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을 목에 걸고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구김 없는 인상이다. 그런데 어디에 살인, 권력, 진실, 이런 무거운 얘기가 숨어있을까.
"세상이 그렇게 따뜻하지만은 않다, 비관적인 편이에요. 신은 적당히 잔인하다?(웃음) 드라마로 희망을 주고 싶어요." <신의 선물-14일>(에스비에스) 최란 작가를 2일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신의 선물-14일>은 살해당한 아이를 살리려 14일 전으로 돌아간 엄마의 모정을 중심으로, 대통령 부인이 아들의 살인죄를 덮으려는 권력의 음모를 담았다. 미드식 구성에 한국적 정서를 포개어, '한국형 장르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복잡한 내용 전개 탓에 평균 시청률은 8.8%에 머물렀지만, 반향은 꽤 컸다. 16부작으로 지난달 22일 종영했다.
■ 그에게도 적당히 잔인한 '신의 선물'?
<신의 선물-14일>은 그에게도 어쩌면 잔인한 '신의 선물'이던가.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에 대상포진이 재발했다고 한다. "2009년 여자가 남자를 칼로 찌르면서 '이틀 뒤에 네가 내 딸을 죽일 것'이라고 말하는 꿈을 꿨어요." 꿈속 한 장면에 꽂혀 단숨에 대본을 5회분까지 써내려갔다. 처음부터 복선이나 엔딩을 다 계산하고 들어갔다.
1~16부까지 시놉시스만 200장이 넘었다고 한다. 첫 촬영 때 대본이 이미 9회까지 나왔다.
그런데 드라마는 생방처럼 흘러갔다. 소품 등 장면마다 공을 들여야 해 촬영이 보통 드라마의 갑절이었다. 촉박한 일정에 대본대로 촬영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편집과정에서 중요한 장면들이 많이 잘려 나갔다. 복선이 되는 장면이 빠져버리면 다음회 대본을 흔들어야 했다.
김수현(이보영)이 지하주차장에서 화장실을 가겠다며 혼자 뛰어가는 샛별을 그대로 두는 장면도 대본에서는 집 현관 앞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시간이 없었대요.(웃음)" 시청자들이 '이해가 안 된다'며 비판한 장면 대부분이 이 때문이다. 드라마 마지막 장면도 대본에는 수현이 기동찬(조승우)을 발견하지 못하는 걸로 돼있다. "빠진 장면들이 너무 아까워 대본집을 따로 내고 싶어요. 장르드라마는 정말로 사전제작을 해야 해요."
■ "대통령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배우들이 힘이 됐다. "다들 너무 잘해서, 배우복이 많구나 싶었어요.
조승우씨는 새벽 5시에도 문자로 이것저것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었어요.
보영씨도 너무 고생했고. 한지훈(김태우)과 현우진(정겨운) 등 여러 인물들의 사연이 많이 잘려나간 게 아쉽고 미안해요."
국가적 재난으로 종방연이 취소되어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게 아쉽다고 한다.
<신의 선물-14일>에는 스치듯 우리 사회의 민낯을 투영했다. 지하철에서 범인에게 맞고 있는 수현을 지켜만 보고 있던 사람들, 아이를 잃은 엄마를 두고 방송사 간부들이 시청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드라마 속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겹치는 대목도 있다. 샛별이 물에 빠져 엄마를 부르는 모습과 수현이 대통령을 찾아가 '우리 아이를 살려내라'며 절규하는 모습에 시청자들도 가슴이 먹먹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 대본 작업을 했다면 더 강하게 써내려갔을 거예요."
작가 최란은 대통령에 대해 다르게 접근했다. 많은 장르드라마가 대통령을 악행의 몸통으로 봤다면, <신의 선물-14일>의 대통령은 부인과 측근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야한다. 범인은 수현과 동찬이 추격했지만, 사건을 해결한 건 어쩌면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측근들의 죄를 감추려 했다면, 샛별도 살아나지 못했겠죠. 대통령이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한 판타지인 셈이죠. 대통령까지 연루된다면 우리 사회가 너무 답이 없잖아요. 대통령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사회는 달라질 수 있어요.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 <피디수첩> 속 세상이 드라마의 재료
드라마를 통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뀌길 바라는 마음은 시사교양 작가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1993년 <피디수첩>을 시작으로 2004년 <중앙일보>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기까지 <환경스페셜>, <인간극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집필했다. 왜 드라마 작가를 꿈꿨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해요. 작가교육원에 다녔는데 잘 한다고 해서.(웃음)" 첫 드라마가 영웅이야기 <일지매>였다.
"세상엔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죠. 그게 드라마를 쓰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드라마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도 사랑이야기만 쓰진 말라고 해요. 물론 방송국에선 안 좋아하겠지만.(웃음)"
이 영리한 작가는 이미 시즌2의 포석도 깔아놨다. 드라마의 결말을 열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애초 시놉시스에서는 기동찬이 죽는 거였는데,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조승우씨와 시즌2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래서 나름 여지를 남겨준 거죠. 시즌2 제작이 될까요? 됐으면 좋겠어요."
이해가 안된다며 비판받았던 장면들 대부분이 드라마 제작환경때문이라네요...
우리나라 이거 좀 개선시켜줬으면 ㅠㅠ
훨씬 더 가치있는 드라마들이 많이 나올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