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
게시물ID : history_124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콩국수
추천 : 5
조회수 : 34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05 12:13:12
'씨 없는 수박'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우장춘 박사.

1898년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도쿄에서 태어난 그이는 일본에서도 대접받는 육종학자였다. 그런 그이가 1950년 안정된 자리가 보장된 일본을 등지고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건너와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니 당시 농업이 주요 산업이던 한국으로서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오늘 날 황우석 교수 이상의 대우였을 것이다. 현재 부산시 동래구에는 그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장춘 박사 생전 연구 활동 유적지인 온천동에 ‘우장춘 기념관’을 건립하여 추앙하고 있기도 하다. 

‘우장춘 기념관’에서 발행하는 홍보 전단이나 동래구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우장춘 선생의 소개의 일부는 이렇다. 

“우장춘 박사는 일본 동경에서 한말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우범선이 그이의 아버지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 우범선은 무슨 연유로 일본으로 망명했는지 위의 설명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이의 아버지 우범선을 이야기하자면 지금으로부터 꼭 110년 전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국모’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의 핵심 장본인이 바로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1857년 출생한 우범선은 대대로 무인 집안이었다고 한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관의 길에 접어든다. 우범선은 일찍이 김옥균 등과 교류하면서 그이의 개화사상에 깊숙이 심취하게 된다. 그 와중에 일본 공사 하나부사의 건의를 받은 조선 정부는 군대의 근대화 일환으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게 된다. 그러나 별기군은 ‘왜기군(倭技軍)’이라는 세평을 들을 정도로 친일적인 인사들이 주를 이루었고 실제로 별기군의 군사 고문 역시 일본인이 맡았다. 우범선은 별기군이 창설되자 참령관(오늘날의 소령에 해당)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구식 군대보다 대우 면에서 월등하여 임오군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고, 임오군란으로 그 뒤에 폐지되었다. 


그 뒤 1884년 개화파 세력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동안 평안북도에 귀양을 가기도 하는 등 개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1894년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친일 개화 세력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우범선은 화려하게 복귀한다. 일본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에 난입하여 정권을 세운 친일세력들의 기세는 드디어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인 입법 정책 결정기구를 조직한다. 군국기무처는 총재 1명, 부총재 1명, 20명 미만의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바로 우범선은 군국기무처의 의원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권력의 상층부에 오르게 된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역시 친일 세력의 군사적 배경이 되는 군대인 훈련대의 제2대대장이 된다. 그러나 당시 명성황후는 미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갑신정변의 주도자이며 친일세력의 거두인 박영효를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아차린 박영효는 먼저 훈련대 제2대대장인 우범선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계획하지만 계획이 누설되어 일본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다. 이를 계기로 차츰 명성황후는 반일 친러 성향을 노골화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과 친일세력은 급기야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이는 권력의 상층부에서 낙마를 눈앞에 둔 우범선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조선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직면한 일본의 위기감이 결합해 벌어진 만행이었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당시 낭인 부대를 엄호하면서 충직한 앞잡이 역할에 수행한 것이다. 
이듬해 우범선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으로 도망하여 도쿄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하여 1898년 아들 우장춘을 낳게 된 것이다.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고 1899년 7월 일본으로 망명한 만민공동회 회장 출신의 고영근에게 1903년 11월 24일 살해되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장춘 박사 삶과 고뇌를 다룬 한 일 합작 연극’ <씨앗>(부제 : 우장춘 박사의 선택)이 2월 제주, 3월 부산과 서울에 이어 5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공연된다고 한다. 이 연극의 극본을 쓰고 연출을 담당한 김순영 씨는 “우 박사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일본인 어머니와 아내였다”며 “그런 면에서도 양국 관계를 되돌아보기에 적절한 작품일 것”이라고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과연 어떤 점에서 양국 관계를 되돌아 볼 수 있을까. 


아직 연극을 직접 관람하지 못한 처지에서 연극 평을 하기에는 부적절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연극 <씨앗>은 동래구청에서 건립한 ‘우장춘 기념관’처럼 우범선에 대해서 은근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 우범선의 행위를 논한다고 해서 우장춘 박사의 업적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먼저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장춘이 진정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아버지의 업보에도 불구하도 아들이 대신 속죄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이와 비슷한 예로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인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 선생을 들 수 있다. 경찰서장급인 총경이라는 고위 공직자였던 김영식 선생은 은퇴 후 아버지 김동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자신이 발견한 친일작품을 김동환 총서에 실으면서 서문에서 아버지의 과오를 자식된 입장에서 대신 사죄한다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심지어 친일청산운동을 벌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다달이 회비도 보내 주고 계시다. 바로 이러한 용기 있는 모습에 화해로써 화답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길이 아닐까. 


‘한일 수교 40년’이 되는 해이다. 양국은 올해를 한일 우정의 해로 선포하고 각종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 망언을 해대고 고대 명예교수라는 자는 일본의 우익 잡지에 일제 침략을 찬양하는 글을 써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한일 양국의 극우주의자들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한 한일 양국의 진정한 우호는 희망 사항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자국 안에서 선대의 과오를 과감하게 인정하고 털어내고자 하는 용기가 절실한 요즘이다.


http://www.sbook.co.kr/view.html?serial=118


4 줄 요약
1. 우범선이라는 개화파 무장이 당시 시대현실에 울분을 느끼고 민비를 죽이는 데 앞장섬.
2. 일본으로 도피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우장춘 박사를 낳음.
3. 결국 민비의 총애를 받던 놈한테 암살당함.
4. 우장춘 박사. 부친의 과오를 갚고자 고국으로 귀국해 대한민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희생함.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자신들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소중한 공동체를 좀먹는 무리들..

너무 화가나 가끔은 이들의 우두머리중 하나를 암살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외세를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