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메탈키드가 그러했듯, 장님 코끼리 더듬듯 나의 취향을 넓혀가고 있던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치렁치렁한 장발이었던 그가 소싯적엔 이대팔 가르마를 하고 아이돌 취급을 받았었고, 그가 작곡했던 사상 최고의 명곡이 만삼천원짜리 멜로디언으로, 이불 속에 숨어 호호 불며 만들어졌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때였다. 그 때의 나는, 그가 고음과 저음을 아우르며 불렀던 <Here I stand for you> 나, <거위의 꿈> 보다 더 사랑했던 <민물장어의 꿈>을 노래방에서 부르고 다녔었다. 그에 심취한 나머지, 나는 심지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한 꼭지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2할 정도는 그에게 할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빠심으로 점철된, 소년기였다.
그가 떠들던 소리가 논리가 부족하고 괴리가 있었더라도, ‘나는 니들이 뭐라고 하건 좆도 신경 안 써’ 하는 듯한 모습이 좋았다. 징 박힌 팔찌와 가죽점퍼를 입고 백분토론에 나와, 가오 안 살게 탈탈 털리던 그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하잘것없는 딴따라 주제에, 라며 그가 세상과 맞지 않는 부적격자라 손가락질 당했을 때 조차도 욕 많이 먹으면 영생한다데, 따위의 농담으로 낄낄댔었다. 그러니까, 심야 라디오방송에서 시답잖은 80년대 유머로 방송시간을 채우던 그가, 방송이 하기 싫어 삼태기 메들리를 틀어놓고 주차장으로 도망갔던 그가, 아내와의 멋진 로맨스 이야기가, 결연한 모습으로 찬조연설을 하던 그가, 그리고 그가 믿던 사람이 한없이 추락했을 때, 좌절하던 모습이,
인간적이었다. 마냥 인간적이었다. 인간적이어서, 나에겐 영웅이었다. 나의 소년기는 그러했다.
이제서야 나는 그의 죽음으로 나의 소년기를 다시 되짚는다. 그의 비보를 모니터에서 접했기 때문이라도, 그가 내 소년기의 영웅이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이라도, 이런 병문이 열없는 변명거리가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더더욱.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아픈 이유는 기분 탓일 거다. 그 쯤 해두자.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