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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요약 : "잠시 만요! 아저씨. 지금 그 얘길 여기서 해야 되나요?"
29
드디어 그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동안 쌓인 오해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오해를 풀 수 있어서 그와 만나는 오늘이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오해를 풀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요. 그것만으로도 제게 의미 있는 만남이었지요. 제가 그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준 것이 이유가 되었든 간에 다시 헤어진다면 명분은 충분하지 않겠어요?
약속 장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어요. 버스 터미널. 왜 하필 장소를 버스 터미널로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그가 오늘을 기점으로 이 지역을 떠날 요량으로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하지만 부영역에 자리 잡은 점포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지요. 명백하게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게 제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요. 그러면 그곳에서 그가 저와 대화한 후에 고속버스를 타고 이대로 '바이-바이-?' 할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힌트라도 좀 줘요. 아저씨!'
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꽤 여유 있었습니다. 남은 시간까지 무얼 하면 좋으려나……? 여유 차릴 틈도 없이 저는 다시 터미널에서 그와의 만남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 세 번째 이유……. 갖가지 이유를 대입해가면서 저는 그와 대화를 하고 있었고 각 이유마다 그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뭐라고요!? 실망이에요. 지영 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라고 하며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첫 번째 이유는 탈락.
"아……. 맞아요. 제가 지영 씨를 너무 희생시켰어요. 제대로 깨달았어요. 미안합니다."라고 하며 제게 구십 도로 허리 숙여 인사한 후 그는 그 자리를 나온다.
두 번째 이유도 탈락.
"지영 씨……. 아무래도 저는 지영 씨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세 번째 이유도 탈락. 탈-락-?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말에 얼굴을 붉혔는지 영문을 몰랐어요. 가장 현실성이 없는 이유였는데도 말이죠. 왜 자꾸 이런 생각으로 끝맺음을 하는지…….
혹시 제가 그를 좋아하는 건가요? 말도 안 돼. 그 순진하고 착한 척 다하는 머저리처럼 행동하는 아저씨 같은 남자를……. 남-자를…….
옷장을 열어 바깥으로 나갈 옷을 찾고 있었어요. 이거 괜찮을까? 저거는? 그 뒤에 저거는? 옷을 착장해보고 전신거울에 비춰보면서 적절한 옷차림일지 궁리했습니다. 외투를 입고 벗고 옷걸이에 걸었다가 빼냈다가를 몇 번인가 반복하고는 진이 빠져서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삐리리리리-
순간 불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전화는 뭐지……? 올 전화도 없는데. 또 점장님? 설마 일을 지금 도와달라는 요청은 아니시겠지……?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
'결국 오늘 못 만나는 건가……. 미안해요 아저씨.'
침대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옷가지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에 나갈 옷은 정해놨는데……. 입고 나온 옷은 두툼한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이었습니다. 생각 없이 내려다 본 후드 티에 새겨진'18'이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18……. 뭔가 와 닿네.'
*
"네?! 점장님 또 와달라고요?"
"미안하다. 지영아, 어제 그 친구가 결국엔 입원해야할 상태였나 봐."
"점장님, 저 오늘 선약이 있는데요."
"아……. 그러니? 맞아……. 선약은 지켜야지. 그래, 지영아. 알겠다. 미안해."
"네, 점장님 죄송해요. 다른 날은 꼭 가겠는데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어서요……."
"약속은 중요한 거야. 이해한다.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점장님 혼자… 열심히 일 하고 있을게……."
"점장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괜찮아. 이따가 보자."
"……."
이따가 보자시던 점장님은 전화를 끊지 않으셨어요. 점장님은 항상 저를 챙겨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이런 난처할 법한 부탁을 최근에 하셨던 지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점장님이 제게 배려했던 모습들을 떠오르니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네네, 점장님 바로 갈-게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다음에 볼 수 있겠지……?'
*
무슨 일인지 가게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어요. 게다가 계산기 중 하나는 고장 나 있는 상태인 듯 했어요. 점장님께서는 제가 가게에 온 줄 모르고 손님 응대하기 바쁘셨어요. 저는 앞치마를 두르고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점장님의 어깨를 툭툭 쳤어요.
"예엣! 손님!? 아, 지영이구나! 와 줘서 고마워. 너 없으면 진짜 오늘 장사 접을 뻔 했다. 설상가상으로 저기 계산기도 고장 났어."
