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게임 규제법을 두고 말이 많다.
한 떄 게임을 만들어서 밥을 벌어먹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곧 돌아갈 사람으로서 게임을 두고 벌이는 갑론을박이 그다지 탐탁치만은 않다.
게임을 규제해야 한다고 하는 쪽의 논리는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빈약하다. 그와 반대로 규제를 반대하는 쪽은 언뜻 논리정연해 보이나 스스로 규제 찬성파의 프레임 안에 자기를 던져넣고 있다.
이래서야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셧다운제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게임 규제법은 실효성 있는 법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갖춰지고 나면 그 법은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야 한다.
셧다운제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정작 엄마 아빠 계정으로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 실질적인 효과는 5%도 안 된다는 이야기처럼,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인 비용만 초래하고 누군가의 눈 먼 돈을 누군가의 아가리에 쑤셔넣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정치와 게임 사이에 얽힌 이권의 먹이사슬'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득을 위해서 게임업계를 함정에 빠트리는 하이에나들이 아니라, 그 하이에나들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핏대를 올리는 나팔수들이다.
이상하게도, 게임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진보나 보수나 별반 다르지 않다.
전교조의 사례를 보자. 보수들에게 눈꼴시린 진보로 낙인 찍힌 이 집단도 게임을 규제하는 것에는 찬성한다.
하기사 집단 자체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니 그러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고 참교육을 실천한다는 기치 아래 집단을 결성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그들이 생각하는 꼰대와 같다니 이건 좀 웃기는 일이다.
비단 전교조 뿐인가? 대개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 어른들은 거의 유사한 반응을 보인다.
정치적 성향을 차치하고, 아이를 서너 군데의 학원으로 잡아 돌리는 학부모에게 물어보자.
그들에게 게임이란 처치해야 할 괴물, 아니면 아이를 구슬리기 위한 당근으로밖에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 어른들은 왜 게임에 적대적인가?
그것은 그들의 성장과정이 불우했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시절(지금도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의 청소년들, 즉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부해서 용될래? 그게 아니면 집에서 소나 키워!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학업 아니면 근로뿐이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만 해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제 쉰 살을 넘기신 나의 어머니께서는 때때로 그 당시 청소년들에게 짊어지워졌던 근로의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다.
3남매의 막내였던 어머니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제본소의 직원으로 일해야 했던 건 그냥 사족으로 달아두겠다.
(정작 당신께서는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셨지만.)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부모 세대는 노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유익하게 노는 법을 알지 못하는 세대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기성세대가 놀이에 대한 인식의 결함으로 만들어낸 직장 내 문화에 대해 돌이켜보아야 한다.
유익한 놀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기성세대들이 직장 내에 만들어 놓은 것은 흔히들 아시는 룸싸롱 문화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글쎄.
전체 신용카드에서 법인카드가 차지하는 비율이 5%, 그러나 사용금액은 26%, 그 중 대부분이 유흥을 위해 결제됐다는 뉴스를 첨부해주면 믿으려나?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이틀 전 MBC 뉴스데스크에서 방송된 내용이니까.
한가지 더 재밌는 것은, 기성세대가 사회악으로 지칭하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회식문화는 지나치게 건전하다는 점이다.
흡연자 비율도 매우 적고, 회식 때 술을 마시기 싫으니 보드까페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게임업계다.
왜 가장 나쁜 놈들이 가장 건전하게 놀까?
기성세대에게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기성세대가 건전한 놀이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게임이 고까워 보일 수 밖에 없다.
근원을 따지자면 긍정적인 놀이 문화를 획득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기성세대에 대한 애도가 먼저겠지만, 이미 그들은 게임을 적이라고 규정했고, 우리는 맞서 싸우기 위해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일단은 기성세대가 '놀 줄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만, 게임이라는 미지의 용액 X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 역시 한 몫을 한다.
영화 부시맨을 보자.
비행기 조종사가 다 마시고 버린 콜라병을 주운 부시맨.
