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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화-인어공주
게시물ID : panic_84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케이시스
추천 : 10
조회수 : 1347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0/11/07 00:10:59
인어왕의 막내딸은 인간 세계의 왕자에게 사랑을 느껴

바닷속 세계의 행복을 포기하고 인간의 다리를 얻었다.

하지만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파도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데….

 

 인어공주는 황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목에 감은 채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은 그 노랫소리에 취해 일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영혼을 빨아들여 목숨을 빼앗으려는 거라구."

 이윽고 선원들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나체의 인어를 발견했다.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 눈부신 하얀 피부, 풍만한 가슴, 잘룩한 허리, 그리고 물고기의 꼬리 같은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은색의 비늘…… 그것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모를 갖춘 아름다운 여자였다.

 "저, 저것 좀 봐. 요물이야. 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꿈을 꾸는 것 같아.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선원들은 한결같이 인어공주에게 사랑을 느꼈다. 어떤 선원은 인어공주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갑자기 뭔가에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어떤 선원은 정신을 잃고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어떤 선원은 인어공주에게 다가가려고 발을 내딛다가 배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이런 식으로 몇 척의 배가 침몰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수없이 많은 선원들이 현혹되어 죽어갔다. 그래서 인어공주는 자기가 죄 많은 여자라는 생각으로 슬픔에 잠기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다의 평화를 침범하는 불손한 인간들을 유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바다의 평화를 흐트러트리는 자, 바다의 신성한 왕국을 침범하는 자들을 무사히 육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바닷속에서는 살 수 없다니, 인간은 정말 한심한 생물들이야.'

 인어공주의 머리 속에는 점차 그런 생각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런 인간에게 사랑을 느끼는 나는 더 어리석은 생물이겠지.'

 언제부터일까. 한 왕자가 인어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 인어공주는 왕자의 몸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피부에 찰싹 달라붙은 얇은 비단 셔츠를 통해서 왕자의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왕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빨리 바닷가에 도착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이 왕자님은 죽을 거야.'

 인간의 육체가 물 속에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간의 목숨이 물 속에서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인어공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아름다운 왕자야. 늘씬한 체구, 검게 그을린 피부, 조각처럼 뚜렷한 윤곽을 갖춘 얼굴, 갈색의 머리카락…… 바닷속 세계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를 아직 본 적이 없어.'

 생각해보면, 인어공주가 철들 무렵부터 마음에 두었던 상대는 인간 세계의 남자였다. 언젠가 난파당한 배안에서 보았던 하얀 조각상. 그것은 대리석에 조각된 인간 세계의 남자였다. 인어공주는 그 아름다운 육체에 즉시 매료되었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그 조각상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특히 미끈하게 뻗은 두 다리, 인어에게는 없는 그 다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다리 사이이ㅡ 수풀은 엄숙한 비밀에 가득 차 있었다. 인어공주는 조각상의 차가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는 자신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인어공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깊고 깊은 바닷속이었다. 바닷속에는 청녹색의 나무와 풀이 약간의 물살에도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흔들렸고, 선명한 색깔의 산호와 말미잘 사이를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부드럽게 헤엄쳐다녔다. 

 바닷속 가장 깊은 장소에는 인어왕이 사는 성이 있었다. 성에 사는 왕은 오래 전부터 아내 없이 혼자 생활했기 때문에 늙은 태후가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여섯 자매인 공주들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 중에서도 막내 공주가 특히 아름다웠다. 막내 공주는 하얀 피부와 깊고 맑은 바다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하반신은 다리가 아닌 물고기의 꼬리였다.

 막내 공주가 날씬한 몸으로 해초 사이를 누비며 바닷속을 헤엄쳐가면 남자 인어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인어들 중에서 막내 공주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공주는 자기가 남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는 점을 특별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바다의 세계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 인어들에게도 당연히 흥미가 없었다. 공주의 마음을 유혹하는 것은 바닷속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즉 지상의 세계였다. 남자 인어들의 눈은 항상 공주에게 향하고 있었지만 공주의 눈은 전혀 다른 방향, 즉 인간 세계의 남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인어공주는 18세가 될 때까지는 지상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인어들의 세계에서는 18세가 성인이었기 때문에 그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수면으로 나가 인간 세계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할머니에게서 단편적으로나마 인간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때마다 인어공주의 흥미는 깊어만 갔다.

 "지상에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밤의 태양'이라는 것이 있어. 모든 것을 은색의 빛으로 비추어주는 그것을 인간들은 달이라고 부른단다. 달은 날마다 모습을 바꾸는데, 그것은 여자의 육체와 미묘한 관계가 있어서 여자의 월경이나 임신, 출산은 모두 달의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거야."

 "인간에게는 우리 같은 꼬리강 ㅓㅄ단다. 그 대신 막대기처럼 생긴 두 개의 다리로 땅을 딛고 걸어다니지."

 "인간은 흙 위에 돌이나 나무로 지은 집에서 생활한단다. 그리고 매일 남자는 밖으로 나가 일하고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을 지키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거야."