점장님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은 것처럼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네, 방금 봤어요. 얼른 일 시작할게요."
가게 안에서 대기하던 많은 손님들을 응대하였고 그들 중에는 긴 대기 시간에 불만을 표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응대하며 가게 안을 정리하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시계의 시침은 벌써 네 시를 넘어 다섯 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빽빽하게 손님으로 차있던 가게는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고장 나 있던 계산기는 이제야 고장 난 적이 없었다는 듯이 작동하였습니다. 저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계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째려보다가 텅 빈 가게 안을 살펴보고는 우울해졌습니다. 오늘이 아니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저는 그가 보고 싶어 졌어요.
오늘이 아니면 그를 볼 수 있을까……?
툭툭-
"아이, 점장님. 놀랐잖아요."
"하하하, 아까의 복수다. 얼른 가봐. 약속인가 뭔가 있었다면서?"
"아……. 근데 이미 취소했어요……."
"아이고……. 더 미안해졌네."
"괜찮아요. 다음에 다시 약속 잡으면 되니까요."
"약속 취소한 거 맞아?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는데……. 미안하다. 요즘 이상하게 번번이 너를 난처하게 만드는 구나……. 오늘 일 때문에 약속을 어긋나게 했지만, 다음에는 꼭 챙겨줄게."
저는 점장님의 '어긋났다'는 말이 귀에 와 닿았습니다. 어긋났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인연은 어긋남의 연속이었어요. 제가 그를 찾으러 떠나면 그는 저를 찾으러 제가 떠난 장소에 오고는 했지요. 지금 그는 그곳에 도착했을까요? 시계를 보니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삼십여 분정도가 남아있었습니다.
"가봐."
점장님은 저를 보고는 웃음을 지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네!?"
"착해가지고……. 얼른 가봐. 그래도 너랑 그동안 같이 지낸 게 얼마인데 모르겠니? 약속이 취소됐다고 말해도 시계를 확인하면, 약속이 취소된 게 아닌 거지. 오늘 수고했고 저녁때는 오지 말고 푹 쉬어라. 오늘은 일찍 문을 닫으련다. 그리고……. 여기 오늘 고마워서 조금 넣었어. 월급이랑 상관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 감사합니다. 점장님."
*
부영역 근처에서 터미널까지 빠르게 이동한다면 가까스로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는 직접 뛰어가는 게 빠르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그와 함께 뛰어다니면서 길러진 체력도 있었으니까요.
가볍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귀 옆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렸습니다. 기분 좋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그와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터미널과의 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멀리서 고속버스의 대열이 정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숨이 가빠졌습니다. 빠르게 내딛던 발은 속도가 줄어들고 발에 추를 달아놓은 듯이 질질 끄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터미널 안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안에 자리한 편의점까지 돌아다니며 그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와 엇갈렸을까요? 터미널 안에 설치된 전광판 시계를 보니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곳에 오지 않은 이상 엇갈릴 수는 없었습니다. 설마 그가 주차장에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깥을 나가니 익숙한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진이 빠졌던 몸에 기운이 새로 돋아났습니다. 성큼성큼 그의 그림자까지 다가간 후에 영문을 모른 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어깨를 쳤습니다.
"아저씨! 한참 찾았다고요."
그는 갑작스런 접촉에 놀라며 뒤를 돌아봤어요. 저를 보면서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였지요.
"아, 안녕하세요. 지영 씨"
"아저씨- 그 미지근한 반응은 뭐예요? 오랜만에 봤는데 반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하하, 반가워요."
"아? 반-가-워-요-? 아저씨 진짜 실망인데요? 약속 시간에 맞추려고 무리해서 나온 사람에게 반응이 너무 무덤덤한데요?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서 보자고 한 거예요? 카페나 뭐- 그런데서 만날 수도 있었잖아요?"
"아아 그게 말이죠……."
저는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불안감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이 불길한 생각이 맞는다고 해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느꼈었지요. 그러나 막상 이렇게 눈앞에서 닥치니 되레 쫓기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있기가 싫어졌어요. 마치 그 장소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한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와 마음 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가고 싶어졌어요.
"지영 씨."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봤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저는 그의 호명에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봤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잠시 만요! 아저씨. 지금 그 얘길 여기서 해야 되나요?"
제발 아니라는 답이 듣고 싶었습니다. 다른 날에. 아니, 다른 곳으로…….
