보였고, 엄마에게서도 혹은 동거하는 여자 친구에게서도 보았다. 모든 여자 아니 사람이라면 귀찮고 싫은 일들이 있는 법이다.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고 하게 되면 아기의 똥기저귀를 만져도 전혀 더럽다 느끼지 않고 하게 된다.
인류학적으로 보거나 혹은 역사적으로 어떤 문명, 문화, 계급, 계층 간의 특성을 살펴보자면 경제적 풍요로움에 잘 사는 사람들은 싸울 이유가 없고, 여유롭게 평화롭게 교양을 즐기며 겸손의 미덕을 알고 산다. 못 살고 어렵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항상 복잡다단하고 어떤 불만(이를테면 성적인 욕구불만)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가 되거나 법의 테두리안에서 어떤 대상에 해꼬지를 하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높이려 부단히 애를 쓴다. 실례로 못 사는 지역에 가 일을 해보면 아니 주변에서도 사회적 계층 구조 밑바닥 일을 해보면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냐에 따라 형님동생하며 친구가 될 수도 배신과 배반에 의해 적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인 이익보다는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가난이라는 멍에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시해준다. 도대체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 누구나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보편성이 그 사람의 언변과 행색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가난을 혐오하는 보편성이 존재한다.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익명성의 거울 뒤에서 너무도 각박한 말들, 그리고 어떤 정의로움도 정해지지 않은 굴레 안에서 쳇바퀴돌듯 민감하게 서롤 비판한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뒷담화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언제든 스마트 폰을 켜면서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존중, 명예 그런 것들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개념으로 갖다버린지 오래인 쌍놈들의 언어로 하향 평준화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시간낭비인 인터넷 세상으로 전락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