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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의 흑역사에 대하여
게시물ID : history_265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asterk
추천 : 1
조회수 : 3453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6/08/12 12:56:31

해방정국 이후로 김구선생은 이승만과 대립하면서 
반탁(미군정 신탁통치 반대) 및 남북 단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독립 운동가로 알려져있지요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중 한명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현재 알려진 김구선생의 흑역사들에 대해서는 
어떤식으로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첫 번째로는 치하포 사건으로 알려진 쓰치다 일본인 살해사건

이 사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범일지를 통해 알고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쓰치다가 일본군 장교라는 증거는 백범일지를 제외한 어디에도 없으며
사건 조서에 따르면 김창수(김구)가 새벽에 여관을 나오는길에 
아침상을 받는 순서가 정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찬 왜인이 먼저 밥상을 받아가
분한 마음에 발로차 고꾸라뜨리고 때려죽인후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었고 이내 탈옥하게됩니다.


두번째는 독립운동가 김립 암살 사건..

당시 임시정부산하 독립운동 정당인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의 전신)이 
소련 국제공산당(코민테른)측으로 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오는 과정에서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립이 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판단하고
암살단을 보내 상해거리에서 김립을 암살한 사건입니다. 

당시 임시정부내에 이념노선을 달리하는 여러 정당이 존재하였는데
김립은 그중 한인사회당(후에 고려공산당으로 바뀜)을 창립한 창립맴버였습니다. 

암살현장에서 김립과 동행했던 김철수에 의하면
공금 횡령에 대한 증거는 없고 당시 소련에서 넘어온 독립운동 자금은 
고려공산당을 위한 지원금이었며 그것은 임시정부의 공금이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실제 소련의 훈령을 통해 교차검증이 되는데
지원금 60만 루블은 모두 고려공산당에게 지급된것으로 되어있고
결산보고 의무 역시 고려공산당에 부여하고있었습니다. 

즉 소련의 공식문서들은 이 자금의 처분권자가 임시정부가 아니라
고려공산당이라고 명시하고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정부에 다양한 정당이 있고 
각 정당의 운용자금을 중앙정부에서 요구하는 상황에서 이를 거절한 김립이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김립은 아직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도 궁금한것이 
해방정국 이후 백의사 관련 요인암살 의혹입니다. 
대표적으로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 등등..
이것 역시 사실이라면 도저히 실드가 불가능한 내용들이죠.....

소련 군정의 해방정국 보고서에 의하면 
http://db.history.go.kr/item/level.do;jsessionid=F899592B21491ED8B1DDD94FB3A89037?levelId=fs_006_0010_0010
백의사는 직접적인 김구의 지휘하에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김구 자신도 백의사에게 결국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안두희가 백의사 암살요인이라는 설)

어찌보면 굉장히 불편한 내용들일수 있습니다만
김구선생이 건국훈장을 수여한 시점은 박정희가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62년 입니다.

박정희각하 께서는 여러분이 아시는것처럼 일제 만주군 출신으로 
일제에 혈서로 멸사봉공 견마(개와 말처럼)충성을 맹세한 인간으로 

당시 이승만 정권에 부패에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고 하였으나
그 시기는 이미 이승만이 4.19혁명으로 하야된 이후였습니다. 
따라서 쿠테타에 대한 정당성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 일환으로 이승만과 대립관계에 있던 김구선생의 미화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나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아시는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구선생을 공격하면서 함께했던 독립운동을 함께한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 같은 분들의 이름에 먹칠을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정말 관심이 있다면 이러한 흑역사도 역사의 일부로 좀더 정확하게 알고있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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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14:39:46추천 3
김구선생은 당연 완전무결한 성인이 아니죠
허나 흑역사라는 타이틀로 이미지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일딴윈 없다 봅니다.
잘잘못은 잘잘못 그대로 보면 됩니다.
왜 굳이 쓰레기 이승만 따위에도 붙이지 않는 흑역사라는 거창한 말이 필요한가요
댓글 1개 ▲
2016-08-12 14:41:49추천 0
그리고 정말 냉정한 역사가 알고 싶다면 다까끼에게 붙이는 각하호칭부터 떼야 보일겁니다.
2016-08-12 15:48:38추천 0
김구가  노선투쟁을 치루면서
일본인 보다 조선인이 더 많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해방이후 김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점은 높게 평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댓글 0개 ▲
2016-08-12 15:57:51추천 0
다른건 그렇다쳐도 김구의 해방정국 시기 백의사 관련설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위에 출처를 내걸었던 소련군정 정보 보고서.. 이 문서는 남쪽의 언론보도나 좌익단체의 보고에 기초한 것인데, 백의사가 김구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있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백의사는 CIC 방첩대하고 신익희의 정치공작대하고 밀접하게 연관) 그리고 백의사는 좌익단체의 회원들을 살해하는 것 외에 우익인사에 대한 테러에도 관여를 했습니다.