"네, 들어주세요. 제 대답입니다. 제가 지영 씨를 많이 희생시켰어요. 아무래도 제 욕심이 컸을 거예요. 단순히 사람의 죽은 날짜가 보이지 않는다고 이런 일에 가담시키다니……. 그분의 말씀이 옳았어요. 저는. 아니, 제 능력은 그냥 이렇게 떠안고 살아야 하는 거였어요. 제가 죽음에 대해서. 아니, 자연의 섭리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한낱 죽음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킨다는 게 처음부터 가당키나 했을까요?
지영 씨와 같이 행동하면서 번번이 실패할 때 저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하고요. 반대로 타인의 인생을 쉽게 판단하는 건 아닐까하고요. 죽음의 순간과 시기가 각자 의미 있는 건데, 저는 그 고귀한 것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산다는 것만 고귀하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죽음 또한 고귀한 것인데 말이죠. 이런 생각에 이르니 제가 하는 행동이 덧없다고 느꼈습니다. 무의미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아저씨! 제가 저번에 그렇게 말했다고 삐치신 거죠? 그렇죠!? 아저씨, 그렇게 말한 거 제가 경솔했어요. 저는 그냥 그때 화가 나서 말한 거예요. 그게 다예요."
"아니요. 지영 씨는 정확하게 저를 판단하셨어요. 저는 어찌 보면 사이비 이론을 지영 씨께 설파한 것에 지나지 않은 거예요. 미안해요 지영 씨. 마음 다치게 할 생각 없었어요."
"그럼 내가 믿은 건 뭔데요! 해도 해도 너무 하시잖아요!"
정말 그와 끝이라는 생각에 저는 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눈물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는 제게 한 걸음 다가왔습니다.
"지영 씨, 사람은 각자 무수히 많은 인생의 행로로 가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마지막 종착지는 죽음으로 다다르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사람은 각자 철로 위의 전철인 셈이에요. 그래서 각각 자신의 역마다 상·하차하면서 인연들과 얽히고 털어내는 셈이에요. 그러다 종점역인 죽음에 다다르는 거예요. 우린 열차처럼 언젠간 노쇠해집니다. 그리고는 고장난 엔진이 멈추는 것처럼 심장도 멈추겠죠. 곧 열차는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만 있겠지요. 그래요. 그렇게 종착역에서 멈추면 어디론가 옮겨져 사라지고 말겠지요.
무거운 말이죠? 그러나 꼭 알아야할 것은 폐차된 열차는 녹고 녹아 어느새 세 제품으로 재활용되어 새로운 전철로 달릴 수 있어요. 우린 그런 삶을 살겠지요. 언젠가 다시 달릴 철로를 향해서 우린 종착역으로 향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조금 더 많이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역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경험들을 권장하는지도 몰라요.
지영 씨는 제게 새로운 경험이었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그리고 종점역에 다다르기 전까지 우리는 언젠가 어느 중간의 역에서 만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말을 기억하시나요? 만약…… 같이 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거나 힘들다면 바로 말씀해달라고……. 지영 씨에겐 지금이에요.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지영 씨."
그는 제게 등을 돌리며 바로 정차한 버스로 올라타려 했습니다. 나쁜 놈……. 적어도 난 좋아했는데……. 좋아했는데.
"아저씨! 지금은 진짜 정말 미운데. 좋아했어요. 정말 아저씨 말대로 의미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말한 거예요. 아저씨 후회해도 이제 늦었어요."
그는 제 말을 듣고는 외투 안에서 종이를 꺼내 빠르게 무언갈 쓰고는 안을 보이지 않게 접고는 제게 쥐어 주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거……. 나중에 열어봐요. 제가 간 뒤에. 아! 그리고 잠깐……."
그는 성큼성큼 제게 다가오더니 저를 안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저는 얼어붙은 채로 서 있었습니다. 제 얼굴은 그의 가슴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고요하고 냉정했던 그의 행동과는 다르게 심장 박동은 빠르게 뛰고 있었습니다.
찰나에 흐름과는 반대로 그와 저의 주변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무언걸 참는 것처럼 저를 안은 상태에서 더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힘을 풀었고, 저는 점점 그의 품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는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제게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끝인가. 버스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저를 지나쳤습니다. 그 버스 기사는 그가 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버스의 문은 닫혔고 서서히 후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우울함과 비장함이 섞인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저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한 가득 우울한 표정을 짓는 표정이 익숙해 보였습니다. 어디서……. 봤더라?