 "인간 세계에는 돈이라는 게 있지. 돈은 금속이나 종이로 만드는데, 그것을 갖고 싶은 물건과 바꾸는 거야. 돈만 있으면 어떤 것이든 구할 수 있단다."

 "인간 세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면 결혼이라는 계약을 한단다. 두 사람은 교회라는 곳에서 식을 올리고 하나님을 받드는 신부라는 사람의 주례로 사랑을 맹세하고 반지를 교환하지. 이때 결혼계약서도 쓴단다."

 들으면 들을수록 인어공주에게는 흥미 깊은 일들뿐이었다.

 

 마침내 공주도 18세가 되었다. 인어공주가 할머니인 태후의 허락을 받아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물위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지상에는 저녁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하늘에는 장미색 구름이 떠 있었고,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한 바다는 거울의 표면처럼 매끄러웠다.

 바다 한쪽에는 세 개의 돛이 달린 커다란 배가 떠 있었다. 그곳에서 화려한 음악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인어공주는 선창으로 다가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수백 개나 되는 각양각색의 등불이 밝혀져 있는 배 안에서는 비단 드레스와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수많은 사람들이 연회를 펼치고 있었다.

 사람들 중앙에는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늘씬한 체구를 갖춘 왕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18세 정도. 왕자는 손님들과 악수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화려한 글라스와 금테를 두른 접시들이 놓여 있고 인어공주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요리가 쌓여 있었다. 사실 그날은 왕자의 생일이었다. 배에서는 생일 축하 파티가 펼쳐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왕자가 갑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자 환성이 터지면서 하늘을 향해 불꽃이 날아올라갔다. 펑 소리와 함께 허공에 커다란 꽃이 활짝 피었다. 불꽃은 잠깐 동안 허공에서 반짝이다가 수많은 유성처럼 바다 위로 떨어져내렸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등불이 꺼지고 불꽃놀이도 끝났다. 축포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높은 파도가 일고 있었다. 검은색의 커다란 구름이 밀려오면서 멀리에서 번개가 빛났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원들이 서둘러 돛을 접었지만 이미 때가 늦은 듯했다.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가 덮치는 순간 배가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돛대 두 개가 부러지면서 배는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바닷물이 배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선체가 힘없이 부서지면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다에 내던져졌다. 정신없는 소동 속에서 인어공주는 열심히 왕자의 모습을 찾았다. 인간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공주는 잘 알고 있었다.

 인어공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나뭇조각들을 헤치면서 필사적으로 헤맨 끝에 마침내 왕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왕자는 정신을 잃고 손발을 늘어트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공주는 왕자의 머리를 물 위로 내보내고 육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헤엄쳐갔다.

 이윽고 저 멀리에 육지가 보였다. 짙은 녹색의 숲을 배경으로 교회나 수도원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인어공주는 즉시 그곳으로 헤엄쳐가서 왕자를 모래사장에 눕혔다.

 왕자의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공주는 왕자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리고 왕자 옆에 누워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면서 제발 죽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늘씬한 왕자의 육체를 끌어안고 따뜻한 피부의 감촉을 느끼면서 인어공주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긴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보통 때라면 부끄러워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언제까지나 이 상태로 있고 싶다는, 언제까지나 이렇게 왕자와 몸을 맞댄 채 지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일었다. 

 날이 밝자 이윽고 왕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인어공주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곧바로 다시 의식을 잃어버렸다. 왕자가 살아났다는 기쁨에 인어공주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 틈엔가 주위는 밝아져 있었다. 그때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 안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주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사원에서 수업하는 여자들이 아침 산책을 나온 것이었다. 인어공주는 서둘러 왕자의 몸을 끌어안고 그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했다.

 이제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괴로웠지만,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인어공주는 서둘러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파도 거품으로 몸을 감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잠시 후 여자들이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왔다. 여자들은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는 왕자를 발견한 듯 그쪽으로 달려갔다. 바위 뒤에서 그 못브을 바라보고 있는인어공주는 혼자 남겨진 듯한 쓸쓸함에 마음이 아팠다. 이윽고 여자들이 왕자를 부축하여 사원 안으로 들어가자 인어공주는 풀죽은 모습으로 바닷속으로 돌아갔다.

 

 바다 위에서 무엇을 보았냐는 언니들의 질문에 공주는 처음에는 침묵을 지키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나라 왕자이고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언니가 있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내가 데려다줄게. 단, 이번 한번뿐이야. 그리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즉시 돌아와야 돼."

 그 언니가 말했다. 그리고 그날, 인어공주 일행은 모두 바다 위로 올라갔다.