백의사가 1947년 초까지 노선이나 정서적으로 이승만보다 김구에 가깝다웠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 김구와 직접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신익희가 만든 정치공작대와 공조를 했고, 1947년 무렵이면 신익희는 김구와 결별을 하지요.

백의사는 인적으로 보면 경찰과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리고 뒤에 백의사 집행부장 역할하는 김명욱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사람은 김구 암살 때 국방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현직 군인 신분이었죠.

이런점에서 보면 김구가 백의사하고 직접적인 지시 관계에 있었느냐?라는것에서는 의문이 남는부분들 있습니다. 오히려 신익희하고 가깝죠.
댓글 0개 ▲
2016-08-12 16:48:06추천 1
딱히 김구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김구가 어떤 생각으로 거론된 사건들에 개입되었나를 살펴 보자면

1. 쓰치다 사건은 김구에 의해 미화, 왜곡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김구의 강렬한 적개심이 작용한 사건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시기 자체가 단발령과 을미사변으로 민중의 대일 적대감이 고조되었을 시점이며, 전근대적 사고관념(치하포 사건 자체가 1896년, 그러니까 19세기 말 조선시대 사건입니다)을 지닌 김구가 도검을 패용하고 주막의 예절을 지키지 않으며 출신지까지 속이는 '수상한 일본인'을 공격해 살해하는 것이 마땅히 정의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해방 후 김구가 장덕수 암살 관련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말한 ' 왜놈을 죽이란 말은 아마 내 입에서 끊인 적이 없었소'라는 말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쉽게 말해 민족주의적 관념과 공산주의적 관념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김구는 마땅히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할 운동가들(고려공산당)이 동족의 정부인 임시정부보다 소련의 국제공산당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수도 이해할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라는 것은 국경을 초월한 작용하는 계급주의 사상이었지만, 민족주의자 김구의 입장에서 고려공산당은 한낱 '친소련파' 일당이였을 따름입니다.
실제 김구가 저술한 '나의 소원'에서는 "소위 좌익의 일부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어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라고 공산주의를 비판합니다.

3. 백의사의 경우에는 윗분 말씀대로 백의사라는 단체 자체가 베일에 싸인 감도 있고 해서 뭐라 단정지어 이야기하기엔 그렇습니다. 물론 김구 일파는 해방 정국의 남한에서 미군을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무력행사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일파였습니다.
댓글 0개 ▲
2016-08-13 01:00:30추천 1
오늘날의 잣대로 그 시절의 인물들을 평가한다는 것이 좀 무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범 선생님같은 경우는 조선 말기에 이미 청춘을 보내고 사회화가 되신 분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과 오늘날의 사람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 만치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염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1. 당시는 일단 민간인과 군인을 딱히 구분하는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적국의 국민은 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관념 자체가 그랬습니다. 심지어 1,2차세계때만해도 선진국이던 유럽과 미국에서도 정치인과 군인들이 했던 소리가 "그 민간인들이 만든 무기가 군인 손에 들어가고, 그들이 농사지은 식량이 군인들 배로 들어간다. 구분한다는게 의미가 없다."라면서 무차별 폭격과 공격을 자행하던 시대였습니다.
한참 후진국이었던 조선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민씨 살해사건 때문에 일본 민간인이 맨손으로 돌아다녀도 맞아죽을 분위기인데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칼까지 차고 있다? 아마 백범 선생이 스치다를 공격할 때는 군인내지 경찰로 짐작하고 공격하고 죽였을 겁니다. 물론 후에 신분 확인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백범 선생 건 말고도 전국 각지에서 일본인에대한 공격이 많았기에 딱히 백범 선생만 욕먹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종이 특사로 전보쳐서 사면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마 당시에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애국이고 충성이었을 겁니다.

2. 백범 선생이 하신 말씀이 있는데 "내가 무슨 재산이 있다고 자본가들 옹호하겠소만은 소련과 코민테른 지령에만 충실한 공산주의자들을 곱게 볼 수는 없소."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친소부역자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단 김구 주석은 근대적인 정치 사상으로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위정척사운동을 했던 유림들과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단지 서양 문물과 종교에 더 우호적이었을 뿐...그런 의미에서보자면 공산주의자는 두 조국을 섬기는 불충한 무리였을 겁니다. 게다가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 파 공산당간의 싸움으로 벌어진 스보보드니 참변같을 것을 목격하셨을 거고,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으로 인해서 임시정부가 산산조각 나는 것도 봐왔기에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한 매국노 집단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3. 백의사가 김구 주석과 신익희등 임시정부세력과 긴밀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워낙 테러와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였으니까 말입니다. 당시를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당시는 "폭력을 불사해서라도 정의를 관철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람이니까 그 시대의 분위기와 패러다임에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정치인이라면 더합니다. 존경할 부분은 존경하고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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