'좋…아…했…어…요…….'
어!?
'가…볼…게…요…….'
저는 꿈에서 제 방에서 그가 저와 말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울한 표정을 하고 말했던 말에 제가 어떻게 대답을 했을지 생각했습니다.
“아, 아저씨……? 아저씨 어…디…가…요……?"
몇 번이고 읊은 것처럼 익숙한 듯이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새어나왔습니다.
그가 탄 버스는 이미 멀어져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방금 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버스에 올라타고, 품에서 멀어지면서, 그의 심장 박동 소리, 종이를 쥐어주고, 제게 말을 하고, 말을 한 내용이? 내용이? 미안해요. 고마웠어요. 지영 씨. 아니, 그거 말고. 만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언젠가.
"우리는 언젠가 어느 중간의 역에서 만날 수도 있겠죠?"
"제가 말씀드린 말을 기억하시나요?"
"만약…… 같이 하는 시간이…… 힘들다면…… 바로 말씀해달라고."
"지영 씨에겐 지금이에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마지막 종착지는 죽음으로 다다르게 됩니다."
저는 황급히 뒤를 돌아봤습니다. 저와 같이 주차장에서 멀리 사라져가는 버스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전에 무덤에서 만났던 무당이었습니다. 판단이 흐려졌습니다. 그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그 여자는 어떻게 그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나만 몰랐던 건 아니었을까? 그 여자와 그는 나와 이곳에서 만난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오늘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잠깐. 말도 안 돼."
저는 종이를 움켜진 손을 천천히 폈습니다. 깔끔한 상태로 건네받은 종이는 이리저리 구겨져 있었습니다. 종이를 펴자 안에는 휘갈겨 적힌 글자가 보였습니다.
'숫자가 늘어나고 있네요.'
저는 읽자마자 주차장을 떠나는 버스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제발 신호 때문에 버스가 멈추길……. 버스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저와 버스의 거리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이! 어디가요! 멈춰요. 멈추라고!"
저는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 질렀습니다. 숨이 가빠져도 뛰었습니다.
버스와 거리가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리 지르고 울면서 뛰어가는 저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버스를 멈춰 세울 수만 있다면요. 그리고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면요.
"아저씨이! 아저씨-이!!"
버스는 신호에 걸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힘을 내어 달려갔습니다. 숨은 턱까지 차올라서 공기가 새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나는 호흡을 크게 내쉬었습니다. 발은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다는 듯 점점 움직임이 느려졌지요. 아니, 바람이며 땅이 저를 뒤에서 당기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허…억. 허어…억. 아…저…씨이… 제…발 가…지…말아요. 어…어디…가요."
바로 앞까지 따라왔을 때 신호는 바뀌었고 버스는 무심히 떠났습니다. 저는 떠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주저앉고 울었습니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고 바로 돌아봤습니다.
"뭔 여자가 왜 그리 빨라!? 이거…… 그 사람이 당신한테 주려던 거야."
무당은 제게 수첩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그 수첩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수첩을 가슴에 안고 하염없이 울음을 쏟았습니다.
***
그는 무당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기밀 사항을 손에 넣은 정보원처럼 행동했다. 조심스럽게 무당의 집으로 들어섰고 그의 인기척에 그녀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당은 혀를 끌끌 차면서 물었다.
"쯧쯔- 이런 누추한 곳에 당신이 왜 왔어?"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는 그녀의 공격적인 어투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듯이 당황하면서도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뭐 때문에 왔어? 그것만 말해."
"실은……."
그는 처음에 지었던 어수룩한 표정과는 다르게 그녀에게 설명할 때는 단호하고 엄정하게 말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무당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아연하며 있었다.
"당신 미쳤어? 정말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해주십시오."
"당신이 뭔데 해주고 말고야!? 내가 신이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해?"
"해주세요."
"재수 없으니까. 얼른 꺼져!"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난 이런 일에 관여 안 해. 하면 안 되고. 내가 말했지? 당신이 하는 짓은 말도 안 된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일에 그 여자를 끼어들게 하지 말랬잖아!"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영 씨를 살리고 싶습니다."
"당신 재주 있잖아. 죽는 날짜가 보인다며! 왜? 그 여자도 그렇게 살리려고 하면 되잖아!"
"지영 씨는 안 보였어요."
그의 대답에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당연히 그가 지영의 날짜를 알고서 같이 행동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 여자만 안 보였던 거야? 확실해!?"