 성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회색의 둥근 지붕으로 덮여 있는 탑이 높이 솟아 있고 크림색의 벽에 수백 개의 창문이 늘어서 있는 겉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둥근 기둥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대리석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커다란 대리석 계단은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 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인어공주가 그 수로까지 올라가 건물의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자 멋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하나의 벽 전체가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걸이용 카펫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 다른 벽에는 금테를 두른 액자에 들어 있는 유화가 몇 개나 걸려 있었다. 난로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은촛대가 놓여 있으며,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에는 금실로 수놓은 빌로드가 깔린 긴 의자와 마호가니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왕자가 사는 성을 알게 된 공주는 밤만 되면 물 위로 나와 왕자를 보러 갔다. 때로는 수로를 거슬러 올라갔고, 때로는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대리석 발코니 아래까지 다가가 몸을 숨기고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언젠가는 혼자 밝은 달빛을 받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왕자를 본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혼자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와 악기를 연주하는 왕자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인어공주는 그때마다 너무 기뻐서 왕자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짓을 해보았자 왕자를 놀라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어공주는 점차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된 공주는 마침내 할머니를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할머니는 깊이 생각한 뒤에, 눈앞에 앉아 있는 인어공주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 세계의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네 말은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요. 그럴 각오는 되어 있어요. 저는 인간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인간 세계의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것을 바꿀 수는 없어요."

 "젊은 여자들은 마음이 급해서 문제다. 이 바닷속의 평화와 행복을 버리겠다고? 피비린내나는 전쟁과 사건으로 얼룩져 있는 인간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하지만 적어도 이곳처럼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 없는 곳은 아니에요."

 "스스로 불행 속으로 뛰어들겠다니……"

 "하지만 저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요, 할머니. 이곳에서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요."

 "살아 있다는 느낌?"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언니들에게 사랑을 받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고 운명대로 진행될 뿐이잖아요. 질투도 증오도 없고 모든 것이 깊은 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이래서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요. 저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삶을 느낄 수 있는 세계로 뛰어들고 싶어요. 온몸의 세포들이 모두 살아 있다고 소리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요. 설사 배신당한다 해도, 상처받는다 해도 이런 곳에서 사는 것보다는 나아요."

 "너는 아직 젊다. 그 꿈을 위해 네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설사 제 목숨을 잃는다 해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인간 세계로 들어가서 인간의 영혼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주마…… 만약 인간 세계의 누군가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교회라는 곳에서 그가 오른손을 너의 오른손 위에 올려놓고 영원히 변하지 ㅇ낳을 사라을 맹세해준다면, 그 사람의 영혼이 네 육체에 깃들게 되어 너도 영혼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 세계에서 아름답다고 여기고 있는 이 꼬리는 인간 세계에서는 보기 흉한 물고기의 꼬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런 너를 누가 사랑해주겠니?"

 

 그러나 할머니의 부드러운 설교도 공주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인간 세계에 대한 동경, 왕자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인어공주는 깊은 해초 숲에 사는 마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마녀라면 뭔가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굳힌 인어공주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맴도는 거센 소용돌이를 향해 헤엄쳐갔다. 바다의 마녀가 사는 곳은 소용돌이 너머에 있었다. 숲 속의 덤불은 동물 같기도 하고 식물 같기도 한 말미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길고 끈적끈적한 팔과 지렁이처럼 구부러진 손가락을 갖고 있었다. 그 손가락은 무엇이든지 한 번 붙잡으면 절대로 놓지 않기 때문에 붙잡히면 끝장이었다. 

 공주가 조심스럽게 그 사이를 지나가자 말미잘들이 즉시 공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깜짝 놀란 공주는 뒤로 물러서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말미잘들은 붙잡은 먹이를 수백 개의 팔로 옭아매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백골로 변한 인간의 시체도 있고 배에서 사용하는 노와 육지 동물의 해골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작은 여자 인어가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인어공주가 말미잘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마녀는 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섞으면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약이나 독약임이 분명했다. 그 나무통 안에는 마녀의 필수품인 벨라돈나(belladonna, 가지과의 다년생 풀. 서아시아가 원산지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다) 같은 약초나 남자의 정액, 여자의 월경혈, 태아의 손가락 등이 들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녹색을 띠고 있는 그 액체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무슨 일로 왔는지 다 알고 있다."

 인어공주를 보고 마녀가 말했다.

 "너는 물고기의 꼬리를 버리고 인간처럼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것이지? 그 왕자의 사랑과 불사의 영혼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고서 마녀는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한 생각이야. 이곳이 훨씬 행복한데 그 행복을 버리고 일부러 인간 세계로 나가겠다니."

 "하지만 저는 왕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사랑, 사랑, 사랑…… 젊은 여자들이 하는 말은 똑같아. 사랑밖에 모르거든. 하지만 그런 건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홍역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마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어공주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냐. 내가 약을 만들어주면 되니까. 그 약을 먹으면 꼬리가 없어지고 인간의 다리가 생길 거야. 물론 그때의 고통은 마치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지만. 왕자는 너를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 거야. 너의 걸음걸이는 마치 얼음판 위에서 춤을 추는 요정처럼 화려해서 어떤 무용수라도 너를 능가할 수는 없을걸.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을 밟는 것처럼 통증을 느끼게 돼. 그래도 좋다면 네가 바라는 대로 약을 만들어주마."

 "부탁이에요. 그 약을 만들어주세요."

 인어공주는 즉시 마녀에게 매달렸다.

