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에 없이 '작가'라는 말이 눈에 많이 띕니다.
作家, 뭔가 창작하는 쪽에 일가를 이룬사람을 뜻하겠죠.
굳이 사전을 뒤지지 않더라도 오가는 말과 글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뉘앙스는
상당한 존경심과 인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아니, 였습니다.
말도 재화와 같아서 공급이 늘고 시중에 물량이 풀리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자주 접하죠.
눈만 마주치면 '사랑한다'말하는 사람의 그 '사랑'은 아무래도 듣는 이의 귀에
저렴하게 들리기 십상입니다. 뭐 원빈, 강동원 급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요.
이렇게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이 필요합니다.
꼭 화폐처럼 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거죠.
그리고 일단 시작되면 상승압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합니다.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죠.
명칭, 혹은 호칭, 특히 직업이나 직책에 관련해서 그런 예가 많습니다.
간호사.
간호원(員)에서 간호사(師)로 바뀐 시점의 기억은 명확치 않습니다.
다만 90년대 초 전후 아닌가 추측합니다.
뭔가 기능적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같은 느낌의 원員에서 스승 사師로 레벨업,
'선생님'으로 불리는 의사(師)와 같은 위치에 올라섰으니 렙업 정도가 아니라 진화에 가까운
신분 상승입니다.
사실 간호원 이전엔 무려 간호부(婦)였습니다.
굳이 저 빛나는 여성해방투사님들의 왜곡없는 거울에 비춰보지 않아도 차별적 구조가 감지됩니다.
본질적으로 같은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의사 시다바리, 그냥 간호하는 부녀자(그분들 말구요)에서
의업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의사와 동등한 동료로서 환자들을 간호해주시는 선생님이 된겁니다.
우리는 한 세기도 안되는 짧은 사이에 한 직군에서 직업적 고하관계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완전히 타파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물론, 실제로 간호사들의 위상이 강화된건 사실이며 가끔 병원에서 보면
간호사 간에는 물론 드물지만 의사들과도 서로 '선생님'으로 존칭하는 것이 보기 좋았습니다.
말은 생각을 고정하는 힘이 있으며 호칭은 관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간호사들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주변 직군들의 인식, 그리고 무엇보다 간호사 자신들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간호부에서 간호사로의 변화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의 폭언과 고압적 태도에 상처받는 간호사들이 부지기수고
이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나 직장 내 관행은 산적해 있습니다.
상당한 발전이 있었지만 그 드라마틱한 신분상승과 비교할 수준은 아닌거죠.
간호사들의 개선된 위상이 호칭에 반영됐거나 당시 처우개선을 위해 싸우던 그들이
그 열망을 먼저 호칭에 담아냈던 것으로 보는 게 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간호사의 처우개선은 많은 간호사들의 노력과 사회전반의 의식향상에 발맞춘 것이지
이름뿐인 신분상승과는 큰 관계를 찾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간호사는 여전히 간호婦, 강코후상이지만 우리 간호사들의 위상이 그들을 압도할까요?
영어권의 nurse들은 여전히 동사'돌보다'와 같고 '보모'라는 뜻도 가진 이름입니다.
우리의 간호사 선생님들은 nurse들을 측은히 바라봐야 하는 걸까요?
이름은 이름입니다.
깨끗이 치우는 아저씨인 청소夫,아줌마인 청소婦도 환경을 아름답게 가꾸는 직업인으로서
환경미화원(員)이 됐고,
운전하는 부속품이나 도구 같은 느낌의 운전수(手)는 국가 기술자격 중 하나인
기사(技士)와 이름을 공유하며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이 됐습니다.
식모는 가정부를 거쳐 가사도우미로 이름을 바꿔달았습니다.
구두닦이 때밀이의 경우는 뭔가 기구 이름같은 작명이 안돼보였던 건지 정부가
미화원, 욕실원이라는 이른바 '순화어'를 제안했지만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고
최근 구두미화원이나 세신사, 목욕관리사 같은 이름으로 방송 등을 통해 전파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들 직업의 현실, 아니 그 이전에 사회의 나머지 직군에서 이들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이전에 비해 그 명칭만큼 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이 역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식이 진보한 딱 그만큼이지
명칭 및 호칭의 인플레이션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미미합니다.
그냥 담백하게 중립적으로, '당선된 사람'이었던 대통령 당선자(者)라는 호칭을
하루아침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전에도 없고 마치 '당선이 직업인 사람'처럼 해석되는
'당선인(人)'으로 진화시킨 지난 2007년 몇몇 언론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혹 어느 무지한 자가 대한민국을 선진일류국가로 견인하실 불도쟈,
아니 지도자 각하를 '놈 자'의 의미로 해석할까 두려운 나머지
그럴 여지를 조금도 주고 싶지 않았던 한 송이 동백꽃 보다 붉은 마음이 흘렀을 겝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제 압니다.