"네, 확실해요. 제가 여태껏 봤던 사람들은 전부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영 씨만 날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신비감에 사로 잡혀 같이 일하자고 했던 거지요."
"당신한테는 큰일이겠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죠? 당신은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겁니까? 죽은 사람의 넋만 기리면 되는 겁니까?"
"당신이야말로 뭣 때문에 그렇게 귀중히 여기는 생명을 멋대로 각색하고 짓밟는 건데?"
"예?"
"말 한번 잘했네.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을 살린다고? 그게 고귀한 거라고? 그래서 사는 것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그러면 죽은 사람들은 고귀한 삶에서 벗어난 건가? 당신은 어째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죽음은 고귀한 게 아니란 건가? 나같이 죽음에 대해서 접하고 느끼는 사람들은 당신처럼 생명의 존중이라든지, 고귀함이라든지 하는 가벼운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해.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잘 살까만 생각하지.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 안 해. 왜냐고? 두렵거든. 무섭거든. 그렇게 생각하면 빨리 죽을 것 같거든.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죽음의 소리가 들려. 매일같이 들려. 하나 같이 다 저주스러운 말 뿐인 것 같지? 아니야, 틀려. 사는 사람과 똑같은 말이야. 그냥 일상적인 말들이 들리는 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죽음은 고독, 외로움, 절망, 슬픔에 절절할 것 같지? 죽음은 한낱 그런 감정들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야. 더 풍부할 수도 있어. 그들은 살았던 때보다 모든 것에 초월해져 있거든.
당신이 그 여자한테 뭘 바라고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렇게까지 설명 들었으면 알아서 내 앞에서 사라줬으면 해. 그리고 집에 가서 귀는 꼭 닦고."
말을 마친 그녀의 표정은 더욱 퉁명해졌다. 그의 기세를 보기 좋게 눌러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응접실에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지영 씨는 제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있습니다."
"가치?"
"그들은 초월해있다고 하셨죠? 저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그녀와 같이 행동하면서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구할 때 매번 허탕 치는 이유를 말이죠. 저는 그들을 구할 절박한 심정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단지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변화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습니다. 매번 허탕 치는 도중에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현장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뛰어다녀도 구해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해있었고 그날은 기필코 사람을 구하리라는 다짐을 했었죠. 저 또한 물론이었고요. 죽을 운명이었던 그 사람이 시간에 가까워졌음에도 눈앞에 보이지 않자 초조해졌어요. 결국에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거의 못 살리겠다 싶었죠. 저는 반포기 상태였어요. 많이 남아봐야 십초 정도 남아있는 상태였을까요? 그런데 그때 지영 씨가 그를 구하려고 차로에 뛰어들려고 했어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했어요. 첫째는 그를 구하게 놔둔다. 둘째는 그녀를 막는다. 저는 두 번째 행동을 취했어요. 결국 그는 맹렬하게 돌진하는 트럭에 의해 사망하였죠.
그녀는 불 같이 제게 화를 냈어요. 저는 되레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죠. 그녀는 살았다고. 그때 알아차렸어요. 단순한 노력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가 없겠구나. 그리고 사람을 구할 때는 죽음의 관념과 통할 수 있는 초월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지영 씨의 머리 위에서 스멀스멀 연기가 피어올랐어요. 저는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죠. 그 연기는 주변의 공기를 흡입하면서 자신의 몸집을 키웠고 이후에 어느 형태를 띠려고 했죠. 그 형태는 점점 어느 글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익숙한 숫자로 변해갔어요. 하나씩 숫자로 바뀌었고 마지막 자리를 확인한 순간 결심했어요. 저는 지영 씨를 구하겠다고."
"당신……. 정말로 결심한 거야?"
"네, 지영 씨가 저보다 하루 전날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에 이 여자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죽음의 관념과 통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이 감정은 있고 생과 죽음 사이를 통할 수 있는 것이죠. 그동안 저는 확실히 지영 씨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유일하게 제 모든 것을 알려 준 사람이죠. 물론, 지영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요."
"한심해 빠졌군.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서 자길 희생하겠다는 사람이라니."
"그녀는 제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를 느끼게 한 사람이에요. 그 이유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당신 운명이랑 맞바꿔봤자 어차피 하루만 더 사는 거잖아?"
"혹시 모르죠.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죽음은 그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하면 좋겠어요. 아! 참고로 비밀입니다. 하루 차이 나는 거……."