 "미리 말해두는데, 일단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면 두번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없어. 두 번 다시 이 바닷속에 사는 할머니나 아버지, 언니들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야."

 "각오하고 있어요."

 "그리고 설사 두 다리를 갖는다 해도 왕자가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하고 교회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 않으면 불사의 영혼은 얻을 수 없어."

 "알고 있어요."

 인어공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내게는 그 보답으로 뭘 줄거지?"

 마녀가 말했다.

 "뭘 드리면 되겠어요?"

 인어공주가 창백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자, 그 왕자를 줘."

 "왕자님을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아, 물론 왕자가 느럴 배신했을 경우의 이야기야. 왕자가 너를 배신할 경우, 즉시 왕자의 목숨을 거두겠다."

 "왕자님이 저를 배신한다고요?"

 인어공주는 조용히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래. 이건 네 능력에 달린 문제야. 왕자가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면 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왕자도 행복하게 살겠지. 하지만 왕자가 너를 배신할 경우에는 왕자도 즉시 죽어야 돼."

 "알았어요."

 인어공주가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는 약속대로 할게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거예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왕자의 진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왕자를 모욕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배신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인어의 세계에서는 상대에게 질린다거나 사랑이 식는 일은 없었다. 남녀의 사랑은 자기가 좋아서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는, 운명의 손에 이끌려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번 맺어지면 영원히 헤어질 수도 없었다.

 바라는 대로 마녀에게서 약을 건네받은 인어공주는 다시 커다란 소용돌이를 헤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족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공주는 창문을 향해 몇 번씩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사랑하는 할머니,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언니들도 안녕……"

 집과 고향을 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워낙 굳게 각오한 탓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공주는 몇 번이나 성을 돌아보면서 바다 위로 헤엄쳐갔다. 

 바다 위로 나온 인어공주는 왕자의 성을 향해 또다시 부지런히 헤엄쳐서 달에 비치는 대리석 계단에 이르렀다. 그리고 궁전의 발코니에서 병 뚜껑을 열고 마녀에게서 받은 약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통증이 곧바로 온몸에서 퍼져나갔다. 공주는 즉시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인어공주가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태양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통증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눈을 뜬 순간 공주는 깜짝 놀랐다. 꿈에도 그리던 왕자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왕자의 눈길을 확인한 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물고기의 꼬리는 어느틈에 사라져버리고 인간의 다리, 그것도 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다리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 목숨을 구해준 아가씨가 바로 당신이죠?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이번에는 내가 구하게 되다니……"

 왕자는 인어공주에게 어디에서 사는 누구냐고 물었다. 공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파란 눈으로 왕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바닷속에서 왔다고 말해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해야 할까?

 잠자코 있는 공주를 보고 왕자는 조난당한 충격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했다. 알몸으로 파도에 쓸려온 여자…… 그것 만으로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불쌍하게도. 하지만 나를 만났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왕자는 공주의 손을 잡고 성 안으로 데리고 갔다. 마녀의 말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을 밟는 것처럼 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공주는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며 가벼운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갔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배려로 성 안의 아름다운 방을 얻어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인어공주는 즉시 성안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느 날 연회에서 비단으로 몸을 감싼 아름다운 여자 노예들이 나와 왕과 왕비, 왕자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여자 노예들이 박수를 받자 인어공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어나가 노래를 불렀다. 아름답고 맑은, 영혼까지 빨아들이는 듯한 목소리…… 또한 여자 노예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인어공주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발끝으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춤을 추었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칼로 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공주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기품이 배어나는 듯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었다. 왕자도 정신없이 박수를 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왕자는 공주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를 '귀여운 보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자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녀를 애첩으로 소개했으며, 그때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무언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그 행위는 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의 빈축을 샀지만 왕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왕자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에서 왕과 왕비도 왕자의 그런 행동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왕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인어공주의 자유분방한 아름다움과 순진한 마음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애첩이 무엇인지 몰랐다. 중요한 점은 교회에서 식도 올리지 않았고 반지를 교환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왕자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공주는 그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이제 곧 왕자는 틀림없이 나를 교회라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틀림없이 제단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것이다.'

 인어공주는 반드시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인어공주는 묘한 여자였다. 나체로 지내는 것에 대해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알몸으로 테이블에 앉아 과일을 먹거나 알몸으로 발코니에 기대어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물론 시녀들은 인상을 찡그리고 험담을 주고받았지만 인어공주는 시녀들의 그런 태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 알몸으로 지내면 안 돼요?"

 왕자에게 주의를 들으면 인어공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얼마나 편한데요. 답답한 옷은 싫어요. 몸이 조여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어요. 옷을 입으면 마치 온몸을 구속당한 듯한 기분이에요. 마음까지 자유를 잃는 것 같아요."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 고래 뼈로 커다랗게 부풀린 스커트, 굽이 높은 하이힐, 그리고 높게 들어올린 머리카락, 커다란 깃털이 달린 모자, 다이아몬드를 박은 무거운 관 등…… 인간 세계 여자들의 장식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번잡했다. 그런 것들을 몸에 걸치고 있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주는 드레스를 맞출 때마다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게다가 예의와 에티켓도 문제였다. 예를 들면, 귀부인들은 마치 실에 매달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좁은 보폭으로 일직선으로 걸어야 했다. 더구나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상대의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인사를 해야 했다. 눈썹을 약간 움직여 보인다거나 어깨를 살짝 흔들어 보인다거나 무릎을 구부리고 몸을 낮추는 등 수많은 인사법이 있었다. 

