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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17.양후열전(穰侯列傳)
게시물ID : history_124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8
조회수 : 69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1/04 13:37:17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양후열전(穰侯列傳)
 
천하가 하루아침에 통일된것은 아니다.
그간의 세월동안 쌓인것이 발현하고 누대에 걸친 공적이 모여서 마침내 광활한 중국대륙을
하나로 일통천하 한것은 진나라가 여러대의 노력으로 이뤄낸것이지 결코 진시황 한명의 힘은 아니었다.
 
진나라는 옛부터 말과 가축을 치던사람들의 후예로 요순시대부터 하여 하.상.주 의 삼대에 걸쳐 공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나라 대에 들어와서 서융의 변방에 영지를 받고 또 한참 후에야 제후로 봉해지고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주나라 왕실의 번병으로 서융의 오랑캐를 잘 제어한 공로였다.
 
그러한 진나라가 이제 나라의 강성함을 믿고 천하 제후들을 핍박하고 주왕실을 업신여기며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천하를 호령하게 된것은 여러대의 훌륭한 군주들이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대의 명신양장 들에 힘입은바도 컸다.
 
황하와 주변의 산으로 둘러싸인 위나라를 포위해서 다른 제후들이 손도 내밀지 못할만큼 진나라를 잘 섬긴것은 위염의 공적이다.
지금부터 양후열전 을 서술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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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개서향계수(天下西鄕稽首)
 
양후 위염(魏)은 진나라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위염은 소왕의 외삼촌인 셈이다.
그 조상은 초나라 사람이며 성은 미씨 이다.
진무왕이 죽고 자식이 없어 그의 아우가 서서 왕이 되었으니 그가 곧 소왕이다.
 
소왕의 모친은 원래 미팔자(羋八子)<미 는 성이고 팔자 는 궁궐내의 여성의 직급.관명.>
라 불렀으며 소왕이 즉위하자 팔자를 올려 선태후라 불렀다.
선태후는 죽은 무왕의 어머니가 아니고
죽은 무왕의 모친은 혜문후라 불렀는데 무왕보다 먼저 죽었다.
선태후에게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그의 의붓아버지가 낳은 큰동생을양후 라 했다.
성은 위씨고 이름은 염 이었다.
선태후의 친아버지가 낳은 아우를 미융 이라 했으며 화양군 에 봉해졌다.
 
그리고 소왕의 동모 아우를 고릉군.경양군 으로 불렀는데 그중에 위염이 가장 현명했다.
진나라에서는 양후.화양군.고릉군.경양군의 네명을 사귀 라 불렀다.
 
위염은 혜왕.무왕때부터 요직에 임명되어 나랏일에 관여했다.
무왕이 죽자 여러 아우가 왕위를 다퉜는데 오직 위염의 힘으로 소왕이 즉위할수 있었다.
 
소왕이 즉위하자 위염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을 지키게 하였다.
계군의 난을 평정하고 무왕의 후를 위나라로 쫓아내었으며
소왕의 여러 형제중에 반란에 관여된자를 모조리 멸하였으므로 그 위세가 진나라에 높이 떨쳤다.
진소왕이 나이 어렸으므로 선태후가 섭정을 하고 실권은 모두 위염에게 맏겼다.
소왕14년에 위염이 백기를 발탁했다.
상수를 대신해 장군으로 삼아 한.위를 쳐서 적의 목을 벤것이 24만.
또 위의 장군 공손희를 사로잡았다.
다음해에 초나라의 원과 섭 을 빼앗았다.
위염은 중간에 여러차례 재상의 자리를 내놓기도 했으나 매번 다시 재상의 자리를 회복했다.
이때 진나라는 위염을 양 땅에 봉하고 또 도 땅을 봉하여 양후'라고 불렀다.
양후는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하동의 1백리를 얻었고 나아가 하내까지 쳐서
대소 60여개의 성을 탈취하였다.
소왕 19년에 진나라는 서제라 칭하고 제나라는 동제라 칭했다가 한달여만에 그만두었다.
양후는 백기를 시켜서 초나라의 국도 영 을 함락시키고 그땅에다가 진나라 남군을 두었다.
이에 백기를 무안군에 봉했다.
백기는 양후가 천거한 인물이기때문에 둘은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양후의 재산은 왕실보다도 부유했다.
 
소왕32년 양후는 상국의 자리에 올랐다.
양후는 병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쳐서 북택으로 침입해 대량을 포위했다.
위나라 대부 수가 가 양후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는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주서]에 이르기를 천명은 일정치 않다' 고 했으니 이것은 요행이란것이 언제나 있는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양후가 말하였다.
"천행이 항상 내게 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것이오?"
 
"위나라는 병력이 30만이고 성벽은 7인(1인은 4자)이나 되니 높으니 결코 쉽게 함락하지 못할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공격에 실패해서 도(陶)읍을 역습당하기라도 하면 상국의 군사는 전멸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국의 여태까지의 공적은 물거품이 되겠지요."
 
"좋다 대량의 포위를 풀겠다."
 
양후는 국가의 이익보다 자기의 사익을 생각해서 위나라의 공격을 멈추고 돌아갔다.
 
그런데 위나라는 그 진나라의 위협을 모면하기위해 이듬해에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분노한 진나라는 양후를 시켜 위를 쳐서 위나라군사 4만을 참하고 장군 포연을 도망치게 하고 세개의 고을을 차지했다.
양후는 봉을 더했다.
그 다음해에도 양후는 백기.호상등을 시켜 조.한.위 를 치고 많은 땅을 빼앗았다.
 
양후는 조나라등과 힘을 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역시 소대의 설득에 의해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생각하고 제나라를 칠것을 중지 하였다.
 