그들은 콜라병을 접해본 적이 없다.
두려움과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콜라병을 테스트하던 그들은 이내 콜라병을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인간이 미지의 존재를 접하게 됐을 때 느끼는 감정은 대개 두 가지다.
흥미, 아니면 공포.
미지의 존재에 대한 흥미는 인간이 긍정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때 발현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기질을 억제당한 인간은 십중팔구 공포를 느낀다.
우리의 기성세대가 딱 이렇다.
놀이가 뭔지도 모르고, 더더군다나 게임이란 매체는 갑자기 지구에 낙하한 UFO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리고 여러분이 익히 아시다시피 기성세대의 반응은 게임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어른들은 무서운 미지의 용액 X에 대한 방벽을 열심히 쌓아올리고 있는 중이다.
개중에는 이미 정신무장만큼은 확실하게 되어 있는 분들도 계셔서 물리적인 방벽을 쌓아올리는 것을 진두 지휘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다.
(그렇지만 퍼시픽 림, 진격의 거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방벽이란 게 그다지 효과적인 방어수단은 아니다.)
사실상 게임에 대한 기성세대의 공포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들에게는 게임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제인 맥고니걸은 게임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대한민국의 기성세대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런 반응에 대한 사례도 있다.
2012년 3월 경, 대학생들이 게임에 사용하는 시간이 1만 시간이라는 기사에 대해 홍익대 교수라는 변모 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학생들 중 게임에 1만시간 이상 소비한 학생들이 여러 명. 1만시간이면 특정 분야 전문가될 수 있어. 7주 코스 Udacity 과목 13개 수강할 수 있고, 20분짜리 TED 강의 (정리까지 1시간으로 치면) 1만개 볼 수 있어. 정신차려라"
이는 말콤 글래드웰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설명한 1만 시간의 법칙에 빗대어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조롱한 것이다.
(이 분은 구글이 로고를 팩맨으로 바꿔서 손해본 돈이 얼마인지도 계산하는 분이시니 관심있으면 한 번 찾아보시길)
재미있는 것은, 그가 보라고 한 TED 강연 중에는 제인 맥고니걸의 '게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강의에 대해서는 TED에도 질 나쁜 게 있기는 하다고 하려나?
하여튼 기성세대는 게임을 무서워한다.
게임이 가진 가능성을, 너무 두려운 나머지 쳐다볼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나는 제인 맥고니걸과 같이 지나친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녀의 저서인 '누구나 게임을 한다.'에서 나온 사례들은 게임 자체가 순기능을 하는 사례 보다는 게이미피케이션과 게임을 통해 훈련된 게이머들이 조건이 갖춰질 경우 매우 뛰어난 생산성을 보이는 사례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고스란히 그들이 '계몽하고 훈계해야 할' 신세대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안돼, 저 미지의 물질을 먹으면 너는 괴물이 되고 말거야. 맙소사! 이미 들이키고 괴물이 된 녀석도 있잖아! 저것봐! 너도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지? 그러니까 너는 어른들 말씀을 잘 들어야 해.
어른들의 말을 들었을 때 효과가 있는 건, 그 어른들이 올바른 인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다.
그러나 우리 기성 세대는 게임, 나아가 놀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조차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놀이가 결핍된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 그리고 미지의 용액 X에 대한 공포가 합쳐져 유래없는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무 어른들 욕만 한 것 같은데, 정리를 좀 해보자.
새끼 사자는 어미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살아가는 방법은 어미가 그 어미에게, 혹은 직접 독초를 씹어 삼키고 사경을 헤맨 후에 얻게 된 것이다.
어른은 아이들보다 앞서 무언가를 겪고, 그것을 통해 얻은 생각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겪어보지도 못한 것을, 겪을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는 것을 마치 잘 아는 것인양 포장해서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 과연 어른의 역할일까?
어쩌면 우리는 직접 겪어보고 새끼를 가르치는 어미 사자보다도 못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