 그리고 성에서 생활하려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 영토 안에 사는 수많은 귀족과 귀부인들의 신분과 직함은 물론이고, 어떤 집안 출신이며 누구와 결혼했는지, 언제 작위를 수여받았고 어느 곳에 어느 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지, 친척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인어공주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어와 라틴어, 그리스어 레슨도 받아야 했다. 바닷속에서는 한 가지 언어로도 충분했는데, 인간 세계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일까. 피로 얼룩진 인간들의 연사…… 어째서 이렇게 많은 나라로 나뉘어 서로의 영토와 부를 빼앗기 위해 칼을 휘두르며 다투는 것일까. 증오의 소용돌이, 질투의 소용돌이, 욕망의 소용돌이…… 인간들이 그런 감정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공주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인어공주는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여자였다. 나체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듯 그 마음도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순진한 나체 상태였다.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입에 발린 칭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인어공주의 태도는 가식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성에서는 당연히 빈축을 샀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나요? 아버지는? 어머니는? 어느 나라 임금님의 친척이지요?"

 귀부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인어공주는 기분 나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렇게 대답했다.

 "바닷속 왕국의 임금님 딸이에요."

 "어머, 바닷속 왕국요? 호호호……"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인어공주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바닷속 왕국에서는 예의를 가르쳐주지 않는가보군요."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게 영…… 파티에서 정말 너무 웃겼어요.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춘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리고 드레스를 입는 방법도 문제가 있어요.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늘 나체로 지냈나요? 얼마나 가난한 나라였으면 공주가 옷도 없었을까?"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귀부인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마치 들으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으며, 서로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면서 인어공주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태연했다.

 '이 나라에서는 그 사람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보다 돈이나 부, 영토나 가문, 인맥 같은 것들이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아.'

 인간 세계가 어떤 곳인지 조금씩 배워나가면서 인어공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시시한 세계야. 나는 이 인간 세계에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재산도 신분도, 가문도…… 하지만 나의 순진한 마음은 자유롭고 풍부해. 나는 진심으로 왕자님을 사랑하고 있어……'

 "아름다운 분. 어린 소녀처럼 순진하신 분. 당신 같은 여성을 조금만 더 일찍 만날 수 있었다면……"

 성 안에서 인어공주를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사람은 왕을 받드는 기사뿐이었다. 인어공주는 그의 말이 겉치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왕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공주에게는 그런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기사가 깊은 눈초리로 바라볼 때마다 공주는 왠지 낯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기사가 진지한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성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인어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프를 연주하면서 즉흥적으로 인어공주를 위해 지은 노래를 불렀다.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그 노래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기사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신 부모님은 나를 싫어하지요?"

 언젠가 인어공주가 슬픈 목소리로 왕자에게 말했다.

 "내가 교양이 없고 예의범절도 모르기 때문에……"

 "내게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여자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게는 당신의 그 순수한 마음만 있으면……"

 왕자는 '그리고 그 아름다운 육체만 있다면……' 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아름다웠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당신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일까요?"

 인어공주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바보로 취급하고 눈엣가시로 여겨요. 내가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것 때문에 당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괴로워요. 나는 당신의 짐일까요?"

 "그렇지 않아. 절대로 그렇지 않아."

 왕자는 그렇게 말하고 부드럽게 공주를 끌어안았다.

 "당신은 언제나 나의 소중한 보물이야. 당신의 마음이 누구보다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당신이 누구보다 깊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진실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그 말에 공주의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분명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내 사랑을 왕자님은 잘 알고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왕자님만 내 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를 버리지 말아요. 영원히."

 그렇게 말하고서 인어공주는 왕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내게는 당신밖에 없어요. 내게는 당신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랬다. 아버지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바닷속 왕궁을 버렸다. 인어공주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인어공주는 잠자리에서도 자유분방했다. 아낌없이 몸을 여 ㄹ고 대담하게 왕자의 사랑을 요구했다. 왕자도 뜨거운 손길로 그 육체를 애무했다. 수치심 따위는 모두 잊어버리고 마치 갓난아기처럼 매달려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 왕자는 그런 공주가 사랑스러웠다. 자기만이 이 여자를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은 남자로서 왕자의 자존심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다. 오직 자기 하남나을 믿고 있는 공주를 보면서 왕자도 절대로 이 여자를 뱃니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왕자는 점차 인어공주가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왕자가 저녁에 성으로 돌아오면 인어공주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달려나와 왕자에게 매달렸는데, 그런 순수함이 처음에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보기 흉한 행동은 삼가는 게 좋잖아. 주위 사람의 눈도 있고."