소왕36년에 상국 양후가 객경 조 와 상의하여 제나라를 쳐서 땅을 빼앗아 자신의 봉읍인 도 땅을 넓히려 하였다.
 
이때에 위나라사람 범수(범저)가 장록선생이라 이름을 바꾸어 진나라에 유세하였다.
범수는 진소왕에게 양후가 제나라를 치는일이 무모한일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진나라를 위한것이 아니고 양후 자신을 위한 행동이란것을 설명하여 진소왕의 신임을 받게 됐다.
범수의 이야기는 참으로 처절하고도 비상한것이 있는데 나중에 따로 열전에 소개되어 있으므로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범수는 선태후가 맘대로 정권을 휘두르는것과,
양후가 천하 제후들 사이에서 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일과,
경양군.고릉군등의 무리가 왕실보다 더욱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일이 잘못된것임을 설파했다.
이에 진소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상국양후를 파면하고 범수를 등용했다.
또 경양군등의 일족을 함곡관 밖으로 내몰아서 각자 자기 봉읍에 가서 살도록 했다.
 
양후가 함곡관을 나갈때 그의 짐수레는 치차1천승이 넘었다고 하였다.
양후는 자기의 봉읍인 도읍 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진나라에서는 다시 도 땅을 거두어들여 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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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양후에 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양후는 소왕의 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천하열국을 약화시켜 한때 진나라에 제호 를 사용하게 하였고
천하제후 모두를 서쪽으로 향하여 머리를 숙이게 한것은 오직 양후의 공적이다.
그의 부귀가 극에달해 넘쳐날때 단 한사람 범수의 지탄을 받아 신분은 좌절되고 권세는 박탈되었다.
그는 근심과 번민속에 만년을 살다가 죽었다.
왕족인 그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타국출신이야 어떠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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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양후 위염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양후는 진혜왕의 첩의 오라비로서 높은 권세와 부를 누렸으며
또한 진무왕이 죽고 소왕이 즉위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세워 천하강국 진나라의 정권과 부를 한손에 거머쥐었다.
그리하여 천하열국을 침략하여 땅을 넓히고 진나라를 강대하게 만드는데 공이 있으나
알고보면 그것이 국가보다는 자기 개인의 이익을 키우는데 더 집중했던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범수의 지탄을 받아 파면되고 양후의 토지가 진나라 국토가 되었으니
이또한 기이한 운명이라 아니할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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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 결과가 좋은쪽으로 나오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바로 양후 위염의 경우가 그러했다.
양후가 평생 꼭 그렇게 자기일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았는지는 알수 없으나
사기 양후열전에 나온 대화들을 곱씹어보면 그의 행동은 대의명분을 위한것은 아니었다.
 
수가와 소대가 양후를 설득할때 어떤 약점을 파고들었는가?
양후에게 "위나라.제나라를 공격하면 당신에게 남는것이 무엇이냐?
 오히려 위.제를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당신은 모든것을 잃게 되는것 아니냐?
 그러니 차라리 조금의 땅을 네가 받아 너 개인의 이득을 취하고 돌아가라."
는 것으로 일관된다 할수 있다.
양후는 항상 국가의 이익보다  자기 일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생각하고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왕실보다 큰 부귀영화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2천몇백년이 지나서까지 대한민국의 한 무지렁이 에게까지 욕을 쳐먹는 일개 잡놈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권세라 하는것이 자기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방편이 된것은 수천년 이래의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천하에 명분을 따라 목숨을 바치고 대의를 위해 크게 생각하는 인물을 찾기가 이리도 어렵다는 말인가?
이 대목에 있어 필자는 또다시 한숨을 쉬며 탄식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나랏일을 하면서 자기들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는자들이 매우 많았다.
예전에 왜인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철도를 놓고 항만을 건설하고 도로를 닦은것이 우리 나라를 위한것이었던가?
우리나라의 곡물과 자원을 수탈하기위해 길을 깔고 항구를 건설했을뿐
우리나라 인민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뉴라이트와 일부 친일파 후손 떨거지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를 개발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제 저 이명박이 만들어 놓은 사대강도 우리 국민 자전거 많이 타고 건강하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해야할 판이 되었나 싶다.
 
광우병 미친소도 돈 없는 서민이 소고기 사 묵을수 있게 해줘서 감지덕지 해야 할것이다.
얼마 안있으면 일본 후쿠시마산 고급 사시미와 스시를 저렴하게 먹을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우리 국민은 항상 고마워 해야 할것이다.
 
양후 위염이 땅을 넓혔으니 양후는 훌륭하고 위대한 정치가인가?
결과는 국토가 늘어나는쪽으로 귀결되었지만,
양후의 행적은 매우 반역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겨 우리나라의 산업이 발전 되었는가?
그것은 다까끼마사오가 건설차관을 들여와서 자기 배를 불리는 과정에서 떨어진 부산물일 뿐이다.
 
이런것이 그들의 공로이고 업적이라면 우리는 애초에
저 이완용과 이또히로부미와 데라우찌 등에게 큰절을 해야 할것이다.
 
권세와 위엄이 하늘을 찌를정도로 높고 부가 그 왕보다도 컸던 위염도 결국 개혁을 바라는
진소왕과 범저에 의해 하루아침에 삶과 죽음을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하나회를 척결할때 전광석화와도 같던 상도동 영감을 떠올린다.
자신의 권위를 위해 한 일이지만 그 또한 기대치 않았던 의외의 좋은 결과가 생겼으니..
 
나쁜놈이 한 일이라도 결과가 다 나쁜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폭소가 쏟아지는것은 
내가 이상한사람이라서 그런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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