"알겠어. 참고로 말하는데 이거 실패할 확률이 더 크다? 꼭 알아둬. 아참, 그리고…… 당신이랑 그 여자의 추억 거리를 갖고 와야 돼. 같이 찍은 사진 같은 거. 뭐!?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 같이 다닌 거 맞아? 그러면 주고받은 편지 같은 거 있잖아. 쪽지라도 괜찮아. 그것도 없어? 아휴 이 사람아. 그동안 뭐했니. 그러면 가장 희박한 확률인데 당신이 그동안 그 여자랑 지내면서 생각해온 느낌이나 감정들을 수첩에다 적고서 나한테 줘. 이렇게라도 해야지 뭐. 이 사람 진짜 힘들게 만드네……. 죄송은 무슨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래서 접선 장소는 어디로 할 거야? 터미널? 너무 위험하지 않나? 애매한 시간대로 정했다고? 사람이 거의 안 가는 곳으로? 20석 되는 좌석을 당신이 다 살 수가 있나?"
***
30
띵동-띵동-
지영이의 집을 방문했다. 그동안 쓴 지영이의 부탁들과 함께 말이다. 안에서 여보세요- 하며 지영이 어머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어머님. 저 강석입니다. 그러자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고- 강석이구나.
문이 열렸다.
마치 오늘은 그녀와 같이 집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백여 페이지의 종이 뭉치로만 보였던 것이 지영이의 모습으로 보였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영의 어머님은 내가 가지고 온 종이 뭉치를 보고 표정을 달리 했다. 그러고는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칠 동안 소파에 앉아서 내가 쓴 종이 뭉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 지영아. 너의 부탁을 들어주는 날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집 안에 조금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영의 어머님은 조용히 쉬지 않고 정독하셨다. 끝장을 넘기고는 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는 흐느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터미널에서 뛰어나와 그의 수첩을 안고 울었던 지영이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이 되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그녀의 흐느낌은 서서히 멎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마지막 눈물을 찍고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 없이 적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지영이를 보내는 의식인 듯. 지영의 어머님은 감정을 추슬렀는지 말을 꺼냈다.
"놀랍군요. 딸아이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여러 가지로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참……. 세상일이라는 게 쉽게 생각할 수가 없네요. 아참, 강석 씨. 하는 일이 소설가라고 했나?"
"아……. 아니요. 아직은 지망생이에요. 지금은 변변찮은 글 조금씩 쓰고 있어요."
그녀는 뜸을 들였다. 궁금해 하며 쳐다보는 내게 결심한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강석 씨에게 부탁이 있는데……."
"어머님, 말씀해보세요."
"지영이 얘기를 쓴 것들을 책으로 써줬으면 해서……."
"네? 어머님. 제가 어떻게 이걸…….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 강석 씨도 알다시피 지영이도 글 쓰고 싶었으니까. 그게 딸아이를 위해서 엄마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녀의 제안이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딸아이의 유언과 같은 일기를 책으로 낼 수 있을까? 그러다 지영이 또한 나처럼 작가를 하고 싶어 했다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이 내용은 그녀의 삶과 같은 것이라서 부담감이 들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삶의 내용이기에 가장 진솔하게 쓰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써보도록 할게요. 어머님, 혹시 제목은 어떤 걸로 하는 게 좋을까요?"
"으음……. 그와……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라고요?"
"'그와 지영이는 어디로 갔을까?'라고 할 수 없잖아요. 지영이의 일기를 읽어보니까 갑자기 그 사람이랑 우리 지영이는 어디로 갔을지 궁금해요. 여기에서 나왔듯이 그 사람 덕분에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처음에는 딸아이를 원망했었는데 지금은 안 하려고 해요……. 그나마 위로되는 건 자기 스스로 어떻게 죽을 지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상처가 되는 건 더 살 수 있었음에도 딸아이는 저를 생각하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이렇게 딸아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사실이 저를 초라하게 만드네요. 한편으론 딸아이한테 그렇게 못 해줬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원망하지 않으려고요. 딸아이를 원망할수록 죄 짓는 기분이 드니까요. 이제 그만 울어야겠어요. 딸아이가 보고 있겠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 딸은 그 사람이랑 같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같이 오붓하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종이 뭉치를 다시 한 번 가슴에 끌어안고는 아무 말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딸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안고서 애써 미소를 띤 그녀에게 햇볕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