 그런 말을 들으면 인어공주는 맥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공주가 가신이나 시녀들 앞에서 서슴없이 왕자에게 안기며 키스를 요구할 경우에도 지금까지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점차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밀어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철없이 행동할 거야? 교양이 있어야지. 적어도 한 나라의 왕자의 애첩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아?"

 "교양? 도대체 교양이 뭐죠?"

 어째서 자유롭게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어째서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인어공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나라의 공주에게서 왕자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왕과 왕비도 크게 반겼다. 두 사람 모두 왕자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빠져 있어서 걱정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제 너도 몸가짐을 조심하고 한 나라의 통치자로서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백성들도 하루빨리 네가 아내를 맞이해서 후계자를 얻기를 바라고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니?"

 "그 여자는 이제 떼어버려라. 정체도 알 수 없는 여자 아니냐. 도저히 떼어버릴 수 없다면 이대로 애첩으로 남겨두어도 괜찮겠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시집 올 공주도 그 정도는 이해할 게다. 설마 그 나이에 애첩 한두 명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부모의 설득에 왕자의 마음도 흔들렸다.

 '맞는 말이야. 그 여자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성 안에서의 생활은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어. 예의도 모르고,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는 사람들의 빈축만 살 뿐이지 호감을 얻을 수는 없어. 왕자의 아내라면 각국 사절들의 알현도 받아야 하고 공식적인 행사에도 참석해야 하는 등 골치아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여자가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낼 리가 없어. 나는 이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몸이야. 내게는 왕자로서의 의무가 있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서의 입장이 있어. 개인적인 감정에 얽매여서는 안 돼……'

 그러나 인어공주를 배신한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언젠가는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 순진한 여자…… 왕자는 고민에 빠졌다. 인어공주도 가끔씩 고민에 잠겨 있는 듯한 왕자의 모습을 보고 뭔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자님은 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유를 모르고 있던 인어공주는 왕자에게 혼담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바닷속에서 자란 여자가 이 지상 세계를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주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상관 없지만, 왕자는 그렇지 않았다. 왕자로선 소중한 부모님을 슬프게 만들 수도 없었고, 한 나라의 왕자로서의 사명감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인어공주의 마음은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인어공주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왕자의 혼담은 거침없이 진행되어갔다.

 이윽고 결혼식을 위해 화려한 배가 완성되었다. 명목은 왕자가 이웃 나라를 시찰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 나라의 공주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게 되었는데 인어공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드디어 그날, 왕자를 태운 배가 이웃 나라의 아름다운 항구에 도착했다. 마을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높은 탑 위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졌다. 병사들이 깃발을 앞세워 대열을 갖추었다. 왕자 일행을 환영하는 축하 행사가 매일 계속되었으며, 무도회와 연회가 번갈아 개최되었다. 하지만 그 나라의 공주는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공주는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원에서 왕비의 신분에 어울리는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침내 공주가 돌아왔다. 먼 발치에서 공주의 모습을 본 인어공주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공주는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씬한 몸매에서는 기품이 흘렀고 하얀 피부는 너무 눈부셔 눈이 멀 정도였다. 긴 속눈썹 안에는 검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마음이 빠른 속도로 그 공주에게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어공주의 마음은 슬픔과 고통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아, 결국엔 왕자님이 나를 배신하게 되는구나.'

 인어공주를 배신할 경우, 왕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육체는 마녀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마침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발생하려 하고 있었다.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교회의 종이 울리고, 사자가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왕자의 결혼을 알렸다. 교회 제단의 좌우 촛대에 불이 밝혀지고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는 소리가 장엄하게 메아리치는 가운데, 신랑과 신부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인어공주도 곱게 차려입고 신부의 의상을 거들어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의식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들,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 되자 신랑과 신부는 배에 올라탔다. 축포가 울려퍼지고 형형색색의 깃발이 춤을 추었다. 배 중앙에 비단 천막이 쳐지고 화려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보낼 장소였다.

 잠시 후 배가 파란 해수면으로 조용히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 등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갑판에 모여 춤을 추었다. 인어공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바다 위로 처음 나왔을 때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그랬다. 그날 밤도 이처럼 배 위에서 화려한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인간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인간 세계의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불현듯 인어공주가 늘씬한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날카로운 칼날을 밟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지만 마음의 고통이 더 심했기 때문에 발의 통증에는 신경이 가지 ㅇ낳았다. 지금까지 공주가 이렇게 멋진 춤을 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인어공주의 춤을 칭찬했다.

 오직 왕자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버리고 고통을 참아왔는데, 왕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뿐이라니……

 배 위에서는 밤늦게까지 연회가 이어졌고, 인어공주는 절망적인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서 열심히 춤을 추었ㄷ. 그 눈길은 오직 화려한 신부 옆에 앉아 있는 왕자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연회가 끝나자 왕자와 신부는 키스를 나눈 뒤에 손을 마주 잡고 침실로 들어갔다. 손님들도 각각 침실로 들어가 배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어공주는 두 팔로 난간을 짚고 동쪽 하늘이 밝아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밤이 지나면 왕자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왕자의 육체는 마녀가 빼앗아가고 인어공주는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혼자 남게 될 운명이었다.