'이상해씨'를 '이상해꽃'으로 부른다고 등딱지에 꽃이 피어나진 않는다는 걸요.
다시 작가님들 얘기를 해볼까요?
작가作家라는 호칭은 문자만 보면 생산자나 제작자. 좀 높게 봐줘도 제작전문家 정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요즘 우리 말 속에서는 '예술적 가치를 가진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죠.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예전에 누군가 '저사람 작가야'라고 하면 소설가를 뜻했습니다.
예술, 그것도 내러티브를 창작하는 예술작업을 하는 프로페셔널을 작가라고 지칭한 겁니다.
그러다가 사진작가, 미술작가, 드라마작가, 방송작가라는 파생명사가 등장하고
창작영역 전체의 창작자들의 지칭과 호칭, 아니 이제는 그들의 직업명 자체까지
모두가 '작가'로 통일돼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작가는 author의 번역어입니다. '저술가'라는 의미도 있지만
창작을 통해 authority, 권위 또는 권위적 기량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요즘 직업의 명칭으로 호명하는 '작가'는 영어로 옮길 때 author가 아닌 writer나 painter,
photographer, cartoonist, 정 뭉뚱그리고 싶다면 creator로 옮겨야지
자기입으로 '나는 author입니다' 라고 했다간 기묘한 눈초리와 비웃음을 사기 십상입니다.
제아무리 오다 에이이치로, 아니 이노우에 다케히코나 미우라 켄타로라도
내한 인터뷰에서 서툰 한국말로
"안뇽하시므니카 죠는 이루봉에 망가 대가이므니다'라고
말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상일 것입니다.
요새 만화계에선 쓰는 사람이 잘 안보이지만 그림쪽 한정으로 '화백畵伯'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단군신화의 풍백, 주몽 외할아버지 하백의 그 백 맞습니다.
'그림의 신', great artist, master painter 입니다. 감히 자칭할 말이 아니죠.
허영만 화백도 고 박봉성 화백도 독자가 불러주는 겁니다.
작가 또한 그런 말입니다. 감히 제 입으로 자칭하는 직업명이 아니라 평가를 거쳐
인정과 존경을 담아 바치는 경칭입니다.
실제로 직접 호칭할때도 우리말에서 '작가님' 보단 '선생님'으로 부르는 게 더 익숙하죠.
작가로 지칭될 만한 권위자 정도면 면전에서 부를 때 선생님으로 하는 게 맞는 겁니다.
작가 대신 '대가'나 '00의 신神(Author로 쓰면 '신'이란 뜻입니다)을 넣어 보세요.
면전에서 그렇게 부르면 비아냥이나 농담 밖에 더 될까요?
영화감독은 직업의 이름이지만 '영화작가'는 평론가를 위시한 관객이 헌정하는 찬사입니다.
진지한 얼굴로 영화작가를 자칭하는 감독을 보신 분 있으신가요?
소설가 중 뛰어난 일부를 '작가'라 불러주다가 나머지는 또 '소설가'로 하기가 미안해
이야기 쓰는 사람을 작가라 지칭한 것이 사태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호칭에 이런 거 많습니다.
9급 공무원 '서기보'도 부를 때 호칭은 6급인'주사님'이고
박 과장 이 주임도 접대받는 자리에선 사장님이며
오늘 처음 절을 찾은 아주머니는 무려 '보살님'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들을 봐도 스스로 그렇게 자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국적과 무관하게 숙련 한국어사용자가 아니거나 지능적 부자유를 겪는 사람입니다.
일단 시작된 말의 인플레이션은 막기 힘듭니다.
어느새 화가도 조각가도 사진가도 저술가도 각본가도 만화가도
뭔가 창작만 하면 '작가'라 가리키다가, '작가님'하고 면전에 불러주다가
어느새 직업의 이름 자체가 '작가'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진 겁니다.
불과 십여년 사이에, 창작업에 종사하는 인원 전부 다가
'권위있는 대가'를 직업이름으로 달고 다니게 됐습니다.
최근 파랑새를 타고 오간 어느 '작가님'과 독자의 '작가'호칭 명명권 논쟁은
이 같은 말의 인플레이션을 꿰뚫어보고 있던 독자와 자기 직업의 명칭이 어떤 뜻이고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생각도 안해본 채 그냥 듣기 좋으니까 '작가입니다'하고 다니던
한심한 창작자의 지적 격차가 만들어낸 충돌입니다.
