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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민폐적 인간.
게시물ID : phil_124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Young.K
추천 : 2
조회수 : 66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9/19 22: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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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보통, 연약한 인간이 생태계의 정점에 군림하게 된 원인으로 손꼽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이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모두가 협동하여 해결하는 집단행동을 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정말 협조적일까?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모두가 조금씩 손해를 보는 것이 치명적인 위험을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일 경우, 인간은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현명하고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늑대 무리가 나타나는 마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늑대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가 나타났을 때, 주민의 수는 99명. 늑대는 9마리다. (각각의 숫자는 기본적으로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늑대들은 한 달에 한 명 꼴로 가장 부주의한 마을 주민을 죽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늑대들이 주기적으로 사람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희생자가 나올 때마다 마을 주민들은 늑대 사냥에 나설 기회를 갖는다.
늑대 사냥에 나설 경우 사망자 숫자는 전력차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늑대가 주민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한 번의 공격이 필요하고,
주민이 늑대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열 번의 공격이 필요하다.
즉, 늑대의 선공을 전제로 할 때, 최소 9명에서 최대 33명의 주민이 사망하며, 주민의 숫자가 35명 미만이 되면 마을은 전멸한다.
마지막 조건은, 늑대 무리를 마을로 끌고 들어올 경우, 마을은 혼란에 빠진 패널티로 늑대에게 2회 선공을 허용한다는 조건이다.

자. 여기 마을 근처에서 늑대 무리를 만난 마을 주민 A가 있다.
A의 선택지는 두 개가 있다.
· 하나는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복수를 해주기를 기대하며 장렬히 늑대에게 잡혀 죽는 것.
· 또 하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마을 안으로 늑대를 끌어들여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희생자가 적은 방법은 A가 혼자 죽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이 협동해서 늑대를 잡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늑대를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9년 내에 마을은 전멸한다.

당연히 A 혼자 죽어야 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런 A를 기리며 늑대를 잡으러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아무도 이 늑대들이 계속 다른 주민들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늑대들이 앞으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몇 명이 죽었건 간에 늑대 무리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이득이다.
이것은 심지어 이미 수십 명이 죽은 상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해치는 늑대를 가만 놔두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다른 문제는 어떨까?

어느 마을 근처의 개천에서, 복잡한 바닥 구조로 인해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매 년 누군가가 빠져 죽는다거나,
매 년 산사태가 발생해 누군가가 죽는데도 아무도 예방대책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거나,
마을 지하수가 오염되어 주민들이 모두 병들어가는데도 의심스러운 인근 공장에 소송을 걸었을 때의 패널티가 무서워 서서히 유령마을이 되어가거나,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사람이 다른 '직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외로운 투쟁을 한다거나,
희귀한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아무런 의료적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로 격리되어 죽어가거나,
섬에서 나무가 모두 사라지면 모두 공멸할 것이 확실한데도, 단지 그게 '오늘'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나무를 벤다거나,
이산화탄소 배출을 제한하지 않을 경우 치명적인 기온 상승이 예견되는데도 이상기온 피해를 본 것이 자기도 아니고, 서로 이득을 포기하기 싫어서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다거나...
.....

이러한 반복되는 혹은 반복되지 않는 문제들을 접하며 집단이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 무엇일까?
위의 늑대의 예를 들 경우, 집단이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덕목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독립성과 능동성보다는 책임감 없이 주변에 민폐를 끼치려 드는 후안무치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늑대 무리를 마을 안에 끌어들이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저곳의 의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행위가, 장기적으로 보아 늑대 무리를 퇴치하고, 전염병의 재창궐을 막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다.
얼마 전에 유행했던 메르스에 대한 것도, 감염자가 스스로 조심하며, 의심증상이 나타날 경우엔 금전적 손실이나 직장에서 해고당할 위험을 감수해가며 자가격리조치를 취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정부 및 사회의 대응은 두세발 이상 늦어졌을수도 있다. 감염 의심자가 자가격리조치를 하기보다 스스로의 이득이나 치료를 우선시하여 여기저기 병을 퍼트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기에 그 대응이 조금이나마 더 빨랐을 수도 있다.

결론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늑대에게 희생당하는 고귀한 종족은 옛날 옛적에 잡아먹히고 없다.

살아남은 것은.
늑대에게 쫓긴다며, 늑대 무리를 마을로 끌고 들어와 있는대로 민폐를 끼치며, 모두의 분노와 눈총에도 꿋꿋했던 후안무치한 종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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