 '아, 나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왜 이곳에 나와 계십니까?"

 기사의 목소리였다. 인어공주는 얼른 슬픈 표정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이야말로 이 시간에 어떻게……"

 '이 기사에게도 고민이 있을까? 다른 사람 모르게, 이런 시간에 갑판을 혼자 거닐어야 할 만큼 고민이 있는 것일까?'

 "저처럼 신분이 높은 분들을 받들어야 하는 사람은 그분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제 슬픔에 잠겨 이?ㅆ을 여유가 없습니다. 항상 마음의 공백을, 윗분의 슬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공백을 남겨두어야 하니까요. 저의 슬픔에만 집착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라도 괜찮다면 말씀하시지요. 슬픔에 잠겨 있을 때는 그 슬픔을 함께 나누고 기쁨에 잠겨 있을때는 그 기쁨을 두 배로 늘려드리는 것이 윗분을 받드는 우리 기사들의 임무입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믿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뭔가 사정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해도, 내가 바닷속 세계에 사는 인어공주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겠어요?"

 "믿습니다. 당연히 믿지요. 당신의 마음과 육체에서 발산되는 심상치 않은 생명의 기운이 평범한 인간게에서 발산되는 기운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자님은 모르십니다. 당신을 단순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로 알고 계시지요. 당신은 생명 그 자체, 영원 그 자체인데도……"

 "아, 왕자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왕자님은 나를 배신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배신하면 그 사람은 죽어야 해요. 나는 바닷속 세계의 마녀와 그렇게 약속했어요. 나는 그때,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간은 마음이 바뀌는 존재라는 것을 몰랐어요. 바닷속 세계에서처럼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이성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왕자님은 당신의 진정한 매력을 모르십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왕자님처럼 잘생긴 남자들은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는답니다. 그러나 저처럼 추한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지요. 사실 여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저 같은 남자인데도……"

 기사는 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왕자님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래요. 당신이 나를 가져요. 왕자님이 나를 배신하기 전에 내가 먼저 왕자님을 배신하면 왕자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어요."

 '그런 짓을 한다면 나는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어.'

 기사는 슬픈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결국 왕자를 대신하는 존재인가. 그런 식으로밖에는 이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인어공주의 부탁을 거절할 자신감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라도 상관없다면 무슨 일이든 시켜주십시오."

 "당신은 내가 아름답다고 말해주었어요. 내가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었어요. 그렇지요?"

 "그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습니다."

 "지금도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나요?"

 기사는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럼 나를 가져요."

 공주의 마음도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끼리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 치명상을 입히는 행동이었다.

 공주를 안는 것은 기사의 생명이 끝난다는 예꼬였지만 기사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사와 헤어진 인어공주는 허탈한 마음으로 갑판에 서 있었다.

 '이제 곧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 태양이 비치겠지. 그때 바다에 몸을 던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거야.'

 아쉬움은 없었다. 적어도 사랑하는 왕자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왕자가 신부와 함께 행복을 누린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인어공주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 뜻밖에도 해수면에 물거품이 일면서 다섯 명의 언니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언니들의 얼굴도 공주의 얼굴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싹뚝 잘려 있었다.

 "너를 인어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마녀를 찾아가 부탁했단다. 그랬더니 우리의 머리카락을 가져가는 대신 단검을 주더구나. 자,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이 단검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야 해. 너의 다리에 왕자의 따뜻한 피가 묻으면 너는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있어.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함께 살 수 있는 거야."

 인어공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언니, 이제 내 목숨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어. 왕자님의 사랑을 잃은 지금, 이 세상에 살아남는다 해도 아무런 보람이 없어."

 "너 혼자만의 목숨이라고 생각하지 마. 우리가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너 때문에 할머니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고 아버지는 병석에 누우셨어. 자, 빨리 움직여. 하늘이 밝아오잖아. 빨리 이 단검으로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집으로 돌아와."

 언니들은 인어공주에게 단검을 던져주고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인어공주는 단검을 손에 들고 침실로 다가가 보라색 커튼을 젖혔다. 침대 위에는 하얀 피부를 드러낸 신부가 왕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인어공주는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왕자의 아름다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 사이에도 하늘은 더욱 밝아졌다. 공주는 예리한 단검 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왕자에게로 옮겼다.

 그때 왕자가 꿈결 속에서 신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왕자의 마음에는 신부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왕자의 사랑이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자 인어공주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인어공주는 다시 한번 왕자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손에 힘을 주며 단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단검은 바다에 던져졌다. 단검이 떨어진 바다에는 마치 핏물처럼 붉은 거품이 일었다.

 

 "왕자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다!"

 고함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무장한 남자들이 침실로 밀려들어왔다. 인어공주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침실에서 끌려나왔다.