당연히 말이 안통하죠. 뭔 말인지 모르는데.
만화를 그리는 그들을 만화가라 부르는 건 왠지 미안하고
작가라 부르는 건 예의바르게 느껴지는 독자.
만화가보다 뭔가 귀에 달게 들린다고 작가를 자칭하는 만화가.
이들의 행위는 만화가라는 직업과 만화라는 예술 장르를 자신들의 입으로 천대하는 모욕입니다.
만화를 사랑하고 그를 창작하는 행위에 긍지를 갖는다면
'아이고~ 대가님'이라는 호칭에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만화가라는 정확하고 중립적인 이름에서 충분한 자부심을 느끼겠죠.
말의 인플레이션은 그 대상을 높여주지 않습니다.
때에 따라 오히려 그에 대한 실체적 인식과 처우의 개선을 지체시킬 수도 있고
그 대상이 그렇게라도 높여주지 않으면 안될 만큼 비천하다는 증거로 작용해
모욕이 될 수도 있습니다.
93년 대전엑스포 때 장내 여성안내원을 이전의 '안내양'에서
'도움주는 이'에 美라는 양념까지 친 '도우미'라는 순우리말 신조어로 레벨업해줬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안내원의 처우는 어떠하며
또 '도우미'라는 지칭은 어느 위치에 가 있습니까?
극단적인 예로 교과서에도 당당히 등장하던 '갈보'는 '창녀'를 거쳐 '성매매여성'까지
어딘가 좀더 비차별적인 것 같은 용어로 '순화'됐지만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나요?
말은, 이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실체보다 중요하진 않습니다.
일본에서 의사는 의師가 아니라 의者지만 두 나라 닥터들의 위상은 같습니다.
손해사정인이 사정사가 되고 복덕방 집주름이 부동산중개사가 돼도
변호사 의사의 '사짜클럽'에 끼워주진 않으며 검사의 사가 일사事라고
士자,師자돌림 선비님 스승님들의 천대를 받을 일도 없습니다.
올바르지 않거나 누군가를 억압하는 언어, 이름이 있다면 사회 전체의 논의 속에
적절한 대안을 찾아야 겠지요. 말은 생각을 구속하니까요.
하지만, 실체의 초라함이나 빈약함을 덮기 위해 스스로, 혹은 주위에서 시도하는
'이름만 높여주기'는 결국 말의 인플레이션을 부를 뿐이고.
변하는 건 떨어지는 말의 가치 뿐입니다.
"쟤들이 우리 열받게 했으니까 이제 작가라고 불러주지말자~!"
라는 애들 싸움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번에 드러난 업계 구성원들의 의식과 현실인식을 보면
그간 좋게좋게 넘어가 줬던 우리 속 말의 인플레이션이 제법 심각한 부작용을 끼쳤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한국어에서 일어난 말의 인플레이션과 가치하락을 지금 당장 액면가로 환원시키자는 주
장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사랑했던 업계에서 일부 창작자들의 자의식이 이 지경으로 팽창해버린 데에는
별 생각없이 '작가님, 작가님' 불러줬던 우리의 무신경한 말들이 펌프질의 주문으로
작용했다는 혐의가 매우 짙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작가'라는 공경의 찬사도, '만화가'라는 자랑스러운 직업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게 제 소견입니다.
"00작가님"이라는 과공비례가 아니라 "만화가 00씨"라고 정중하고 정확하게 불러줍시다.
'만화가 박흥용씨'라는 표현 어디에도 비하의 의미는 없습니다.
동등한 인격사이의 정중한 호칭입니다.
'근성의 대부 김성모 작가님'이라 부른다고 '만화가 이현세씨'보다 쌀알 한 톨 만큼이라도
권위와 존경이 더해지지는 않습니다.
아, 물론 실력과는 무관한 교만함에 가득차 독자를 모욕하고 부정함으로써
제 직업의 존재의의까지 부정하는 자들은 이미 만화가가 아닙니다.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라 그냥 권력자고
학생의 권리를 무시하는 교사는 이미 교사가 아니라 그냥 직장인이죠, 그것도 목이 달아나야 마땅한.
그런 자들은,
"어디가서 만화그린다고 말도 꺼내면 안되는 xx같은 xx"
라고 마음 속에 정의하고
입밖으로 내지도 손 끝으로 타이핑하지도 맙시다.
우리 기억과 마음에서 흔적 없이 지우고 그럴 시간에 만화가들의 작품이나 찾아 감상하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