 "왕자님. 수상한 자를 체포했습니다. 이 여자는 기사와 공모하여 왕자님을 살해하려 했습니다. 먼저 붙잡힌 기사가 이미 모든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인어공주는 소란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왕자 앞으로 끌려갔다.

 "설마 그런 일이……"

 핏기를 잃은 왕자의 입술이 떨렸다.

 "당신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내 목숨을 노리다니……"

 인어공주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한순간의 동요가 이런 수치를 겪어야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냥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어야 했는데……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한 번 버린 목숨, 아쉬움은 없었다.

 재판은 왕자가 모르는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재판관들이 앉아 있는 법정으로 끌려가 엄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인어공주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제가 기사를 유혹했어요. 저는 기사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저는 왕자님을 배신했어요. 그러니까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어느 날, 왕자가 인어공주를 만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왔다. 처음의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듯 왕자는 어떻게든 인어공주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아니, 믿고 싶지 않아. 당신, 정말로 나를 배신한 거야? 정말로 기사를 사랑했어?"

 "그래요.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당신은 나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했어요. 전에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네.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식었어요."

 인어공주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는 조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애절한 목소리가 감옥 안에 메아리쳤다.

 "내가 배신한 거예요. 내가 당신을 배신한 거라구요."

 "사실을 말해줘.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을 구할 수 없어."

 "할 말은 다 했어요. 이게 사실이에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당신이 그런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당신이 나를 배신하다니……"

 왕자의 괴로운 표정을 바라보는 인어공주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왕자를 살리기 위한 공주의 침묵은 확고한 것이었다.

 

 "네가 그 여자를 너무 믿었던 게야."

 왕이 왕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이렇게 간단히 너를 배신하다니. 그 여자에게는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그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너도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빨리 잊어버려라.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너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니?"

 왕과 왕비는 큰 고민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왕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순진한 마음을 가진 여자가 왜……

 인어공주는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다. 왕자가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잠깐 동안의 마음이었지만 왕자를 죽이려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떤 변명으로도 그 죄를 씻을 수는 없었다.

 '왕자의 사랑을 잃은 나에게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십자가가 세워졌다. 어젯밤에 뭔가 나무를 다듬는 소리가 감옥 안에 메아리쳤기 때문에 인어공주는 그것이 자기를 처형하기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다.

 '나는 왕자님의 사랑을 위해 죽는 거야.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지만 나만은 내가 왕자님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건 나 혼자만의 영원한 비밀이야……'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처형대 계단을 올라간 인어공주는 십자가에 묶이는 동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의 입에서 흥분에 찬 욕설이 튀어나왔다.

 "왕자님을 살해하려 한 마녀다. 빨리 죽여버려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사스런 여자다. 지금까지 왕자님의 사랑을 빌미로 사치를 누리면서 우리의 세금을 낭비했다. 당장 죽여라."

 왕자와 신부도 높다란 관람석에서 처형 장면을 지켜 보고 있었다. 왕자는 슬픈 표정이었지만 신부는 무엇인가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왕자의 마음에 아직도 인어공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기사와의 밀회를 밀고한 사람이 신부가 아닐까? 인어공주의 마음에 문득 그런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쓸모없는 일이었다.

 십자가에 묶인 인어공주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맑은 하늘. 문득 인어공주의 머리 속에 바다가 떠올랐다. 바닷속도 이처럼 끝없는 푸른색이었다. 그리고 그 푸르름 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아야 했다. 외톨이로……

 이윽고 사형 집행인이 다가와 인어공주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횃불을 이용해서 십자가에 불을 붙였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공포와 기대에 가득 찬 구경꾼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꽃은 순식간에 인어공주의 몸으로 옮겨붙었다.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인어공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인어공주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불꽃 속에서 타들어가는 인어공주의 눈부신 육체…… 구경꾼들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눈에 핏발을 세우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하는 그들에게는 가끔씩 광장에서 거행되는 처형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볼거리였다.

 이윽고 불꽃이 기세를 잃기 시작하더니 인어공주의 머리가 한쪽으로 꺾어지면서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인어공주가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구경꾼들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마치 썰물이 빠지듯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 광장 한쪽 구석에서 뚫어져라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기사였다. 기사는 왕자 살해를 공모했다는 이유로 일단 체포되었지만, 인어공주가 끝까지 기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석방된 것이었다. 기사는 아무도 없는 광장에 쓰러져 있는 십자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너무나 가엾은 인어공주. 인간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그녀의 안타까운 인생…… 기사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의 눈물이 십자가를 적시고 타다 남은 인어공주의 검은 육신을 적셨다. 잠시 후 기사는 품 속에 손을 넣어 단검을 꺼내더니 서슴없이 자기의 목을 찔렀다. 피가 흘러내려 십자가를 붉게 물들였다. 주군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기사의 임무였지만, 그에겐 더 이상 주군의 슬픔을 나누어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기의 고통만으로도 벅차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얼마 후, 그곳에는 작은 꽃이 피었다. 인어공주의 순결한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하얀색의 작은 꽃이었다. 그 꽃에 모여든 작은 새들이 인어공주의 애절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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